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알렙 > 중 '알렙' 발제
토라진
/ 2017-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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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렙
2월의 어느 무더운 아침, 베아뜨리스 비떼브로는 병마의 고통 끝에 마침내 죽었다. 나는 그녀가 죽은 후 매년 4월 30일이면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의 사촌인 까를로스 아르헨띠노 다네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지구>라는 시를 쓰고 있었다. 그는 비평가들이 보석도 없고, 보물들을 주조하기 위한 증기 압착기도, 엽연기도, 황산도 없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물이 ‘어디에 있는가’는 가리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알바로 멜리안 라피누르에 대한 질시감 깃든 찬사를 늘어놓더니 그에게 자신의 시의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내게 맡겼다. 나는 무턱대고 동의했지만 귀찮아서 말을 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즈음 지난 후 다네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인 스니오와 숭그리가 제과점을 확장한다는 구실로 아래 자신의 집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며 흥분했다. 그의 집 지하실에 알렙이 있는데, 자신의 시를 끝마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지점들을 포괄하고 있는 어떤 공간 지점들 중에 하나라는 했다. 나는 알렙이 궁금했다. 그래서 당장 그것을 보러 다네리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 지하실에 내려간 나는 그의 말대로 판석이 깔려 있는 바닥에 누워 19번째 계단에 눈을 고정시켰다. 나는 눈을 감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알렙>을 보았다. 내 눈이 보았던 것은 동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글을 옮기는 것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성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무엇인가 적어보도록 하겠다.
<알렙>은 직경이 2또는 3센티미터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공간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그것은 알라누스 데 인술리스가 말한 ‘중심이 모든 곳에 있고, 원주는 어떤 곳에도 없는 어떤 구체’와 같다. 그것에는 모든 것들이 서로 겹치거나 투명해져 버리는 법 없이 같은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고 동시적이다. 그것에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과 모든 현상과 모든 사물이 함께 들어 있다.
나는 그 집을 빠져나왔다. 거리에서, 광장의 층계에서, 지하도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제 나를 놀라게 할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세계에 대한 그 뒤집힌 인상이 나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망각이 불면의 밤에서 나를 구원하였다.
<1943년 3월 1일의 후기>
가라이 거리의 그 건물이 헐린 뒤 6개월 후 [아르헨띠노 시선]이라는 발췌본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문학상> 2등상을 받았다. 나는 <알렙>의 본질과 그 이름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그 이름은 그의 집에 있던 <알렙>이 보여준 셀 수 없이 많은 책들 중에서 하나에서 보았던 것일까? 결국 나는 다른 <알렙>이 존재한다고(존재했다고)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리이 가에 있던 <알렙>은 가짜였다고 결론지었다. 그 근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 거울(알렙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로에 있는 아무르회교 사원의 중앙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돌기둥들 중 하나에 우주가 들어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돌기둥 내부에 그 <알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알렙을 보았다가 그리고 나서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 것일까? 우리들의 정신에는 망각의 구멍들이 있다. 세월 속에서 베아뜨리스의 모습 역시 변질되고, 상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