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주본기>, <진본기> 에 대해
기픈옹달
/ 2017-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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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 시간에 나누어드린 자료입니다. 사대부고에서 강의한 내용을 붙입니다.
<진본기>, ‘천하’ 경영의 비법
1. 주나라, 천명天命을 앞세우다.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는 폭군으로 유명하다. 과연 그가 얼마나 폭정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폭군으로 이름을 남긴 까닭에 그의 이름은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편 그를 몰아내고 천자의 자리에 오른 무왕은 후대에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읽을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는 승자의 말을 전한다는 점이다. 무왕이 주왕을 몰아냈기 때문에 저렇게 기록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저 오랜 과거의 일이 실제 있었던 것인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도리어 이런 이야기를 통해 읽어야 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갖는 특정한 ‘전형성’이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물론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보다 ‘역사의 반복’이라는 ‘이해’는 우리가 역사를 읽는 특정한 틀을 가졌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즉, 고대 사회의 어떤 사건을 해석해 놓은 역사기록이 있기에 그와 유사하게 다른 사건도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와 비슷하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주본기에도 이런 부분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주나라의 창업자로 불리는 문왕과 무왕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름부터 버려지 아이라는 뜻의 ‘기棄’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자. 그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마치 신화와도 같다. 거인의 발자국을 밟은 이후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그런가하면 이런 기이한 출생에 아이를 버렸으나 짐승들이 아이를 보살펴주어 결국은 다시 데려와 키웠다는.
이 이야기를 읽고 떠오르는 대목이 많았을 테다. 예를 들어 고주몽의 이야기라던가, 혹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여러 임금들의 이야기. 멀리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그렇고, 모세가 그랬다. 이런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버려진 아이는 귀한 인물로 자라난다. 버려진 아이는 영웅, 혹은 한 나라의 시조가 된다. 과연 왜 이런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 이야기의 중심 주제가 아니므로 질문으로 남기고 넘어가기로 하자.
주나라의 임금 가운데 가장 널리 이름을 떨친 인물은 문왕 창이다. 그는 워낙 뛰어난 인물이어서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려고 삼촌들이 스스로 자처하여 나라를 떠나는 일도 있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믿거나 말거나. 다만 이러한 이야기, 왕위를 뛰어난 인물에게 양보하는 이야기는 이후에도 적지 않게 보이는데 고대 사람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덕목을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천자가 되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사기>는 저 옛날부터 물러남의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전해주고 있다.
<사기>는 문왕의 여러 덕목을 함께 전한다. 그는 모함을 받아 유리라는 곳에 갇혔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물론 백성의 마음을 사는 일을 벌인다. 잔혹한 형벌로 이야기되었던 ‘포격형’을 없앤 것이 대표적인 일이다. 덕을 쌓아 백성들의 마음을 산 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천명’이다. 비록 그는 천하에 대한 욕망을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을 숨기지는 않았다. 문왕은 ‘천명’을 받았다고 일컬어졌는데, 이는 하늘이 그를 천하의 지배자, 천자天子로 세우겠다는 뜻이다. 고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주나라가 이 천명을 앞세워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 했다고 말한다.
하늘이 왕, 천자를 세웠다. 거꾸로 이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시조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더욱 필요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하늘의 명령’을 이야기하자 이제 이 하늘의 명령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생각도 자연스레 생겨나게 되었다. ‘천하天下’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천하라는 세계는 국경이 그어지지 않는다. 이는 동등한 위계를 지닌 나라 사이를 이야기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자는 천하의 지배자이며 거꾸로 이는 하늘 아래 모든 땅이 천자의 지배 아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천자의 지배가 모든 세계에 고르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천자가 거처하는 곳과 가까울 수록 그 영향력이 클 것이고 먼 곳은 그 영향력이 작을 것이다. <주본기>에서는 이를 ‘전복-후복-빈복-요복-황복’이라 하여 다섯으로 나누었다.
선왕의 제도에는 나라 안쪽을 전복, 나라 바깥을 후복, 제후국의 바깥을 빈복, 이만이 사는 곳을 요복, 융적이 사는 지역을 황복이라 했습니다. 전복에 있는 국가는 제에 참여하고, 후복에 있는 국가는 사에 참여하며, 빈복에 있는 국가는 향을 바치게 하고, 요복에 있는 국가는 공을 바치게 하며, 황복에 있는 국가는 죽을 때까지 왕을 받들어야 합니다. … 이를 순서에 맞게 실행했는데도 알현하러 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제하지 않는 자는 형벌을 내리고, 사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며, 향하지 않는 자는 정벌하고, 공하지 않는자는 꾸짖으며, 왕으로 받들지 않으면 타일렀습니다. 이에 형벌을 내리는 법이 있고, 공격하고 토벌하는 군대가 있으며, 쳐서 정벌하는 조처가 있고, 위엄있게 나무라는 명령이 있으며, 알려 타이르는 글이 있는 것입니다. (126~127)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다섯은 천자의 지배로부터 점차 멀어질 수록 천자의 일에 참여하는 의무도 가볍고, 이를 위반했을 때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약해진다. 형벌을 내리는 것보다야 타이르는 것이 더 가볍지 않나. 다르게 말하면 주나라의 천자는 천하의 지배자이기는 하되,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끝까지 권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있다. 그렇다면 주나라는 어떻게 천하의 중심에서 다른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2. 봉건체제의 탄생
제목에 ‘경영’이라는 말을 붙였는데 이 말은 ‘management’의 번역어로 사용되기 훨씬 이전에 쓰인 말이었다. 주나라 문왕의 시대를 노래한 시에서 그 표현이 처음 보인다.
經之營之 경지영지 측량하고 땅에 줄을 치니
庶民攻之 서민공지 백성들이 모여들어 힘을 모았으니
不日成之 불일성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만들었도다
經始勿亟 경시물극 급하게 일할 것이 없다 하였음에도
庶民子來 서민자래 백성들은 마치 자식처럼 모여들었다.
내용인즉 주문왕이 무엇을 세우려 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기꺼이 모여들어 힘을 모았다는 이야기다. 백성들이 모여들어 매우 수월하고도 빠르게 일을 마칠 수 있었다는 말씀. 여기서 ‘경지영지’를 줄여 ‘경영’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때문에 사전에서 ‘경영’을 찾아보면 ‘계획을 세워 집을 지음’이라는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디 ‘경영’의 비법이란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들의 ‘참여’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는 점이다. <주본기>는 이를 덕德으로 풀이한다. 문왕이 훌륭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를 도왔다.
문왕의 아들 무왕에게도 그런 점이 보인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9년 되는 해에 은을 정벌하기로 한다. 그 역시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고 ‘문왕을 받들어 정발하는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를 위해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신주를 수레에 싣고 전쟁에 나선 일이다. 그가 은과의 전쟁에 나섰을 때 함께 모인 제후가 팔백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왕은 이 숫자가 적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년 뒤 다시 군대를 이끌어 은을 정벌하는데 이때 무왕이 주왕을 공격하며 한 말이 흥미롭다.
“옛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는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하였소. 지금 은나라 왕 주는 오직 여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선조께 지내는 제사를 버러두고 지내지 않으며 나라를 혼미한 상태로 버려두었소. 또한 그 부모와 형제를 등용하지 않은 채 버려두고 오직 사방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들만 존중하고 대우하니 그자들이 오히려 백성에게 포악하게 대하고 상나라에 온갖 잔악한 짓을 저질렀소 지금 나 발은 오직 하늘의 벌을 받들어 행할 것이오.” (117~118)
그 유명한 ‘암탉이 울면~’ 운운한 말이 여기서 나왔다. 무왕은 달기라는 여인을 지목하여 이 말을 하였다. 더불어 주왕이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부모와 형제를 버려두었다고 비난한다. 거꾸로 말하면 그 집안이 엉망이 되었다는 말이다. 왜? 여자 말을 들어서.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말하는 ‘집안’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여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제사를 받들며 부모와 피붙이 형제를 아끼는 그런 가부장적 집안을 떠올릴 수 있다. 은나라의 정벌은 집안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당연히 은나라를 대신하여 천하의 지배자가 된 주나라에는 이 집안이 중요할 수밖에.
은나라를 정벌한 이후 주나라의 천자는 공신과 형제에게 각 지역을 떼어 준다. 이렇게 땅을 떼어 권력을 넘겨주는 행위를 봉토건국封土建國, 줄여서 봉건封建이라 한다. 땅을 떼어준 지역을 나라(國)라고 불렀으며, 그 지배자를 제후라 불렀다. <주본기>에 등장하는 수 많은 나라들은 이렇게 나누어준 나라들이었다. 대표적인 나라로는 무왕을 도와 은을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태공망의 제나라가 있다. 한편 무왕의 동생 주공의 아들에게 내려준 노나라도 있다. 노나라에서 나온 유명한 현인이 바로 ‘공자孔子’이다.
중앙에 주나라의 천자가 지배하는 지역이 있고, 그 주변은 형제와 공신들의 제후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이 밖에는 실질적인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오랑캐의 땅이 있다. 다르게 보면 제후국들은 주변에 둘러친 병풍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 주나라의 위치가 서쪽에 치우쳐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동심원 모양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제후국의 역할이란 천자의 나라를 돕는 데 있었다.
따라서 천하는 마치 커다란 한 집안과도 같았다. 비록 한 지붕 아래 있지는 않았지만 하늘이라는 지붕아래서 주나라를 큰집으로 모시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렇게 주나라의 시스템은 가족을 크게 확대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 배경에서 저 먼 옛날부터 ‘효’가 강조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효란 이런 천하를 지배한 주나라의 통치 모델, 가족의 체제를 유지하는 덕목이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 제후국은 천자의 나라를 섬겨야 했다. 이것이 잘 지켜지는 시대도 있었겠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시대도 있기 마련. 혼란의 시대는 코앞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3. 춘추전국, 혼란의 시대
옛 임금의 시호를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시호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공과를 고려하여 붙이는 호칭이다. 여왕厲王의 ‘려厲’는 사납다는 뜻이다. 주나라는 여왕 때에 이르러 크게 어지러워진다. 그 이유는 둘인데 우선은 백성들로부터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왕실이 장차 몰락하려는 것 같습니다. 영이공은 이익을 독점하면서도 그 큰 재앙은 알지 못합니다. 이익이란 만물에서 생기는 것이며 천지가 소유한 것이라 누군가가 독점하면 피해가 많아집니다. 천지 만물은 모든 이가 같이 써야 하거늘, 어찌 독점할 수 있습니까?”(130쪽)
천하는 한 집안과도 같지만 어떤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집안이기는 하되, 한 사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매우 신선하게 들리는데 왜냐하면 끊임없이 공공성이 파괴되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왜 독점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함께 쓰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한편 또 다른 이유로는 백성들의 비판을 막았기 때문이다.
34년, 왕이 더욱 엄해지자 백성들은 감히 말을 하지 못한 채 길에서 눈짓만 보냈다. 그러자 여왕은 기뻐하며 소공에게 말했다. “내가 비방하는 것을 금지시키자 감히 말하지 않게 되었노라.” 소공이 답했다. “이는 말을 못하게 막은 것뿐입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다치는 사람이 반드시 많은 것처럼, 백성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 때문에 물을 다스리는 자는 둑을 터서 물길을 이끌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그들이 말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132)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천하의 물건을 독점하는 동시에, 백성들의 입을 막았던 여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본기>는 그가 결국 천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나라 바깥에서 죽었다. 이때 정치는 재상이었던 소공과 주공이 담당했는데 이 둘이 서로 어울려 일을 처리하였던 것을 두고 공화共和라 말한다. 훗날 ‘republic’의 번역어로 이 공화가 사용된 점은 흥미롭다. 과연 이것이 ‘republic’의 적절한 번역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여왕과 같은 포악한 독재 군주를 몰아낸 뒤에야 ‘공화’의 정치를 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왕 이후 천하를 크게 어지럽게 만든 것은 유왕幽王이었다. 여기서 ‘유幽’는 어리석다는 뜻이다. 그는 포사라는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기존의 태자를 폐하였다. 한편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는 고사는 유명하다. 포사의 웃을 보기 위해 봉화를 올려 제후국의 군사를 모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정작 오랑캐가 침입해왔을 때엔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유왕은 목숨을 잃고, 나아가 주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서쪽에 수도를 둔 시대를 서주, 동쪽으로 옮긴 이후를 동주라 부른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만큼 주왕실의 권위가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이후로는 주왕실은 다른 나라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존재가 된다. 흔히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 부르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을 두고 붙인 이름이 아니라 역사서에서 나온 이름이다. <춘추>와 <전국책>이라는 역사책에서 각기 이름을 따와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이름으로 삼았다. 간단히 이 두 시기의 차이를 말하자면 춘추시대에는 그나마 주왕실의 권위가 조금은 남아있었다면 전국시대에 이르면 그마저도 사라져버린다는 점이다.
동주시대,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주왕실은 더 이상 천하의 맏이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큰 집안은 의미없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힘있는 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밖에. 춘추시대에는 주왕실을 대신하여 권력을 손에 쥔 제후들이 등장하는데 총 다섯이 있어 이를 춘추오패라 부른다. 통상적으로는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 부차, 월왕 구천을 든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다만 이때 주왕실의 권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을 보자.
(양왕) 17년, 양왕이 진나라에 급히 도움을 청하자 진나라 문공은 양왕을 맞이하게 하고 숙대를 죽였다. 이에 양왕은 진나라 문공에게 규, 창, 활, 화살을 내렸으며, 패자로 삼고 하내 땅을 진나라에게 주었다. (양왕) 20년, 진나라 문공이 양왕을 부르자 양왕은 하양과 천토에서 (진나라 문공을) 만났는데, 이때 제후들이 모두 조회하러 왔다. 사서에서는 이 일을 꺼려 ‘천자가 하양에 순행하러 갔다.’라고 기록했다. (142)
주나라의 혼란은 끊이지 않는다.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진나라의 도움을 구하였다. 진문공은 이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주양왕에게 상을 받았으며 패자로 인정받았다. 선물을 주고 패자로 삼았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나마 주양왕의 지위가 높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3년뒤 기록에서는 이것이 뒤바뀐다. 진문공이 주양왕을 불렀다. 주나라 당시의 체계로 보자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른 것이다. 진나라의 세력이 컸던 상황에서 주양왕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천자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제후국 등을 둘러보러 움직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순행’이라 하였으며 제후들은 천자를 뵈러 모여야했다. 이 모임을 ‘조회’라 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실상은 진문공이 주양왕을 부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그대로 기록할 수 없어 서서, 당시의 역사 기록에서는 ‘천자가 하양에 순행하러 갔다’라고 적었다. 본디 진문공의 요청에 응한 것이지만 주양왕이 스스로 움직인 것처럼 적었다. 그 권위를 지키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더 뒤로 가면 그마저도 사라진다. 대표적인 사건은 현왕 44년, 진나라 혜왕이 스스로 왕이라 칭한 사건이다. 참고로 이때의 진나라와 앞의 진나라는 다르다. 진문공의 진나라는 ‘진晉’나라며, 진혜왕의 진나라는 ‘진秦’나라이다. 춘추전국의 마지막 승리자는 후자이다. 돌아와서, 본디 왕은 천자의 칭호였다. 제후는 시호 뒤에 ‘공公’을 붙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너도나도 왕의 칭호를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주의 천자는 천하의 제일, 천명을 유일하게 받는 천하의 우두머리가 아니게 되었다. 주나라는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현실적인 힘이 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제후국들이 주나라의 체제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만큼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주왕실의 상징적 권위는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다. 그 나라에 있는 전통적인 문물 때문이었다. 구정九鼎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후를 보면 알겠지만 주나라는 여러 나라 사이에 끼어서 이웃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결국 진나라의 장양왕에 이르러 나라가 사라지고 만다. 참고로 진의 장양왕은 매우 짧은 시간 왕위에 오르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영정, 훗날 진시황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4. 천하는 어디로?
공자는 주공을 크게 존경했다. 그는 꿈에서라도 주공을 만나기를 고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주공의 시대로 돌아간다면 춘추시대의 혼란이 끝난다고 보았다. 그 옛날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의 지배자가 되었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것. 봉건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건강함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돌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천명을 앞세우며, 나아가 덕으로 천하를 이끌고자 했던 주나라의 꿈. 천하가 마치 한 집안처럼 조화롭게 구성되기를 바랐던 공자의 이상. 그렇다고 과거를 다시 되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과연 천하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주나라의 붕괴는 주나라가 만들었던 천하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지배 체제가 등장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새로운 힘과 새로운 방식.
한 시대의 변화는 그 내부에서 탄생하기 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바깥의 충격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면에서 주나라의 역사를 이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나라와 뿌리를 달리하는 서쪽의 이방국가. 바로 진나라의 역사이다. <진본기>에서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을 발견해보도록 하자.
<진본기> - 춘추전국의 혼란을 이겨내고
1. 진秦, 서쪽 오랑캐의 나라에서 중원으로
중국 고대 역사를 일컫는 말로 ‘선진시대’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선진국을 말할 때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처럼 ‘앞서 발전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한자로 보면 先秦, 즉 진나라 앞의 시대라는 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진나라는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나라이다. 그런데 다음 시간 <진시황본기>를 보면 알겠지만 통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만다. 통일왕국이라 하나 고작 약 20년, 첫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몰락한 이 나라가 무엇이 대단하다고 역사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 것일까? 아마도 이 질문이 <진본기>와 <진시황본기>를 읽으며 던질 중요한 질문일 테다. 참고로 중국을 영어로 China라 하는데 이는 진秦의 중국음, qin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보면 중국을 이해하는데 진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진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그 출발은 여느 다른 나라와 크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본디 춘추전국의 나라들은 주나라의 왕실로부터 땅을 떼어받아 세워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춘추전국의 여러 제후국은 주나라 통일에 족적을 남긴 공신이나 왕의 친족들에게 나누어준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진은 그렇지 않다.
<진본기>는 진의 선조가 전욱제, 즉 저 먼 삼황오제 시기의 전설적인 임금의 후손이라 말한다. 어쨌든 진나라는 주나라 및 다른 나라와 출발이 다르다. 신화적인 이야기를 지나면 주효왕 시기에 이르러 ‘영씨 성’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옛날 백예가 순임금을 위해 가축을 책임졌는데, 가축이 많이 번식했으므로 봉토를 얻고 영씨 성을 받았다. 지금 그 후손이 또한 나를 위해 말을 번식시켰으니, 나는 그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어 부용국(속국)으로 삼겠노라.” 그러고는 진 땅에 봉한 후, 그에게 다시 영씨의 제사를 잇게 하고는 진영秦嬴이라 불렀다. (164)
순임금과 백예의 이야기는 앞서 <진본기> 앞 부분에 등장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동어 반복인데 어째서 이런 기록이 남게 되었을까? 여러 추측이 가능하지만 아마도 주효왕 시기에 이르러 진나라의 시조격 되는 집단의 세력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순임금과 백예의 전설과도 연결되고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 아닐지.
<진본기> 앞 부분을 보면 서융이 많이 등장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중국인의 천하관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천하의 모습을 네모라고 생각했다. 중간 지역에는 문명인들이 살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를 중원中原이라 부른다. 중원의 나라 이것이 중국中國이라는 말의 출발이다. 중국의 바깥에는 오랑캐가 살고 있는데 사방 오랑캐를 각각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이라 하며, 이를 통틀어 ‘사이四夷’라 부른다. 고로 스스로 ‘동이족’임을 자처하며 뻐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좀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문제다.
이 사방 오랑캐 가운데 중원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서쪽과 북쪽의 이민족들이었다. 지도를 떠올리면 알겠지만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유목민족의 땅이었는데 이들은 중원으로 쳐들어와 식량을 약탈해 돌아가곤 했다. 진시황은 이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커다란 성벽을 쌓는데, 이것이 만리장성의 시작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있다.
<진본기>는 진이 서융과 다투며 세력을 키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후대에 중원의 역사로 편입된 결과일 것이다. 다르게 보면, 주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진 역시 서쪽 오랑캐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 <진본기>를 보면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진을 오랑캐 대하듯 했다는 기록도 있다.
진은 출발도 다른데다, 서쪽 변경에서 나타난 나라였다. 그러나 이 진은 한 사건을 기회로 중원의 여러 나라에 이름을 떨칠 수 있게 된다. 바로 유왕과 포사의 사건이다. <주본기>에서 읽었듯 유왕 시대에 주나라는 왕이 죽고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야 하는 지경에 처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주나라의 근간을 뒤흔들었다는 점은 익히 살펴보았다. 다르게 말하면 자칫 나라가 쫄닥 망할 수도 있는 상황! 이때 진나라 양공이 주나라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서융의 견융족이 신후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해 여산 아래에서 유왕을 죽였다. 이에 진나라 양공이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를 구하러 갔는데, 온 힘을 다해 싸운 끝에 공을 세웠다. 주나라가 견융의 난을 피해 동쪽의 낙읍으로 옮기니, 양공은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 평왕을 호송했다. 평왕은 양공을 제후로 봉하고 기산 서쪽 땅을 내려 주며 말했다. “융족이 무도하여 우리의 기산과 풍읍 땅을 빼앗았다. 진나라 융족을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낸다면 즉시 그 땅을 갖게 될 것이다.” 평왕은 양공과 서약하면서 봉지와 작위를 내렸다. 양공은 이때 처음으로 나라를 갖게 되어 다른 제후들과 사절을 갖추어 서로 방문하고 예의로써 대할 수 있게 되었다. (165-166)
앞서 주나라의 봉건체제를 병풍에 비유하여 말했다. 중앙의 천자는 병풍으로 둘러친 까닭에 사방 오랑캐의 침입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주나라는 서쪽에 치우쳤던 까닭에 서쪽의 침입에 취약했다. 이에 진나라를 서쪽 병풍으로 삼겠다는 말이다. 서쪽 땅을 떼어주었다고 하나, 이는 실상 상징적인 수여에 불과하다. 왕이 죽고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마당에 서쪽 땅을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준다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진나라에게 그 지역을 정복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진은 그 이전에도 서쪽에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을 테지만 이제 평왕의 약속을 기반으로 중원의 나라들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귀퉁이의 세력 가운데 하나였지만 이제는 당당히 춘추전국의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반을 얻게 되었다.
지역의 세력에서 ‘나라’로 대우 받게되었다고 하나 다른 나라들과 동등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생각해보라. 주나라 체제 안에서 우리가 중원입네 하던 나라들이 갑자기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을 때 그를 환대했을까? 앞서 주나라의 천하는 한 가족, 한 집안의 모습을 확장한 것이라 말했다. 이를 생각하면 완전히 편입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2. 목공, 포용력의 정치
초기 진의 토대를 닦은 임금은 목공이다. 그는 덕공의 막내 아들이었는데 흥미로운 내용과 함께 등장한다.
(덕공) 2년, 처음으로 복날을 정하여, 개로 열독熱毒과 사기邪氣를 막았다. 덕공은 서른 세살에 자리에 오른 지 이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들 셋을 낳았다. 맏아들은 선공이고, 둘째 아들은 성공이며, 막내 아들은 목공이다. (169)
복날 개고기의 유구한 역사! 고전을 읽다보면 이런 사실을 아는 깨알같은 재미도 있다. 여튼, 목공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난다. 이어 형제가 차례로 왕위에 오른다. 목공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여러 훌륭한 통치자들이 했던 것처럼 인재를 가까이 두기 위해 힘쓴다. 초나라에서 백리혜를 데려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비록 우나라 출신이었으나 그는 백리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애써 모셔온 것이었다. 검정 숫양 가죽 다섯장으로 그 값을 치렀기에 백리혜를 오고대부五羖大夫라 부르기도 하였다. 역사를 읽으며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한 인물을 잘 받아들이면 그와 함께 교류하던 다른 인물을 가까이 둘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늘 복수로 존재한다. 백리혜는 건숙을 추천한다.
당시 상황을 보면 출신이 다른 지역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하나의 중국’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다 똑같은 사람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어찌 그 시대에도 그랬을까. 더구나 국민이라는 균일한 집단이 생성되기 이전, 저들은 그저 한 핏줄의 후손이 한 지역에 모여 살고 있던 상황이었다. 타 지역의 타국 출신을 불러 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이러한 탄력성이야 말로 진나라가 천하의 패자로 우뚝서는 기반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는 이질적인 존재로 출발했던 그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성 아니었을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할 수 있으나, 뿌리조차 없는 나무는 무엇이라도 의지하고 자신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진秦은 진晉과 이웃한 까닭에 여러차례 부딪혔다. 특히 진목공은 이웃 진晉혜공과 크게 싸웠는데 전쟁 중에 목공은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맞는다. <사기>는 이 장면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이야기였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군주가 군대를 버려둔 채 진나라와 이익을 다투고 돌아오다가 말이 진흙에 빠졌다. 목공과 그 부하가 급히 말을 달려 쫓았으나, 진晉나라 군주를 잡을 수 없었고 도리어 진晉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했다. 진晉나라 군사들이 목공을 공역하여 목공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기산 아래에서 목공의 좋은 말을 훔쳐 먹었던 백성 삼백 명이 진晉나라 군사에게 뛰어들었다. 진晉나라 군사는 포위망을 풀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목공은 탈출하여 오히려 진晉나라 군주를 사로잡아 버렸다. (174)
전쟁 중에 포위당해 상처를 입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누군가 그 가운데 난입하여 진목공을 구해준다. 덕분에 진목공은 포위에서 벗어 났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진晉혜공을 사로잡는다. 목공은 이 혜공을 매우 미워해서 그를 죽이려 했지만 주왕의 간청과 진晉출신의 부인이 부탁하는 바람에 그를 놓아준다. 그러나 이때 그의 배포를 보아야 한다. 그는 이웃 진晉혜공을 돌려 보낼 때 치욕스럽게 만들지 않았다. 그는 좋은 숙소는 물론 훌륭한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 그는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당시 진목공을 돕기 위해 난입한 300명의 사람도 진목공의 너그러움에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사기>는 그 미담을 자세하게 전한다.
예전에 목공이 좋은 말을 잃어버렸는데, 기산 아래에 살던 야인들이 함께 잡아먹어 버렸다. 그 수가 삼백 명이 넘었는데, 관리가 그들을 쫓아가 잡아들여 법으로 처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목공이 말했다. “군자는 짐승 때문에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되오, 내가 듣건대 좋은 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을 손상시킨다고 하오.” 그러고는 모두에게 술을 내리고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그들 삼백명은 진나라가 진晉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뒤따를 것을 청했다. 그러다가 목공이 포위당한 것을 보자, 모두 무기를 들고 필사적으로 싸워 말을 먹은 은덕에 보답했다. (174)
야인野人은 성 바깥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진나라에 살지만 진나라 백성에 들지 못하는 바깥 세계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왕의 말을 잡아 먹었다.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어째서 말을 잡아먹었을까 하는 점이다. 게다가 숫자는 300명.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가난한 그들은 우연히 발견한 말을 잡아 배불리 나누어 먹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고 그들은 곧 죽을 지경에 처했다. 그런데 목공의 반응이 흥미롭다. 말고기는 술과 함께!! 그는 약탈을 감추고 그 자리를 축제의 장소로 탈바꿈 시켰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목공을 뒤따르기로 한 것이 이해될 법하다.
이후 진 목공은 정나라를 치고자 하나 이때 백리혜와 건숙이 말린다.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벌인 전쟁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웃 나라는 패배한 장수들을 보내는데 이는 진목공이 분노하여 그들을 직접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목공은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 말하며 도리어 그들에게 사죄한다. 한편 그는 융족 출신의 유여를 받아들여 융족과의 싸움을 준비했다. 그 결과 목공은 서융 지역의 패주가 되었다.
이런 목공이었으나 그 끝은 좋지 않았다. 자신이 아끼던 신하를 함께 저승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순장殉葬! 따라 죽은 사람이 177명. 그 가운데 훌륭한 신하들도 적지 않았다. 사마천은 당대의 평가를 이렇게 전한다.
“진나라 목공은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더하여 동쪽으로는 강력한 진晉나라를 복종시키고, 서쪽으로는 융족의 패주가 되었다. 그러나 제후들의 맹주가 될 수 없었던 것 또한 당연하다. 죽어서 백성들을 버렸는데, 어진 신하를 모아서 따라 죽게 했으니 말이다. 그의 선왕은 세상을 떠났을 때 오히려 여전히 덕을 남기고 법도를 드리우게 했는데 하물며 선량한 사람과 어진 신하를 빼앗았으니 백성들이 슬퍼하는 바가 되었구나! 이로써 진나라는 동쪽을 정벌할 수 없을 것임을 알겠다.”(183)
3. 효공,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다
목공 사후 진나라는 부침을 겪는다. 여러 혼란스런 상황이 벌어진다. 새롭게 나라를 정비한 것은 효공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효공시대에 이르러 진이 크게 강성할 수 있었으므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효공 원년, 황하와 효산 동쪽으로 강대국 여섯이 있었다. 효공은 이들 제나라 위왕, 초나라 선왕, 위나라 혜왕, 연나라 도후, 한나라 애후, 조나라 성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 주나라 왕실이 약해지자 제후들은 무력으로 정벌하고 투쟁하여 서로 영토를 아울렀다. 진나라는 옹주에 따로 떨어져 있어 중원 지역 제후들의 회맹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오랑캐처럼 대우받았다. 이에 효공은 은혜를 베풀고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며, 전사를 모집하고 공적과 포상을 명확히 했다. (190)
사마천은 당시 7개의 나라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일곱개의 나라를 후대 사람들은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부른다. 전국시대에 패권을 다투었던 일곱개의 나라라는 뜻이다. 물론 당시에도 소국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이미 너무 세력이 약하여 이 일곱개의 나라 가운데 하나에게 곧 먹힐 운명이었다. 따라서 실상은 일곱개 나라는 아니나 현실적으로는 이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가 천하를 지배할 상황이었다.
이때 주나라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제 주나라는 여러 소국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춘추시대가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여러 나라들이 그나마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면 이제 전국시대에 이르면 주나라의 틀은 완벽히 무너지고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전국시대는 <전국책戰國策>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전국책>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시대는 각 나라들은 앞다투어 전쟁을 벌이며[戰國] 어떻게 상대를 제압할 지 다양한 책략策略을 필요로 하던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앞서 간 것이 진효공이었다. 그는 목공의 업적을 이야기하며 다시 나라의 기틀을 닦아 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동쪽으로! 효공은 중원의 다른 나라들을 제압하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이를 위해서는 인재를 불러 모아야했다.
“나는 선왕의 뜻을 되새겨 생각할 때마다 항상 마음이 아팠다. 빈객과 여러 신하들 중에서 진나라를 강성하게 해 줄 뛰어난 계책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나 또한 그 관직을 높여 주고 그에게 봉토를 나누어 줄 것이다.”(191)
이를 ‘구현령求賢令’이라고도 한다. 훌륭한 인재[賢]를 구하라고[求] 공개적으로 명령[令]을 내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그 관직을 높여 주고 그에게 봉토를 나누어 줄 것’이라는 말이다. 뛰어난 계책이 있다면 관직은 물론 봉토를 나누어 주겠단다. 이는 주나라의 방법이 아니던가. 실재로 그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람을 불러 모았다.
이 진효공의 시대에 이름을 남긴 이가 있으니 바로 상앙이다. <진본기>에서 그는 ‘위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위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법을 기반으로 나라의 기반을 다 바꾼다. 효공은 그의 계책에 찬성하였으나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효공의 지지를 바탕으로 그는 나라를 개혁하고 진나라를 크게 부강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출신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위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 업적을 인정받아 그는 나중에 상商 땅을 받는다. 그리하여 이름이 ‘상앙’이라 불린다. 군君이라는 지위도 얻는데 후대에는 그를 상군商君이라 부르기도 했다. 미리 그를 알고 싶다면 <사기열전>의 <상군열전>을 읽어보도록하자. 하나 덧붙이면 그를 이웃 진나라로 가도록 방치한 임금이 있는데 그가 위혜왕, 훗날 양혜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맹자>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여기서는 그의 최후가 참혹했다는 점을 짚어두자. 법에 기반한 그의 개혁은 기존 귀족과 왕족의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훗날 왕위에 오를 태자조차 처벌하려 했는데 그의 날카로운 태도가 훗날 화를 불러왔다. 효공이 세상을 떠난 뒤 바로 처형 당했던 것. 그는 결국 거열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상앙의 개혁은 진나라를 바꾸어 놓았다. 효공의 아들 혜문군은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기에 이른다. 혜문왕! 이제 진나라는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칼날을 돌린다.
4. 서쪽으로 기울어진 천하
효공과 상앙의 개혁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이제 진은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나머지 여섯 나라를 상대할 수 있는 그런 막강한 나라가 되었다. 소양왕 11년의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송나라, 중산나라 등 다섯 나라가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는데 염지에 이르러서야 돌아갔다. 진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에 황하 이북 및 봉릉을 주고 강화를 맺었다. (197)
5:1의 싸움!! 물론 강화를 맺고 전쟁을 멈추기는 했으나 진나라는 패하지 않았다. 거꾸로 이 사건은 진나라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진본기> 후반부에는 여러 장수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아울러 수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도 나온다. 그 가운데는 40만을 파묻었다는 백기의 이야기도 있다.
진나라는 결국 주나라를 포함한 춘추전국의 모든 나라를 정벌하고 통일 제국을 세운다. 이제 우리가 만날 것은 중국의 최초 황제 ‘진시황’이다. 서쪽 변경에서 나타나 중원을 다 먹은 제국의 황제는 어떤 모습일까? 이를 잘 이해하려면 <사기열전>의 <여불위열전>과 <이사열전>을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