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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공백] 2017_0120 - 다니카와 슌타로 :: 후기 +1
주호 / 2017-01-23 / 조회 2,061 

본문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는 눈물을 일시에 제거한 '깨끗하고' '청순한'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시를 발췌할 때만 해도 논의할거리가 많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보기좋게 예상이 빗나갔지요. 

이런 빗나감은 기분 좋은 빗나감이라고나 할까요? 

시즌 2의 마지막 시간이었고 그에 걸맞게 즐거웠습니다. 

 

네로 ― 사랑받았던 작은 개에게

 

네로 

이제 곧 또 여름이 온다

너의 혀

너의 눈

너의 낮잠 자는 모습이 

지금 또렷이 내 앞에 되살아난다

 

너는 단지 두 번의 여름을 알았을 뿐이었다

나는 벌써 열여덟번째의 여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것과 또 내 것이 아닌 여러 여름을 떠올리고 있다

메종 라피트의 여름 

요도의 여름 

윌리엄즈 파크 다리의 여름

오랑의 여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도대체 이미 몇 번 정도의 여름을 알고 있을까 하고 

 

네로 이제 곧 또 여름이 온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있던 여름은 아니다

또 다른 여름 

전혀 다른 여름인 것이다

 

새로운 여름이 온다

그리고 새로운 여러 가지를 나는 알아차린다

아름다운 것 미운 것 나를 힘차게 만들 것 같은 것 

나를 슬프게 만들 것 같은 것 

그리고 나는 묻는다

대체 무엇일까

대체 왜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네로 

너는 죽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멀리 가서

너의 목소리

너의 감촉 

너의 기분까지가 

지금 또렷이 내 앞에 되살아난다

 

하지만 네로

이제 곧 여름이 온다

새롭고 무한하게 넓은 여름이 온다

그리고 

나 역시 걸어가리라 

새로운 여름을 맞고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아

봄을 맞아 더욱 새로운 여름을 기대하여

온갖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그리고 

온갖 나의 물음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이십억 광년의 고독(1952)』 

 다니카와 슌타로의 데뷔작입니다. 실제 자신의 옆집에 살던 개 '네로'는 죽을 때가 됐을 즈음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무리에서 빠져나가 밀림 속으로 들어간다는데... 네로도 코끼리와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네로가 죽어도 여름은 무한히, 무한히 찾아옵니다. 다른 계절이 아닌 '여름'만이 가지는 생명의 반짝거림, 초록의 느낌이 시에 잘 묻어나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전혀 무겁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힘이 넘치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읽었던 김수영의 '여름뜰'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인류는 작은 공(球)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1952)』

작년 시월, '네리리 하라라 키르르'라는 제목의 미디어 비엔날레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재밌는 제목이네' 정도였는데 알고보니 그게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에서 따온 것이었죠. 다니카와 슌타로는 자신의 시에서 이런 뜻모를 단어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것이 그의 시에 음악성을 가져다주는 요소로써 작용할 겁니다. 일본어를 잘 할 줄 몰라 그 음악성을 잘 살려 읽을 순 없었지만요. 

외로움이라고 하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근원적 속성을 우주적으로 확대한 시였습니다. 우리는 고독하기 때문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이겠지요(만유인력이란/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가 팽창해져 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갈테고 그러면 더 세게 서로를 끌어당기게 되지 않을까요? 마지막 연 '재채기'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왔습니다. 해석들은 결국 한 지점에서 모였죠. 무한히 넓은 공간에서의 재채기란 "나 여기 있어~"라는 존재의 기척, 신호가 아닐까 하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고요한 극장안에서 재채기만큼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죠. 갑자기 코 끝이 간질간질하네요. 재채기가 나오려나 봅니다. 그러면 나의 기척을 느끼고 이십억 광년이 떨어진 어느 행성에서 누군가 재채기로 화답해 줄까요? 알 수 없네요. 그 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지려면 이십억 광년도 한참 넘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소네트 62

 

세계가 나를 사랑해주기에

(잔혹한 방법으로 때로는

상냥한 방법으로)

나는 언제까지나 혼자일 수 있다

 

내게 처음 한 사람이 주어졌을 때에도

나는 그저 세계의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내게는 단순한 슬픔과 기쁨만이 분명하다 

나는 언제나 세계의 것이니까

 

하늘에게 나무에게 사람에게 

나는 스스로를 내던진다

마침내 세계의 풍요로움 그 자체가 되기 위해 

 

……나는 사람을 부른다

그러자 세계가 뒤돌아본다

그리고 내가 사라진다 

『62의 소네트(1953)』

총 14행의 형식, 그것을 소네트라고 부릅니다. 소네트 62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소네트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소네트 시리즈는 대체로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 있네요. 이 시도 비슷한 선상에 위치해 있는 느낌입니다. 세미나 원중 누군가는 이 시를 조금은 어둡게 해석하기도, 또 다른 누군가는 밝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틀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지 다른 느낌과 생각만이 존재할 뿐. 그것이 시 세미나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열린 해석이 가능한 공간. 누구의 감상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세미나, 그것이 시의 공백이겠지요. 

 

슬픔은 

 

슬픔은 

깎다 만 사과

비유가 아니고

시가 아닌 

그냥 거기에 있는 

깎는 도중의 사과

슬픔은 

그냥 거기에 있는 

어제 날짜 석간신문

그냥 거기에 있는 

그냥 거기에 있는 

뜨거운 유방 

그냥 거기에 있는 

석양

슬픔은 

말을 떠나 

마음을 떠나 

그냥 거기에 있는 

오늘의 사물들 

 

『그대에게(1960)』

 

​이 짧은 시속에 여섯 번이나 반복되는 구절은 '그냥 거기에 있는' 입니다. 슬픔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시인은 우리에게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도 아니고 비유도 아닌, 사건처럼 불시에 다가오는 슬픔이 아닌 존재론적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구나 슬픔을 '그냥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을 겁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깎다 만 사과를 볼 때, 지는 석양을 볼 때 항상 그 자리에 슬픔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지난 시즌에 읽었던 진은영의 '있다'와 맥을 같이 하는 작품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2페이지 둘째 줄부터

 

2페이지 둘째 줄부터 시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먼저 고유명사가 물에 잠기고

형용사가 썩고

조사가 흐슬부슬 떨어지고 

접속사에는 곰팡이가 많이 피었다

 

사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시인에게까지 미쳤다

느닷없이 의자 다리가 부러졌으며

이어서 키보드가 녹아버린 데다 

머리칼도 타올랐다

 

아내는 그것을 보자마자 집을 나가고 

맏아들의 야뇨증이 재발했다

맏딸은 입을 다물고 

이름이 다로인 개가 에스페란토로 짖기 시작했다

애마 ‘라이프’의 네비게이션도 고장났다

 

뜻밖의 일로 흥분해서 그런지 

3페이지 셋째 줄에서 시는 돌연 회복되었다

현실과의 정합을 거부하고

언어의 아나키즘에 가담해서

시는 페이지로부터 망명했다

 

그후의 전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활자이기를 포기한 시는 목소리로 퍼지고

수컷 시를 암컷 자석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도 

문부과학성에 의해 금지되고

시단은 드디어 국어사전 속으로 은퇴했다 

 

『미래의 아이(2013)』

​2013년에 쓰여졌으니, 그야말로 다니카와 슌타로의 '핫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는 첫 행부터 재밌는 상황을 설정해놓고 있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나요? 내 글이 어느 순간부터 망가지고 있다는 느낌. 내가 원래 쓰려던 방향과는 다르게 글이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 시가 망가지는 순간은, 현실과 괴리되어 버릴때가 아닐까요? 시가 현실을 노래하고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과 함께 살아숨쉬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나는 문학이다'라며 고고한 척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른 척'할 때, 그때가 시로서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는 활자로서 머물기보다 계속해서 노래로서 불리고 전해질 때에만 생명력을 갖는 것 아닐까요? 여든이 한참 넘은 지금까지도 다니카와 슌타로가 낭송회를 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닌다고 하니, 이 시는 어쩌면 그의 문학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당번 맡아 정리해 오시고 손수 정의해 오신 발제문도 멋졌지만
이 후기글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합니다.
이 후기가 마치 슌타로가 말하는 재채기인냥
시공백 세미나라는 존재의 기척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마지막 모임의 마지막다운 후기, 고맙습니다, 주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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