[보르헤스] 알렙 후기 - 1월 17일 세미나 +1
토라진
/ 2017-01-23
/ 조회 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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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르 또는 피리 부는 코끼리>
코끼리는 붉은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붉은 사막으로 나를 데려온 것은 코끼리와 코끼리의, 이어지는 코끼리, 또는 ‘코오끼이리리. 아니면 코, 그리고 코오, 아니면 끼리끼리······’ 다시 기억할 수 없는 망각의 주문이었다. 모래는 죽음으로 완벽해진 샤를 로즈의 냉담함을 방기했던, 검은 장례식에 놓여 있던 꽃처럼, 붉었다. 사막 위에 서 있는 거대한 코끼리는 안개무덤처럼 뿌옇고 흐릿했다. 바람을 타고 눈으로 들어오는 모래 때문에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형태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크기가 하도 커서 구부러진 부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바람에 흩어졌다 다시 나타나는 안개 사이로 직선으로 뻗은 선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불가사의들이 증식되었다던 미로에서 길을 잃었던 니꼴라스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있어 모든 직선은 끝이 없는 원의 휘어진 모양일 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원한 나의 꿈을 떠올렸다.
꿈에서 나는 한 알의 작은 모래알이었는데, 그 다음 날은 두 알의 모래알로 변해 있었다. 붉은 사막의 모래로 장미를 그리고 싶다는 달리의 요구에 따라 나는 적어도 17,155,000일 동안 같은 꿈을 꿔야만 했다. 하지만 달리는 붉은 장미꽃 대신 ‘우주 코끼리’를 그렸고, 그 덕분에 나는 붉은 사막 위에 서 있는 코끼리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꿈속의 이야기인 것일까, 아니면 모래가 된 나의 몸이 그려진 우주 코끼리를 품은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언젠가 술집에서 마셨던 오렌지 술 한 잔 때문에 빚어진 일인지도 모른다고,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샤를 로즈가 죽음이라는 과오를 저질렀던 6월 6일. 나는 다음 날 그녀의 장례식을 갔다가 종로의 허름한 술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샤를 로즈를 떠올리며,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녀가 남긴 유언장을 떠올리며 망자를 추모했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늘 정확한 차림새로 나타났던 샤를 로즈는 어느 날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금세 한물 간 것이 되어버리고 정확한 그녀의 차림새 또한 금세 촌스러워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의 얼굴은 또 다른 얼굴 위에 겹쳐질 수 없다’ 그녀의 이 유언의 말은 우주의 상징적 거울 같았다.
오렌지 술은 지나치게 달고 오렌지 껍질의 쓰고 떫은맛이 강했다. 민들레 술을 주문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우주의 역사와 그것의 끊임없는 인과론적 연쇄를 암시하지 않는 선택은 없다고 생각하며 후회했던 마음을 철회했다. 술은 맛이 없었지만 취기를 가져다주는 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코끼리를 봐야지, 코끼리. 코끼리.”
옆 테이블에서 오렌지 술을 마시고 있던 부랑자 같은 행색의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힐끗거리자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쓸데없는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돈을 내고 잔돈을 받았다.
“그 동전 말인데······그걸 자이르라고 하지. 다가올 미래의 창고 같은 것이야. 돈은 미래의 시간이니까 말이지. 그것은 근교의 한 오후일 수도 있고, 브람스의 음악일 수도 있고, 지도일 수도 있고, 장기일 수도 있고, 카페일 수도 있고, 재화를 멸시하도록 가르치던 최영 장군의 금언일 수도 있다고.”
남자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허공에 떠도는 먼지에 실린 중력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가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대답했다.
“난, 세계주의자라네. 늘 동전의 뒷면을 들여다보도록 애쓰고 있지. 언젠가 한 번은 동전의 양면을 바라보는 순간이 오니까 말이지. 그것은 우리의 시야가 구체(球體)로 되어 있고, 자이르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야. 자이르가 아닌 것은 내게 마치 멀리에 있는 것처럼 올이 촘촘한 형상으로 다가온다네. 테니슨은 만일 우리가 한 송이의 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들이 누구이고, 우주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코끼리를 봐야지, 코끼리. 코끼리.”
나는 그에게 물었다.
“코끼리, 당신이 말한 코끼리라는 게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터진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고는 그 안으로 삐져나온 손가락을 내게 흔들어 보이며 키득거렸다.
“내가 니투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말이야. 감방의 바닥과 천정에 그려져 있던 코끼리를 본 적이 있었어. 코끼리들이 코끼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고, 코끼리들로 된 선으로 그려져 있었고, 그것에는 여전히 코끼리처럼 보이는 바다들과 히말라야 산맥과 군대들이 포함되어 있었지. 그 코끼리들을 그린 이교도인은 원래 세계지도를 만들고 있었다는군.”
“니투르 감옥은 어디에 있는데요?”
“어디에나 있지. 돈만 내면 말이야. 하지만 함부로 지불하려 하지는 마. 자이르의 성질을 갖지 않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 너는 죽게 될 테니까.”
나는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다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손가락을 구멍 사이로 집어넣어 흔들었다. 앞뒤의 이야기가 바뀐 코미디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다소 얼떨떨했다. 여전히 그는 키득거리고 있었고,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등 뒤로 그가 문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코끼리가 부는 피리 소리를 조심해!”
사막은 한낮의 태양빛을 받아 더욱 붉어졌다.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코끼리는 여전히 사막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긴 코와 육중한 다리가 코끼리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믿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죽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서 그 코끼리를 보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러나 왜 하필 코끼리인가? <신의 글>에서 보르헤스가 말했던 호랑이가 왜 아니란 말인가? 보르헤스의 호랑이는 그를 낳은 호랑이들, 그가 삼켜버린 사슴들과 거북이들, 사슴들이 뜯어먹은 목초, 목초의 어머니인 대지, 대지를 낳은 하늘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의 모든 말은 바로 그러한 연계를 개괄적으로 진술하게 된다고, 보르헤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코끼리는, 코끼리는 무엇을 진술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골똘해졌다. 코끼리는 호랑이보다 크고 무겁다. 하지만 호랑이처럼 사슴이나 거북이들을 잡아먹지 않는다. 사슴처럼 풀을 뜯어먹지만 호랑이에게 잡히지는 않는다. 너무 크고 무거워서이다. 무서운 건 그것이었다. 크고 무겁지만 어떤 다른 동물을 해치지 않는 것. 나는 그 코끼리, 거대하고 무거운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코끼리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하고 무거운 형상이 나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뒷걸음쳐갔다. 그러자 저절로 오르팅스 블루의 싯구절이 떠올랐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그리고 그 때 피리 소리가 들렸다. 코끼리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기다란 코를 들어 이리저리 흔들어 소리를 흘려보냈다. 콸콸 거칠게 물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 나는 소리, 나직히 나무라는 듯한 소리, 흐흑 들이키는 소리, 외치는 소리, 울부짖은 듯한 소리, 웅웅 깊은 데서 나는 것 같은 소리, 새가 울 듯 가냘픈 소리, 앞의 바람이 휘휘 울리면 뒤의 바람이 윙윙 따르고 산들 바람에는 가볍게 응하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응하는 듯한 소리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붉은 모래가 일어 눈물이 났다. ‘살다’와 ‘꿈꾸다’가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깨어나기 이전에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붉은 사막 한 가운데, 코끼리가 서 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자이르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그것을 던졌다. 자이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모래 위에 발을 내딛었다. 안개무덤 속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모래 속에 빠져든 발을 들어 다시 새로운 모래 위에 올려놓았다. 발자국은 어느새 사라졌으며, 어느 한 걸음도 쉬이 허공을 차고 나오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이르는 어느 모래 속에 빠져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자이르는 장미의 그림자이며 베일의 찢겨진 틈바구니이다. 나는 아흔아홉 개의 신성한 이름들을 그것들이 전혀 뜻이 없는 어떤 무엇으로 변해 버리게 될 때까지 되풀이해 되뇌었다. 나는 그러한 길을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결국은 자이르를 모두 소진시켜 버리게 되고 말리라.
다시 붉은 모래 바람이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나는 반쯤 눈을 뜬 상태로 가장 높은 태양의 꼭대기를 향해 나아갔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우리가 자이르를 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으므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므로!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을 때, 그리하여 더이상 '생산하는 신체'가 아니라 '텅빈 신체'로 만들었을 때,
그 욕망의 이름을 '자이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사막에서 눈을 뜨고, 문득 온 세계가 자이르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겠지요.
이 시는 <도깨비>에 삽입된 그것! 오르팅스 블루의 것이었군요. 궁금하던 참이었어요. ^_^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