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안전, 영토, 인구' 8강 후기. 1월 6일차 세미나 후기. +8
알료샤
/ 2017-01-10
/ 조회 1,986
관련링크
본문
푸코는 8강을 마치며 그간 ‘장황’하게 사목권력의 권점을 채택한 이유를 말한다. 우선 첫 번째로 16세기부터 발전한 통치성의 토대를 알아보기 위함이며, 두 번째로는 사목적 품행에 저항하는 대항품행 운동들이 결코 이분법적으로 단순히 나뉘는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했지만, 애초에 사목 또한 대항품행으로 명명된 것들에 대항하면서 발전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대항품행적 요소들을 이식, 순화해왔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사목적 요소가 중세에 제기된 정치적. 경제적 문제, 도시와 농민의 반란 운동, 봉건제와 상업부르지아지의 충돌 같은 당대의 첨예한 문제들과 어떻게 연관이 됐는지 ‘전술적’으로 파헤치려 했다. 푸코는 말한다. 외적으로 상이한 요소들의 연결점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데올로기라는 낡은 개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발제를 하면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정치영역의 통치성과 충돌한 탈영자들 이야기였다. '군대'와 '탈영',' 병역거부'는 지난 몇 년간 내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져왔던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푸코가 17-18세기 국민개병제 이후 군복무가 국민의 윤리. 도덕이 됐을 때, 탈영-거부는 단순 위반이 아닌 하나의 '품행상의 저항'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의미 깊게 다가왔다. 군대와 군입대를 당연한 '도덕적 품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매번 '병역거부'를 해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내 나이대 6.25 전쟁에 참여한 외할아버지나, 특전사에 입대한 아버지에게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나는 비도덕적인 군기피자일 뿐이다. 여기서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려 할수록, 엇나가는 손자, 빗나간 자식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어떻게 단번에 납득할만한 이유를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내 지난 고민들을 그렇게 쉽게 전달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나름 지금껏 나를 변화시켜온 책, 경험들의 총체를 짜내어 진술해도, "그런 거 말고 병역거부의 진짜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몇몇 지인들이 그랬고 얼마 전 아버지가 그랬다. 반전과 평화, 남북의 적대적 공존관계, 사회의 병영화, 예수의 삶과 기독교적 가치관,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던 십대 시절, 내가 지켜봐온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가부장적 일면들.. 어떻게든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해, 스스로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고민했던 모든 걸 짜냈다. 하지만 무엇인가 어색하고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종교에 있어서는 불성실한 배교자였고, 어린 시절 싸우는 게임과 영화를 즐겼고, 시위 현장에서 소외감을 느껴 혼자 빠져나온 적이 여러번 있었으며,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경험도 없다. 또 이런 이유들을 억지로 짜낸다 한들, 추궁을 멈추지 않는 상대방에게 아무런 납득도 되지 않는다. "진짜 이유가 뭐냐?"라는 질문에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외면하면서까지 병역을 거부한 지극히 예외적인 상처와 트라우마 같은 것을 원하는 게 느껴진다. 한편으로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도 이해하고 싶었을 게다.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에 한해서 말이다. 나는 아직도 집요한 추궁을 하는 사람에게, 내 진짜 배후는 겁쟁이라고, 솔직히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겁이 많고 싸우기 싫어서라고 말하기가 주저된다.
푸코라면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했을까. 맨 처음 푸코 세미나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 그가 자신의 '소수성'의 위치를 인식한데서부터 사유를 확장했고, 발전시켜나간 것이 좋아서였다고 말했던 것 같다. 8장에서 푸코는 어떤 현상을 그 '내생적 역사'에 가두는 게 아닌, 당대의 흐름과 영향 속에서 끊임없이 전술적으로 파헤치려 했던 집요함을 보여줬다. 특정 현상에 갇혀 시대를 보지 못하는 편협함을 넘어선 그이기에, 자기 자신의 ‘소수성’에서 출발해 시대를 횡단했던, 여전히 횡단하고 있는 그이기에, 우리는 푸코를 읽는 게 아닐까? 자기 독백에 갇혀 장황하기만 한 말과 이론은 읽는 이를 질려버리게 만들지만, ‘집요함’을 갖춘 ‘장황함’은 강렬한 지적 자극으로 기진맥진한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저자와 대결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자기 강의가 ‘장황’하다는 푸코의 진술이 매력적으로 들린다. 쉽지 않은 일이 되겠지만, 푸코를 읽어가며, 내가 배워야할 태도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앞으로도 푸코가 ‘장황’하게 그러나 더욱 ‘집요’하게 강의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알료사 님, 잘 읽었습니다.
발제도 너무 훌륭해서 감동적이었는데, 후기까지 아주 멋집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예외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원하는 것 같다."
"자기 독백에 갇혀 장황하기만 한 말과 이론은 읽는 이를 질려버리게 만든다."
선우님의 댓글
선우
"'집요함'을 갖춘 '장황함'은 강렬한 지적 자극으로 기진맥진한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저자와 대결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아.. 그러셨군요...^^
9강에 비하면 8강은 그리 장황하지 않은 거 같아요.^^ 9강 좀 헷갈리던데, 알료사 님의 후기를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집요하게'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칩니다. ㅎㅎ
암튼, 푸코팀이 더욱 든든해졌군요. 고맙습니다.
알료샤님의 댓글
알료샤선우님, 집요하게 푸코를 읽어봐요^^! 읽어야 할 푸코 책이 아직 많이 남아서 든든합니다.
유택님의 댓글
유택
잘 읽었어요 알료샤님 ^^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게 하는 후기를 적어주시다니!
몇년전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병역거부해 2년인가.. 3년인가
징역살이를 한 사람과 데이트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순전히 그의 말에 따르면 감옥안에서 자기는 나름 좋았다(자기위안이었을라나..)
자기 아버지부터 형제들 삼촌들까지도 모두 감옥에 다녀왔는지라
자신도 당연히 의문없이 감옥에 다녀왔다고 하던 말이 생각이나네요...
알료샤님의 댓글
알료샤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 역사는 유구한 것 같습니다. 일제말기에 천황 숭배 및 징병 거부로 수십명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구속된 '등대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항일운동기록사에도 남아 있는 '독립운동'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제 시절엔 독립운동이었던 병역거부가 이승만, 박정희 반공정권에 들어와선, 국가에 불응하고 반기를 드는 불순한 행위가 됩니다. 군기피율 0%를 목표로한 박정희 정권은, 병역기피자들의 가족이나 그들이 일하는 곳의 사업주까지 불이익과 처벌을 줬고, 출소 직후 병역의사를 물어 감옥에 반복해서 집어넣는 잔인한 처벌을 행했다고 하더군요. 길게 이어져온 수형의 역사입니다. 제가 듣기에도 아버지, 형, 삼촌, 교단의 지인들 모두가 감옥에 갔다온 환경이다보니, 학교에 진학하고 밥을 먹는 것처럼 수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교도소 운영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교도관이 이용하는 사무실이나 상황보고실 관리. 정리를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요.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바깥은 끝임없이 광활하고,
경계에 선 존재는 늘 위태롭습니다.
장황하게 떠들다 길을 헤매이게 되더라도,
우리는 집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집요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무엇인가로부터 끊임없이 점령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술적인 자기좌표 찾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집요함과 솔직함의 힘이 깃든 후기 덕분에
제주여행에서 홀로 맞는 첫 밤이 풍요로워졌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알료샤님의 댓글
알료샤누구나 소수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수성을 인식하고 좌표로 삼는 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타자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결코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막연한 연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소수성을 인식하고 넓혀나가기 위한 공부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주도 여행 잘 갔다오세요, 토라진님^^!
삼월님의 댓글
삼월
이런. 자잘하게 바쁜 일이 많아서 댓글을 못 달고 있는 사이에 후기 내용이 조금 바뀌었군요.
지난번 자세한 정리와 질문이 있던 후기도 좋았는데..
(262쪽 법과 관련된 어떤 질문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만 그때 책을 가지고 있질 않아서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물론 지금 후기도 울림이 많이 남습니다.
지난 세미나 시간에 알료샤 님이 꺼낸 '반체제' 이야기도 더불어 떠오릅니다.
푸코는 사실 반체제라는 말이,
삶과 일상 안에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권력에 적대하고 저항하는 형태에 적합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지요.
오늘날 자신만의 반체제 이론을 만들어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물으면서요.
물론 푸코는 정치적 뉘앙스 때문에 이 단어를 '대항품행'으로 대체하지만,
저는 정치적인 동시에 일상적이기도 한 의미들을 언어로 풀어내는 푸코의 그 통찰이 흥미로웠습니다.
정치와 일상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느냐는 물음처럼 다가오기도 했거든요.
푸코의 집요한 장황함을 매력으로 느끼는 사람을 한 명 더 알게 되어 기쁩니다.
알료샤 님 덕에 지난 세미나 시간도, 뒷풀이도 아주 집요하고, 매력있었어요!
- 혹시 스메르쟈꼬프일지도 모르는 이가 알료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