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문학의 고고학> 1. 광기와 언어 발제문 (1/18) +4
삼월
/ 2017-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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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광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십대시절부터였다. 푸코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광기와 비이성.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이다. 광기의 치유 혹은 억압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된 관심은, 광기를 중심으로 서구 역사를 새로 정리하는 작업으로까지 이어진다. 푸코의 논의에서 광기는 이성에 의해 규정된 무엇이다. 스스로를 합리적이라 규정하는 이들이 자신들과 대립되는 광인이라는 집단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푸코가 논의를 시작하는 전제이다.
[광인들의 침묵]
푸코가 보는 광인들의 침묵은 축제의 뒷면이다. 푸코는 연극이 좋은 공연이라는 목적을 위해 축제와 광기의 힘을 축소시키고 조절하려 했다고 본다. 푸코가 볼 때 연극은 디오니소스적(도취‧황홀‧광기) 힘을 잃어버리고, 아폴론적(계산‧기교)인 것이 되어버렸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는 리어왕과 광인의 대화가 등장한다. 이 대화는 광기의 비극적 성격을 온전하고 충실하게 보여주는 드문 예이다. 늘 광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서구의 주류문화에서 이런 예는 흔치 않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만 하더라도 어떤 균열이 감지된다. 돈키호테의 비극성은 인물의 광기 자체에 있지 않으며, 광기에 대한 거리감에 있다. 돈키호테의 광기는 독자와 등장인물들,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리어왕이 멈출 수 없는 광기로의 추락 속에서 죽음을 향해가는 반면, 돈키호테는 이따금 자신의 광기를 의식하면서 언제나 자신의 광기에서 돌아설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광기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회귀의 순간 돈키호테는 죽음이라는 확실성에 이르게 된다.
이제 자신의 광기를 의식한다는 사실은 삶에서 죽음과도 같은 일이 된다. 이성은 광기를 죽음처럼 묘사한다. 광기의 당사자는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광인은 이성을 돋보이게 하는 사회적 배경의 일부가 된다. 결국 우리 모두는 광기에 대해 알 수 없다. 나는 광인이 아니므로. 내가 광인이라 해도 나는 내 광기를 의식할 수 없으므로. 광기의 기준은 광인이 가지고 있지 않으며, 광인이 아닌 자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언제든 광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이것이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놀이라고 묘사하며, 여기서 서구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중요한 면들을 확인한다.
1657년 4월 파리에서 파리 전체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수감되는 일이 있었다. 수감된 이들은 실업자, 부랑자, 자유사상가, 동성애자, 광인 등 쓸모없고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수감한 곳은 ‘로피탈 제네랄’이라는 곳이었다. 로피탈 제네랄은 병원이나 복지시설이 아닌, 감옥과 비슷한 감금 자체를 위한 행정기관이었다. 이 감금은 이성이 ‘국가’의 이름으로 광기를 배제하는 거대한 의식이었다. 이 감금의 기록은 이성의 입장에서만 남아있다. 그러므로 광인들의 중얼거림을 들으려면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 중얼거림은 말보다 몸짓에 가깝다. 광인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을 박탈당한 자기 존재의 비참을 몸짓으로 알려준다. 광기는 이를 통해 우리가 망각해버린 어떤 경험을 불러낸다.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는 광기에 대한 일종의 말없는 거대한 풍자시이다. 웃음, 비명, 소란, 소음, 눈물을 가로지로는 요란한 몸짓으로 광기의 경험을 눈앞에서 새롭게 재구성한다. 이 광인은 사드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사드는 이런 요란한 몸짓을 보여주지 않는 순수한 광기, 빈틈없는 몸짓의 광기이다. 이렇게 사드는 우리의 이성을 침묵 혹은 장애, 그것도 아니면 하나의 더듬거림으로 축소시켜버린다. 그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더 이상 자신의 아름다운 열정(정념 혹은 욕망)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샤랑통 수용소에서 사드(1740~1814)를 발견한 의사 루아예-콜라르는 장관 푸쉐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드의 광기를 언급한다. 그는 사드를, 광기가 아닌 광기에 사로잡힌 광인이라고 표현한다. 사드가 이성적이고 명료하지만, 결국 광기에 도달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푸코는 광기에 대한 당혹스러움을 포착한다. 광기를 배제해온 문화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광기를 이해할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광기의 원인을 모르고, 광인을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광기에는 더 이상 신앙도, 법칙도 없다. 의사 루아예-콜라르가 원했던 것은 우리의 도덕과 질서를 위하여, 사드를 엄격하게 가두어둘 공간이었다. 그러나 광기를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절대적 평온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드의 언어는 우리 앞에 하나의 빈 공간을 열었다. 이 언어는 디오니소스적 일치의 언어가 아니며, 훨씬 어렵고 조용하고 귀먹은 언어이다. 부재와 빈 세계로부터 출발한 이 언어는 사드에게 잠들지 않는 욕망의 천착으로 나타났다. 아르토에게는 이것이 비어있는 중심과 같았다. 그 중심은 말이 결여되어 있고, 언어가 자신을 결핍하면서 자신의 필수적인 것을 갉아먹는 근본적인 비어있음이다. 말할 수 없음, 생각할 수 없음, 자신의 말을 발견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이렇게 오히려 서구 문화에서 광기가 언어에 대해 자신의 절대적 권리를 다시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회가 존재한다. 광기는 스스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스스로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말할 수 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던 아르토는 편집자 리비에르에게 자신의 시를 출판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다. 시를 출판하려면 아르토는 자신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었던 불가능성을 설명해야 한다. 그 불가능성은 사유의 붕괴지점이다. 결국 이 편지 자체가 아르토의 자료인 동시에 시이며, 이차적 언어이다.
‘실존의 과잉 또는 부족이 아니라, 전적인 부재, 진정한 손실의 문제’
‘제가 계속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문제’
편집자 리비에르는 아르토에게 개인정보를 지우고, 가명으로 출판할 것을 제안한다. 이 마지막 우회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언어를 탈선시키는 이 광기의 언어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광기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되찾기 위해 은밀한 작업을 계속한다.
[광기 안의 언어]
푸코는 광기와 언어가 분리불가능하게 얽혀있는 상태라고 본다. 푸코에게 언어의 가능성과 광기의 가능성은 동시적인 것이다. 이 가능성들은 우리에게 자유와 관련하여 위험하고도 끈질긴 무엇인가를 열어준다. 이성은 서로 충돌하는 말들의 짧은 분출로 친근한 세계가 뒤흔들릴 가능성을 막을 수 없다. 말을 하는 모든 인간에게는 미칠 수 있는 절대적 자유가 있다. 그리고 미쳐버린 인간, 인간의 언어에 대해 절대적 이방인처럼 보이는 인간 역시 언어라는 닫힌 우주 안에 갇혀있다. 광기는 말로 표현되지 않을 때도 언어를 관통해 지나간다. 마찬가지로 신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 매듭과 같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신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광인들과 소통하기가 어려운 이유를, 그들이 말하지 않음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문제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긴 언어, 기호들의 군집, 다시 말해 그들이 너무 많이 말한다는 데에 있다. 20세기의 인간들은 스스로가 기호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사물도, 인간도, 역사도, 제도도 믿지 않는다. 20세기의 인간들은 말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믿으며, 언어 안에서만 존재하는 스스로의 자유를 측정하고, 자유를 경험하기 위해 글을 썼다. 신을 저버리고 구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세계에서 언어는 인간의 유일한 원천이고, 근원이었다.
이제 언어가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기억의 빈 공간 자체이다. 그 공간에는 서구의 역사가 배제해 온 광기의 경험이 도사리고 있다. 언어는 그 공간을 통해 우리가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내준다. 문학은 그 광기의 경계에 있다. 정신병자들의 문헌, 수용소의 문헌은 광기의 경계에 위치한 문학적 언어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언어가 사물을 번역하기 위해 적용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은 언어 안에 포함되고 감싸여 존재한다. 말의 자의적 만남이나 혼동, 변형은 그 자체로 진실하고도 환상적인 하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오래 전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알고 있었던 세계이다.
발음의 유사성에 의한 말놀이의 세계는 르네상스 이래 서구 문학에서 소멸된 적이 없었다. 언어의 신비주의자들은 언어의 물질성 속에 존재하는 창조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믿었다. 이 비정상적 시인들은 말이라는 관능적 신체 안에서 모든 의미작용의 살아있는 창조적 실체를 보았다. 20세기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그 이전 언어의 신비주의자들을 재발견하고, 그들의 업적을 칭송했다. 덕분에 우리는 이 경이로운 작업이 보여주는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단어는 절대적으로 자의적이지만, 어떤 단어들은 듣는 것만으로 우리 안에서 사물의 비밀에 다가간 듯 두려움과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언어의 신비주의가 보여주는 역설이다.
현대의 문학을 사로잡는 두 가지 신화는 이 역설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는 기존의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해도 의미가 분명하게 통용된다는 신화이다. 희극과 조롱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이 신화의 맞은편에는 언어의 창조를 위한 빈 공간이 발견된다. 여기서 언어가 자기 자신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땅에 천착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때 언어에서 관습의 흔적은 사라지고, 시와 본성의 깊은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작업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언어에 대한 끈기 있는 관심이다. 그러나 이 작업들은 인간의 꿈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는 언어의 영원한 놀이로 나타난다. 히스테리 환자의 마비, 강박증 환자의 의식, 조현병 환자가 갇힌 말의 미로, 이 모든 것들이 그 놀이의 구조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푸코가 모든 광기의 언어가 문학적이라거나, 문학이 광기에 매혹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푸코의 시대는 문학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언어적 사실이라는 것과, 광기가 하나의 의미작용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광기와 문학은 기호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이것이 문학과 광기가 가지는 공동의 지평이며, 접합선이다.
‘언어가 봉사해야 하는 유일한 사용법’
‘사유를 제거하는, 광기의, 단절의 수단으로서의, 비이성의 미로’
댓글목록
훔볼트펭귄님의 댓글
훔볼트펭귄
책을 읽다보니 오래전 읽었던 돈키호테가 떠오르고,
그리스 희곡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도 떠오르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고찰 까지 펼치게 되고, 삶은 이렇게 변주되나 봅니다~
우분투,우리이기에 내가 있다!
이 어려운 책도 우리가 있기에 읽어나가지 말임다 ㅎㅎ
주호님의 댓글
주호친절한 삼월씨! 책 읽고나서 멘붕왔었는데 삼월님의 친절한 발제 덕분에 길을 잃지 않고 섬광을 따라 목적지에 잘 도착했네요. 감사합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역시 발제킹! 왕 입니다요~~^^
에스텔님의 댓글
에스텔
다시 읽어보니, 왜 발제는 삼월인줄 알겠네요.
근디 2장, 문학과 언어에서 다시 꽉 막히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