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오제본기 - 하본기 - 은본기
기픈옹달
/ 2017-01-13
/ 조회 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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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제본기》
‘중국中國’ 역사의 시작은 황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중국’이란 오늘날 이웃에 위치한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염두하자. 수 천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어 왔으며, 크기가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한, 수 많은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로 끊임없이 변화한 세계를 가리킨다. 물론 이 ‘중국’이 오늘날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중국에 여전히 ‘중국’의 흔적이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 인종, 문화가 큰 변화 없이 커다란 우물에 갇혀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로마에서 ‘로마’의 흔적을 겨우 찾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이 하나의 통일된 세계로 완성된 즈음에 쓰여진 글로 그 통일까지의 과정을 서술했다. 그는 이 통일된 세계가 본디 하나의 뿌리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바로 모두 황제의 후손이라는 것. 여기서 황제黃帝는 황제皇帝와 다르다.
황제의 이야기는, 그로 시작하는 오제의 이야기는 신화에 가깝다. 구체적인 역사라기 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황제는 치우와 염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다. 그는 토덕土德의 상서로움을 가졌으므로 ‘황黃’제라 불리었다. 아마도 이는 후대에 오행설이 성립된 이후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불을 몰아낸 흙. 어쩌면 이는 농경 문화를 자신의 뿌리로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황제는 신농神農을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황제 이후 전욱과 제곡을 이어 그 유명한 요와 순을 만날 수 있다. 유가는 요순을 매우 높이 샀는데 이는 그들이 왕위를 물려준 방식, 선양禪讓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는 순이 아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천하를 물려주었다. 요순의 시대에는 사흉四凶 - 혼돈, 궁기, 도올, 도철이 있었다. 이들을 변방으로 내쫓아 혼란을 바로잡았다. 이처럼 ‘중국’은 이름처럼 중앙으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강했다. 사방은 오랑캐의 땅으로 싸움에서 패배한자, 죄를 저질러 내쫓긴 자 등이 머무는 곳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중국’은 그런 순수성과 단일성만 남은 정지한 공간이 아니었다.
2. 《하본기》
하의 창시자 우는 곤의 아들이자 황제의 현손이었다. 그의 아버지 곤은 본디 순에게 치수의 업무를 받았는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우산으로 추방당해 죽었다. 우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천하의 물길을 다스리는 일을 한다. 사마천은 그의 치수가 구주 - 기주, 연주, 청주, 서주, 양주, 형주, 예주, 양주, 옹주를 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 결과 아홉 주가 모두 똑같아져서, 사방의 외딴 곳에서도 살 수 있게 되었다. 아홉 산은 나무를 간벌하여 길을 열었고, 아홉 강은 모두 발원지까지 잘 뚫었으며, 아홉 저수지에 모두 제방을 쌓으니 천하의 모든 이가 한데 모이게 되었다. 육부가 잘 다스려졌고, 모든 토지는 조건에 따라 등급을 바로잡아 조세를 신중하게 징수했는데, 땅은 모두 세 등급으로 바로잡아 정국의 부세를 완성했다.” - 73쪽
‘치治’가 본디 물길을 다스림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에 이르러 통치의 문제가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오제가 문화의 수호자, 창시자의 이미지였다면 우는 천하를 고르게 묶고 이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부세’가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그가 물길을 다스린 동시에 천하구주를 통하도록 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상적 통치는 세계의 소통을 낳는다. 특히 ‘식량이 모자라면 식량이 남는 지역에서 조절하여 부족함을 보충해 주고 식량이 풍족한 곳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78쪽)이라는 말은 우가 그린 천하를 대표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가 세운 하도 멸망에 이르고 만다. 하의 마지막 왕 걸제는 은의 마지막 왕 주와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후대에 끊임없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까? 걸의 횡포에 대해 사마천은 별 말을 하지 않는다. 겨우 ‘걸은 덕행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들을 해치자 백성들이 견딜 수 없었다’(84쪽)라는 서술에 불과하다.
탕은 걸을 몰아내고 은을 세운다. 그리고 하나라의 사람들을 기에 모여살게 했다. 망국의 백성들은 후대에도 욕을 먹는 법. 기나라의 백성들은 우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기나라의 사람 가운데 하늘이 무어질까 땅이 깨질까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었단다. <열자>에 나오는 이 기나라 사람의 쓸데 없는 걱정을 ‘기우杞憂’라 한다.
3. 《은본기》
은의 창시자 탕의 조상에 얽힌 이야기는 흥미롭다. 어머니가 목욕을 갔다가 제비 알을 간직하여 삼켜 설을 낳았다. 그 설의 후손이 탕이다. 탕에게는 그를 보좌하는 훌륭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윤이다. 이윤은 후대에 이상적인 재상의 모델로 그려진다. 그는 탕을 만나지 못해, 솥과 도마를 지고 탕에게 가 음식 맛을 예로 들어 설득했다고 한다. 그는 꽤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탕의 후손 태갑제가 즉위한 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자 그를 쫓아내기도 한다. 물론 3년의 근신 기간을 지낸 뒤 다시 돌아와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지만. 성군을 보필했을 뿐 아니라, 악행을 일삼는 군주를 일깨워 바로잡은 이야기는 후대의 유학자들,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매력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다면 성군을 모시는 것, 혹은 성군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이상 아니겠는가.
은 역시 중간에 쇠락을 경험하나 무정과 부열 덕택에 다시 바로 서게 된다. 부열은 죄인이었다가 왕의 눈에 들어 재상이 된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 역시 후대에 비슷한 이야기를 여럿 낳는다. 그러나 몰락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는지 은의 왕들 역시 악행을 저지른다. 그 가운데 무을제의 무도함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무을제가 무도하여 우상을 만들어 ‘천신’이라 불렀다. 우상과 도박을 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심판을 보게 했다. 천신이 지면 그 사람을 모욕하고 죽였다. 또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고는 이를 ‘사천射天’이라고 이름 붙였다. 무을제는 황하와 위수 사이로 사냥을 떠났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자 벼락을 맞아 죽었고…”(99쪽)
무을보다 후대에 폭군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앞서 언급된 주였다. 그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그 재능을 뽐내며 악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는 여색에 빠져 나라를 팽개졌다고 전해지는데, 그를 꾄 여인의 이름은 달기였다. 한편 술도 좋아하여 그 유명한 주지육림을 만들어 놀았다고 전한다. 그는 충신 비간의 가슴을 열어 죽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포격의 형벌도 그의 악행을 대표한다.
그러나 주는 ‘주나라’의 무왕에게 패하여 죽는다. 이제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후대 유학자들이 꿈꾸었던 나라 주나라의 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미리 이야기하면 사마천이 그리는 주나라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도리어 천하 난세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고 할만큼 많은 사건사고를 품은 나라기도 하다. 주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덧붙이면 은나라의 후손에게 송나라가 주어졌는데, 춘추전국시대에 송나라 역시 어리석은 사람들의 나라로 유명하다. 망국의 백성은 어디를 가나 손가락질 받기 마련이다. 일본 학자 가운데 일부는 훗날 장자가 이 송나라의 후손이라 추측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