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고원] 안면성 후기(1/20) +2
선우
/ 2017-01-25
/ 조회 3,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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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안면성 고원에서 들뢰즈가 탐구하고 있는 것은 안면성의 추상기계가 언제 작동하는지, 그 기계의 작동으로 생산된 얼굴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지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먼저 ‘얼굴’이 무엇인지부터 얘기해야 하는 거고요.
“얼굴은 안면성의 추상기계로부터 태어나며, 이는 얼굴을 생산하는 동시에 기표에게 흰 벽을 주고 주체성에게는 검은 구멍을 준다. 따라서 검은 구멍/흰 벽 체계는 이미 얼굴이 아닌 셈이며, 그 장치의 변화하는 조합에 따라 얼굴을 생산하는 추상기계인 셈이다.”(176-177)
차원 없는 검은 구멍과 형태 없는 흰 벽이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신체 없는 기관들, 조각난 신체를 고려하기 전에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기관 없는 신체’ 였듯이, 얼굴보다 먼저 있는 안면성의 추상기계가 일차적입니다. 그렇다면 얼굴과 머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미나 시간 이 부분을 하면서 ‘상대적’ 탈영토화다, ‘절대적’ 탈영토화다 하면서 좀 헷갈렸는데요. 원시인의 ‘머리’ 와 문명인의 ‘얼굴’을 비교할 때 말이죠. 머리나 손은 탈영토화 되었다 해도 여전히 신체의 일부입니다.(내용의 층위는 그대로) 그러나 얼굴이 머리에서 탈영토화될 경우에는 더 이상 신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내용의 층위에서 표현의 층위로 옮아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면화의 탈영토화 계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라고 말할 수도 있고요. 아, 물론 의미화 내지 주체화의 지층으로 옮겨간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정적인데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183) 머리만 안면화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 전체도 안면화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물 또한 표현의 층위로 옮아갈 수 있는데요, 이럴땐 사물의 ‘풍경화’(즉 안면화)라고 말하고요. 머리가 탈영토화되어 ‘얼굴’을 생산하듯이, 사물이 다만 환경으로 머무르지 않고 탈영토화되어 의미를 갖게 되면 ‘풍경’이 됩니다. 사물이 ‘얼굴(표정)’을 갖는다는 말이겠지요. 얼굴이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 처럼요.
“미지의 탐험되지 않은 풍경을 담고 있지 않은 얼굴은 없으며, 사랑받거나 꿈꾸는 얼굴에 서식하지 않는 풍경도, 도래할 혹은 이미 지나간 얼굴을 펼치지 않는 풍경도 없다. 대체 어떤 얼굴이 자신이 뒤섞은 풍경들-바다와 언덕-을 불러내지 않을 것이며, 대체 어떤 풍경이 자신이 그 선과 특질에 예기치 못한 보충을 제공하면서 완성했을 얼굴을 상기시키지 않을 것인가?”(181)
얼굴 이전, 얼굴을 만들어 내는 안면성의 추상기계가 먼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언제 안면성의 추상기계를 작동시키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안면성의 추상기계에 시동을 거는 게 뭐냐? 안면성의 추상기계보다도 먼저 있는게 뭐냐? 인거죠. 그것은 바로 ‘권력의 특정한 배치’입니다. 권력의 특정한 배치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한답니다. 여기서 들뢰즈는 원시 사회인 전-기표체제와 의미화 주체화 체제를 비교하는데요, 원시 사회는 얼굴을 통과하는 것이 거의 없고, 이들의 기호계는 비기표적이고 비주체적이며, 본질적으로 집단적이고 다음성적이고 신체적입니다.(184) 원시 사회는 얼굴을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구요. 이들이 쓰는 가면도 머리를 얼굴로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머리가 신체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원시 사회는 권력의 배치가 없었다는 말일까요? 분명한 것은 기표체제(의미화)와 탈기표체제(주체화)이 혼성 체제는 권력의 특별한 배치로 말미암아 ‘얼굴’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전제군주의 국가 장치와(파라오, 의미화체제), 유태 민족(히브리, 주체화체제, 권위적). 두 체제가 혼성된 체제는 특별한 권력의 배치가 있습니다. 전제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의 구체적 배치가 있고, 여기서 흰 벽/검은 구멍이라는 안면성의 추상기계가 작동하여 의미화와 주체화의 ‘얼굴’이 탄생합니다. 따라서 얼굴은 권력의 배치와 관련이 있으며, 얼굴이 곧 정치가 되는 것입니다.(190)
얼굴은 추상기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기표도 주체도 이미 거기에 있는 것으로 전제하지 않습니다.(얼굴의 비인간성) 주체가 얼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그 주체를 선택합니다. 우리는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어떤 얼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안면성의 추상기계를 작동시키는 것, 얼굴과 풍경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회구성체입니다. 들뢰즈는 이 사회구성체가 이질적이고 다음성적이며 원시적인 모든 기호계를 붕괴시켰다고 말합니다. 의미화와 주체화는(특정한 사회구성체) 모든 다음성성을 붕괴시키고 언어 활동을 배타적인 표현 형식으로 수립하고 기표적인 일대일 대응과 주체적인 이항화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189) 표현 형식으로서의 언어의 배타성을 주장했다는것이죠.
“새로운 내용과 더불어 특정한 표현 형식으로서 의미화와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특정한 권력의 배치다. 전제적 배치가 없다면 의미화도 없으며, 권위적 배치가 없다면 주체화도 없다. 바로 기표를 통해 활동하고 정신과 주체 위에 행사되는 권력의 배치가 없다면 의미화와 주체화 간의 혼성도 없다.”(189)
특정한 사회구성체(의미화 주체화의 혼성적 기호계) 안에 있는 권력의 배치가 흰 벽/검은 구멍의 추상기계를 작동시켜 얼굴을 생산합니다. 기표적이고 주체적인 기호계는 결코 신체를 관통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안면화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기표적 전제적 얼굴은 ‘정면’이고 정욕적이고 주체적인 얼굴은 ‘측면, 옆모습’이라는 말도 나오고요. 두치오의 <사도를 부르심>이라는 그림이 이 두 상태, 정면과 측면을 다 보여주고 있다고 하네요.(194)
이제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검은 구멍을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흰 벽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얼굴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그럼 우리는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왜” 얼굴을 해체해야 하느냐구요.
“얼굴이 정치라면, 얼굴의 해체 또한 현실적인 생성에, 모든 은밀하게-되기에 관여된 ‘정치’인 것이다.”(197)
얼굴은 특정한 권력의 배치에 의해 생산된 것입니다. 얼굴은 정치입니다. 결국 얼굴을 해체하자는 것은 특정한 권력의 배치를 해체하자는 말이겠지요. 제겐 그렇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탈안면화 역시 ‘정치’인거지요. 흰 벽을 돌파하고 검은 구멍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치’입니다.
들뢰즈는 프랑스 소설의 예를 들어 검은 구멍에서 벗어나고, 기표의 벽을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설명합니다. 프랑스 소설은 오직 ‘조직된’ 항해만을, ‘예술’을 통한 구원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술 즉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 삶에서 현실적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의 힘을 빼앗아 가면 안돼”(196) 예술은 목적이 아니라 삶의 선을 그리기 위한 도구로서 필요합니다.
“동물이 되는 것은 글쓰기를 통해서고, 지각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은 색체를 통해서며, 동물과 인식불가능한 것이 되는 동시에 추억없이 단단하게 되는 것은 음악을 통해서다. 즉 사랑하게 됨으로써다.”(196)
마지막으로 실천적인 신중함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요. 우선 중요한 것은 원시인의 전기표적이고 전주체적인 기회계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는거죠. 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기표의 흰 벽, 주체성의 검은 구멍, 그리고 안면성 기계는 막다는 골목이고, 우리의 복속과 예속의 척도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나며, 바로 거기서 싸워야 합니다.(198) 이제부터 멋진 말이 나옵니다.
“오직 기표의 흰 벽을 가로지름으로써만, 모든 추억, 모든 회귀, 가능한 모든 의미작용과 있을 수 있는 모든 해석을 무효화하는 비기표성의 ‘선’을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주체적인 의식과 정욕의 검은 구멍 안에서만, 비주체적인 ‘생생한’ 사랑-거기서 각각은 상대방의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거나 그것을 정복하지 않으면서 그것과 접속되며, 거기서 선들은 끊어진 선들로 구성된다-을 위해 다시 던져야 하는 변형되고 가열된 포획된 입자들을 발견할 것이다. 오직 얼굴 안에서, 검은 구멍의 밑바닥에서, 흰 벽 위에서 자유로운 안면적 속성을 새처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198)
비주체적인 생생한 사랑. 상대방의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정복하지도 않는 사랑. 하...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은 멋집니다.^^
여기까지.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리좀 희음 삼월 나무 오라클 반디 토라진 아은 자연 성혜 아침 주호 님~~
모두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랑으로" 여성 되고 단단하게 되는 한 해 되시길요...^^
그리고 우리, 끝까지 살아남읍시다요 ㅎㅎ
희음님의 댓글
희음
지난 시간은 풍경이라는 개념의 확장을 경험했던 시간이었고, 이 후기는 그 확장을 확정 짓는 글인 듯합니다.
세미나를 위해 늘 꼼꼼하게 신경 써 주시고 복기하도록 도와주시는 선우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