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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안전 영토 인구> 11강 발제 +5
선우 / 2017-01-19 / 조회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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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0강을 통해 푸코는 자기 안에 고유한 이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는 통치술의 탄생을 보여주었다. 그 이전 주권자들은 세상에 대한 신의 통치라는 모델을 따라 그의 권력을 행사했다. 신이 만물을 다스리듯이 왕은 백성을 다스린다. 푸코는 이와 같은 우주론적-신학적 연속체가 16세기부터 깨졌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는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가 설립되는 시기로서, 목적인이 점차 잊히고, 자연 과학의 발달로 인간중심주의가 문제시됐으며, 기적과 경이로움과 기호가 제거되고, 더 이상 유비와 해독이 아니라 수학적, 분류학적 형태로 인지 가능한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주권자는 이제 더 이상 신이나 자연 쪽에서 자신의 임무의 모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우주론적 신학에 기초한 주권이라는 체계에서 벗어나 통치 합리성의 형태 자체를 독자적으로 사유하려고 한, 그랬기에 일종의 이단으로 간주된, 정치가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이 세계나 자연 등의 문제를 옆으로 제쳐 둔 채 통치성의 내재적인 이성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고, 통치술 특유의 합리적 원칙이나 계산 형식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확정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지평을 정의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통치 이성’, ‘국가 이성’ 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오래된 우주론적 신학과의 단절이었던 국가이성은 자연적 질서와의 단절이었으며, 결국 이 절단 자체가 ‘국가’를 만들어냈다. 결국 푸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통치의 역사라는 일반적인 역사 내부에, 권력의 실천 영역에서, ‘국가’가 어떻게 해서 근본적인 정치적 목표로서 출현했는가 이다. 국가는 자연 질서를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인공적이다.

 

  그렇다면 통치이성의 원칙이자 목표인 국가는 어떤 것인가?(‘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겠다. 국가란 ‘본질’이 아니고 구성된 ‘효과’ 아닌가.) 국가란 무엇보다 현실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인식가능성의 원칙이다. 국가란 이미 주어져 있는 요소와 제도의 고유한 본성, 연결, 관계 등을 사유하는 방식의 일종이다. 왕은 이제 더 이상 신과 관련된 역할이나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목자의 역할로 사유되지 않고, 행정관이나 판사 등 국가와 관련된 역할로 숙고된다. 둘째로 국가는 일종의 ‘목적’으로 기능한다. 통치이성, 합리성의 활동적 개입이 낳은 결과물이 국가라는 의미이다. 국가는 통치술의 합리화 과정 끝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통치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이성의 개입을 통해 획득되어야만 하는 것은 국가의 완전성, 국가의 완성, 국가의 강화이다. 이처럼 국가는 국가 자체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원칙인 동시에, 국가가 어떠해야만 한다는 바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원칙이기도 하다. 국가가 현실에서 더 잘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만 국가라는 것을 이해하는 셈이다. 또한 국가는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사유, 반성, 계산, 개입형태의 규율적 이념이다. 따라서 통치이성은 국가를 현실성의 해석원칙으로서, 또한 목적이자 당위(규율적 이념)로서 제시한다. 국가는 필요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통치하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다. 

 

  그동안 푸코가 논의한 국가이성의 정의를 재검토해보자. 팔라초, 보테로, 그리고 켐니츠의 정의가 공통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국가이성이란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며 나아가 국가를 ‘증강’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가이성을 특징지어야 하는 것은 국가의 ‘본질’에 적합하도록 이뤄진 국가의 ‘유지’라는 정의. 플라톤의 여운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국가가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반 사건이지 않겠는가. 국가를 쇠퇴하게 만들고 결국 소멸시키는 혁명 또한 국가는 피해야 한다. 보테로나 팔라초가 국가이성이라고 부른 것은 본질적으로 국가를 혁명에 맞서 유지하는 것이다.

  국가이성을 국가의 유지나 증강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국가‘들’이 상호경쟁의 공간에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국가이성은 늘 자체 내에 고유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국가는 오직 국가 자체로 향하면서 정리될 수 있고, 자기 고유의 선을 추구하고, 국가 외적인 목표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 국가이성을 통해 소묘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내에 법과 목적을 갖는 복수의 ‘국가들’이 영원히 필연적이자 운명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세계다. 이와 같은 국가이성의 이론적 귀결은 그 인식가능성의 원칙을 이루는 역사적 현실과 접합되어야 한다. 푸코가 제시하는 역사적 현실은 30년 전쟁(1618~1648) 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사람들은 제국이 국가들의 최종적 소명이 아니며, 제국이 더 이상 여러 국가가 언젠가 하나로 융합될 것을 희망하거나 꿈꿀 수 있는 형식이 아님을 인식하게 됐다. 국가들은 이미 각자의 정책, 선택, 동맹에 있어서 종교적 귀속관계를 통해 단합하기를 그만두었다. 이제 국가들은 통상을 둘러싼 경쟁과 지배의 공간 속에서, 통화 순환의 공간 속에서, 식민지 정복의 공간 속에서, 해양 지배의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게 된다.

 

  그럼 통치이성의 시대 이전, 16세기 이전에는 대립, 대항이 없었는가? 군주들 사이에서, 왕조들 가운데서 적대의 형태가 있지 않았는가? 물론 대립이나 대항관계 등의 현상은 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어느 시점부터 국가들 간의 ‘경쟁관계’, 즉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무제한의 시간에서의 경쟁관계라는 형태로 그 대립이 지각되게 됐느냐는 것이다. 과거 군주들의 대립, 왕조들의 대립은 ‘군주의 부’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군주의 부가 아니라 ‘국가 자체의 부’ 이다. 힘의 요인으로서의 군주의 부로부터 왕국의 힘 자체로서의 국가의 부로의 이행이 목격된다. 힘의 요인으로서 국가의 부는 더 이상 소유물 자체가 아니라, 국가에 내재하는 부, 국가가 처분할 수 있는 자원, 천연자원, 상업의 가능성, 무역수지 등이다. 군주들 간의 대립에서, 군주의 힘을 특징짓는 것은 군주가 연루된 가문적 의미 또는 가문적 의무라는 의미에서의 동맹체계였다. 이제 대결이 경쟁관계와 관련되어 사유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국력은 ‘이익’의 잠정적 결합으로서의 동맹을 통해 측정되고 계산되게 된다. 군주들 간의 대항관계로부터 국가들 간의 경쟁관계로의 이행은 정치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식에서 가장 본질적인 변화들 가운데 하나이다.

 

  대결이 국가들 간의 ‘경쟁’으로 사유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국가이성에 관한 이론적인 텍스트 어디에도 아직 등장하지 않으며 정식화되지 않은 개념, ‘힘’이라는 개념이 발견된다. 국력의 증강, 국력의 신장, 국력의 구성, 이 모든 것이 정치적 이성의 필수요건, 대상, 이해가능성의 원칙이 된다. 이제 힘의 사용, 계산을 중요한 대상으로 삼는 정치로 들어가게 된다. 정치는 여기서 역학의 문제와 만난다. 새로운 통치합리성의 진정한 문제는 일반적 차원에서의 국가의 유지라기보다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힘의 관계의 유지, 여러 가지 힘의 역학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발전이다. 서구 사회는 이와 같은 힘의 역학에 입각해 정의되는 정치적 이성을 작동시키기 위해 두 개의 커다란 집합을 설치했다. 하나는 외교-군사적 장치이고, 다른 하나는 내치라는 장치이다.

 

 30년 전쟁 후 자기 긍정과 자기 고유의 자목적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국가‘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서로 직접 대면했다. 이 체계의 목표는 유럽의 평형이었다. ‘유럽’이란 무엇인가? 우선 유럽은 그리스도교가 지녔던 것 같은 보편주의적 소명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하나의 단위이다. 둘째로 유럽은 어느 국가가 다른 국가에 다소 종속되고, 최종적으로는 제국이라는 단일한 형태에 도달하는 국가들 간의 위계적 형식도 아니다. 셋째로 유럽은 근본적으로 복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유럽은 전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관계란 경제적 지배나 식민지화, 무역에서의 이용이라는 관계이다. 유럽의 ‘균형’이란 무슨 의미인가? 우선 가장 강한 국가이든 아니면 어떤 국가가 됐든 간에 자신의 법을 다른 국가에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유럽의 평형은 최강국들의 수를 제한해 구성하는 것으로 구상됐다.(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셋째로 유렵의 균형은 몇 개의 작은 세력이 그 작은 세력들 중 하나를 위협할 수도 있는 상위 세력의 힘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연합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유럽의 균형 속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중대하고 단일한 지배 효과를 수반하지 않는 ‘다수의 평화’ 이다.

 

  전쟁의 새로운 형식과 구상은 유럽의 균형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줄 외교적 군사적 체계의 일환이었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사법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전쟁을 개시하기 위해 사법적 이유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전쟁을 개시하기 위한 구실은 순전히 외교적인 것이어도 상관없다. 즉 평형이 위태로워지고 있다거나 평형을 회복해야 한다거나, 일방의 힘이 과도해지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외교적인 구실이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전쟁은 법권리와의 연속성을 뒤로하고 정치와의 연속성을 맞이한다. 이 정치는 바로 국가들 간의 평형 유지를 기능으로 갖는다.

유럽의 균형체계를 기능하게 하기 위한 두 번째 도구는 외교적 수단이다. 영토, 도시, 주교구, 항구, 수도원, 식민지가 교환되고 거래되며 이전된다. 무엇에 입각해 그렇게 되는 걸까? 그것은 낡은 계승권이나 정복자의 권리에 입각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적 원칙들에 입각해 이뤄진다. 이 새로운 외교의 근본적인 원칙이 되는 것은 국가들의 물리학이지 주권자들의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이제 교섭을 행하는 조직으로서 거의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 각국의 국력의 상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체계가 구축된다.

  마지막 도구는 상시적인 군사장치의 설치이다.(군대) 이 군사장치는 군인의 직업화 즉 군직을 포함하고, 전시에 예외적인 징집을 위한 틀로 사용될 수 있는 상시적인 군의 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요새와 수송 장비와 함께 지식, 전술적인 고찰, 여러 유형의 작전, 공격이나 방어의 도식들도 포함한다. 평화 체제 내에서 상시적이고 비용이 들며 중요하고 박학한 군사 장치가 존재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유럽의 평형을 구축하는데 불가결한 한 도구였다.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주호 님 본받아 저도 올려요.^^
아라차~~ 모하고 있어요? 얼릉얼릉 올려봐요~~
(간만에 제가 좀 일찍 마쳤다능..)

라차님의 댓글

라차 댓글의 댓글

ㅎㅎㅎ일단 알겠습니다.

주호님의 댓글

주호

제가 올리자마자 선우님도 슉슉! 이것이 푸코 세미나의 하드트래이닝 결과인가요?
어디선가 미소짓고 있을 소리님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합니다.

소리님의 댓글

소리 댓글의 댓글

*^^* 후후후...세미나회원들이 열정적인 덕분이지요..후후후후

소리님의 댓글

소리

고생하셨습니다~내일 만나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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