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고원] 제5장 기원전 587년, 기원후 70년 : 몇 가지 기호체제에 관하여 발제문 요약
자연
/ 201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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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기표적 주체화 체제>
탈-기표적 체제의 정욕적 선은 그 기원을 주체화의 점에서 찾는다. 그 점은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나아가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는 복수적인 점들이 공존한다.
한 개인에게 부과되는 다양한 교육형태나 ‘규범화’형태는 주체화의 점을 변경한다. 주체화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탈-기표적인 정욕적인 선을 주체화 내지 예속화의 선으로 만드는 것이고, 두 주체의 이중화다.
어떤 주체(주어)는 언어활동의 조건도 언표의 원인도 아니다. 주체는 없으며, 다만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가 있을 뿐이다. 주체화는 그러한 배치의 하나일 뿐이다. 기호체제나 표현형식으로서 주체화는 배치로 소급된다. 다시 말해 경제 안에서 기능하는 권력의 조직으로 소급된다. 자본은 무엇보다도 우선 주체화의 점이다.
주체의 이중화된 형태에는 독신자적인 의식 안에서 진행되는 방식(코키토)과 의식이나 이성이 필요없는 정욕적 사랑의 커플이 있다. 코키토가 그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정욕이듯이, 정욕적인 사랑은 두 사람의 코키토다.
기표적 체제에서의 잉여성은 객관적인 주파수 현상이고, 탈-기표적 체제에서는 주관적 공명이다. 주관적 공명에는 기표가 기록되는 흰 벽 대신에 의식과 정염을 끌어당기며 그것을 공명시키는 ‘검은 구멍’이 존재할 뿐이다. 잉여성과 함께 두 체제를 구별하는 본질적인 것은 탈영토화다. 기표적 체제에서 기호계는 주파수로 표시되는 상대적인 탈영토화다. 주체적 체제에서는 절대적 탈영토화에 도달한다. 이는 의식과 정욕의 검은 구멍 안에 표현된다.
주체화는 다른 하나의 선형적 과정을 이룬다. 주체화는 탈주선에 끊임없이 그것을 재부정하는 선분성을 부과한다. 이유는 표현의 형식들 내지 기호체제들은 지층들이기 때문이다. 주체화는 의미화만큼이나 지층적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주요한 지층은 의미화와 해석이며, 주체화와 예속화다. 이 모든 지층의 집합을 우리는 일관성의 구도와 추상기계로부터 분리한다. 그 일관성의 구도와 추상기계에는 어떤 기호체제도 없다...주체화는 욕망을 과잉과 떼어냄의 점까지 끌고가기에, 욕망은 검은 구멍 속으로 소멸되거나 구도를 바꿀 수밖에 없다. 탈지층화는 새로운 기능, 다이어그램적 기능을 향해 개방된다. 의식과 사람의 기관없는 신체를 만들고, 주체화를 폐기하는 방향으로 탈주하여 더 이상 수목의 매듭이 되지 않고 리좀으로 재개하며 뻗어나가는 잉여성을 만들어낸다.
<기호체제의 혼성과 변환에 대해>
모든 기호계는 혼성적이며, 오직 그렇게만 기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표적 기호계가 일반 기호학을 만들 어떤 특권도 갖지 않는다.
하나의 기호계는 다른 기호계로 번역, 변환될 수 있다. 새로운 기호계가 그 나름대로 창조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변환에 의해서다. 번역자는 창조자가 될 수 있다. 변환과 번역에 의해 순수한 기호의 새로운 체제를 형성한다.
의미화와 해석은 주체화와 더불어 찰싹 달라붙는 혼성물을 이룬다. 사람들은 해석을 비난하지만, 주체의 살아남기 위한 한 표현이다. 킹슬리 홀의 반-정신의학적 경험을 통해‘분열자'가 되었던 간호사 메어리 반즈 예를 생각해보라. 강력하게 지층화된 기호계와 결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전-기표적 내지 반 기표적 기호계조차, 비기표적 다이어그램조차 잠재적인 의미화의 중심과 주체화의 점을 기꺼이 구성하려고 한다. 진정한 기호적 변환은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언어에 함축되어 있으며 언표에 내재하는 변수들에 있다.
이전 기호계가 어떤 순간 어떤 영역에 끼어들 때, 그 체제의 독창성만큼이나 혼성의 새로움을 고려해 주는 것은 바로 변환적 성분이다. 예를 들어 레닌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한 때에 진정한 변환이 나타났다. 그것이 불가피하게 스탈린적 조직의 혼성적 기호계로 전락하지만, 사회민주주의 언표들과 구별되는 탈주선을 통해 독창적 기호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이 변환적 성분이 어떤 기호계에 독창성을 부여하거나 독창적 기호계를 새로이 창조한다.
언어활동은 언어학적인 것이기 이전에 정치적인 것이며, 마찬가지로 문법성의 등급을 평가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방식으로 행해진다.
기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활동의 이상이자 이하다. 푸코에 의하면 기호체제들은 단지 언어활동의 존재기능이다. 기호체제는 언어학적 범주로는 충분히 고려할 수 없는 언표행위의 배치다.
기호체제가 언어활동 이하인 이유가 또한 언어활동보다 이상인 이유가 된다. 추상기계는 그 자체로 탈지층화되고 탈영토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어떤한 실체도 갖지 않으며, 내용과 표현으로 구별되지도 않는다. 추상기계 그 자체는 기호계보다 결코 더 물리적이거나 신체적이지 않다. 그것은 다이어그램적이다. 다이어그램은 형식도 실체도, 내용도 표현도 갖지 않는다. 실체가 형식화된 소재인 반면 소재는 형식화되지 않은 실체다.
다이어그램은 가장 탈영토화된 내용과 가장 탈영토화된 형식을 서로 결합시키기 위해 재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토적 기호인 지표와 구별되고, 재영토화의 기호인 아이콘과, 상대적 내지 부정적 탈영토화의 기호인 상징과도 구별된다. 이처럼 다이어그램에 의해 정의되는 추상기계는 최종심급에 있는 어떤 하부구조가 아니며 최고심급에 있는 초월적 이데아도 아니다.
추상기계는 이중의 운동이 있다. 하나는 추상기계가 지층들을 가공하고 끊임없이 어떤 것을 그로부터 탈주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기계가 지층에 의해 실질적으로 지층화되고 포획되는 것이다. 지층들은 다이어그램의 소재와 기능을 포획하지 않고서는 조직되지 않으며, 이것을 표현과 내용이라는 이중의 관점에서 형식화한다. 그래서 각각의 기호체제, 의미화와 주체화도 다이어그램적 효과라고 하겠다. 다른 한편 추상기계들은 탈지층화된 기호-입자들을 추출하거나 가속할 수 있는 권력이나 잠재력을 갖고 나타난다. 이것은 절대로의 이행이다. 따라서 어떤 기호체제의 변환-창조는 실제로 언제나 새로운 추상기계의 출현을 거쳐간다.
기호체제들은 언어활동으로 소급되지 않으며, 언어활동은 그 자체만으로 추상기계를 이루지 않는다. 반대다. 언어활동이 기호체제로 소급되는 것이며, 기호체제가 추상기계로, 다이어그램적 기능으로, 그리고 모든 기호학이나 언어학 내지 논리학을 이탈한 기계적 배치로 소급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기표가 없는 것처럼, 보편적 명제논리는 없으며, 문법성 그 자체도 없다. 언표들과 기호화의 ‘배후에는’ 오직 기계와 배치만이 있으며, 상이한 체계의 지층화를 횡단하고 존재와 언어활동의 좌표로부터 탈출하는 탈영토화 운동이 있을 뿐이다.
세미나 시간에 나왔던 얘기들을 정리하려 했으나
제 안에서 소화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있는지라
주로 토론이 된 문장들을 요약하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