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후기 - <안전, 영토, 인구> 5, 6 강 +2
토라진
/ 2016-12-28
/ 조회 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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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발제를 맡았던 6강의 내용을 추려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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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앞장에서 사목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목자’라는 개념이 그리스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다시 거론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문헌과 자료를 근거해 찾아 제시합니다. 결국 ‘목자’라는 것이 그리스 사회에서는 은유적 표현으로 쓰였을 뿐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플라톤의 [정치가]의 텍스트들을 거론하면서 ‘목자’모델 대신에 ‘직조공’모델을 발견해냅니다. 직조공이 씨줄과 날줄을 엮는 것처럼 정치가는 교육에 의해 형성된 적절한 요소들을 서로 엮고 다양한 형태의 의견과 대립하는 사람들의 기질을 엮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융화와 우애에 기초한 공동체’로 결합시키는 기술이라는 거죠. 결국 그리스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목자’개념은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목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와 함께 시작했다고 역설합니다. 사목의 역사를 살핌으로써 다다른 중요한 결론은 봉건제를 반대하는 혁명은 존재했지만 사목에 반대하는 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목자라는 주제는 신과 인간의 모든 관계를 포괄하는 것으로 법, 규정, 기술 절차 등 사목 내에서 제도화되어 발전해갔으며 모세의 주제(위험에 빠진 한 마리의 양을 구제하기 위해 무리 전체를 희생하기로 함)는 교회 조직 전체의 근간이 되어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목자는 누구였을까요? 그리스도는 물론 목자입니다. 그리고 사도들, 주교들뿐만 아니라 영토를 가진 주임사제까지 목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그들이 목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선 성사(聖事)의 권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재판권입니다. 재판권 이야 말로 병이나 스캔들로 무리 전체를 오염시킬지 모를 양을 추방할 수 있도록 목자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결국 사목은 사람들의 영혼을 통치하는 권력으로서 부상하게 됩니다. 목자는 권력을 신비화하는 방식으로, 왕은 권력을 제왕적인 방식으로 행사하는 자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목 권력이 정치권력 사이에 일련의 간섭,지지, 중개, 충돌이 있었지만 정치권력과는 다른 특수한 권력으로 정치권력과 구별되었다는 점이며 이것이 서구 사회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미나 후에 저의 단상과 망상들을 풀어내 볼까요?
‘통치하다’ : 전진하게 하다 / 길을 따라가다
유지시키다 / 식량을 공급하다
누군가를 인도하다
식이요법을 부과하다
말을 나누다 / 대담하다 / 대화하다
성교하다
‘통치하다’의 어원에 이렇게 다양한 의미가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이것은 관계와 나눔과 뒤섞이는 가운데 질서를 찾고 함께 나아가는 어떤 이미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 이미지는 5강의 주7)에서의 다음과 같은 말에 달라붙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적 규칙성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장치입니다. 다시 말해 권력의 한 형태를 특징짓고 바로 개인과 집단의 구성에 동시에 관여한다고 여겨지는 조직망, 흐름, 중계, 거점, 잠재력의 차이 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6장에서 푸코는 플라톤의 [정치가]에서 직조공 모델을 끌어옵니다. 사람들을 ‘융화와 우애에 기초한 공동체’로 결합시키는 직조공의 기술을 정치적인 사목의 개념 대신 쓰고 있다고 말이죠. 저의 상념이 이런 말들에 걸쇠를 걸고 서로 결속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푸코는 이런 말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요? 물론 푸코는 쉽게 말해주지 않을 테지요? 그렇다면 저는 푸코의 동의 없이(물론 동의 따위 필요없슴다. 내멋대로 놀테니깜둥ㅋㅋ) 뒤죽박죽 저의 못생긴 상념들을 풀어놓아 보겠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 자의든 타의든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어디에든 묶여 있으며 그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가족과 학교, 국가 어떤 것에서든 말이죠. 푸코는 일단 이런 공동체의 구조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들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통치한다는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어원을 끌어들인 것은, 아마도 근본적인 이런 물음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관계망들과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권력 조직들에 대해 냉철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도적 규칙성이 아니라 권력의 장치들이 놓여 있는 조직망, 흐름, 중계, 거점, 잠재력의 차이 등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목자의 개념이나 정치가의 권력에 대한 냉혹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것이겠죠. 이 모든 것, 편견 없이 시각을 다각화하고 정치 권력에 대한 정확한 판단, 관계망에서의 개개인의 실천과 연대와 중계를 통한 가능성에 대한 기회를 열어놓은 것.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혹시 아닌가요, 푸코씨?(아님 말구~~흥!)
그리고 조금 의문이 남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목제도에서 모세의 주제(위험에 빠진 한 마리의 양을 구제하기 위해 무리 전체를 희생하기로 함)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리주의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사목 정치 권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사목에 관한 다음 강의에서 혹시 밝혀지게 될까요? 최근 강의에서 몸과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푸코씨! 좀 더 힘을 내주세요. 다음 주에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정신의 도끼가 되는 글들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난 후기를 쓰려고 했을 뿐인데, 그리고 나는 푸코의 추종자가 아니라며 극구 말해왔는데, 푸코의 안부를 걱정하는 글로 끝나다니......아뿔싸!입니다. ㅋㅋ)
댓글목록
소리님의 댓글
소리
ㅋㅋㅋ토라진 님의 후기는 푸코씨와 얘기하는 듯한 느낌의 후기네요! 못생긴 상념이 이런 모습이라니! 강동원이 자신은 잘생긴게 아니라고 말하는 느낌과 비슷...ㅋㅋㅋ푸코는 엄살쟁이라 아직은 괜찮을거에요..ㅋㅋ
각설하고, 모세의 주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게 해주는 사목제도의 특성을 잘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를 돌보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휼륭한 목자'와 신도(나)와의 근본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모세의 주제입니다. 목자-신도라는 개인적인 관계는 후에 사도와 주교로 이어지는 사목권력의 또 다른 목자들과 신도들의 관계로까지 넓어지고, 이는 곧 개개인을 관리하지만 결국엔 모든 신도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사목권력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주제를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개인에 집중하는 모세의 주제가 사목권력 하에서 체계화되고 영토성을 갖게 되면서, 각각의 교주들(목자들)은 개별적으로 동시에 모두를 돌봐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목자의 의무, 모세의 주제를 훌륭히 수행하는 일이라 생각도 했을테고요. 따라서 모세의 주제가 모두를 위한 좋은 돎봄,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사상과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엿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조직 전체를 희생하고, 작은 위험으로부터의 구출을 위해 더 큰 위험으로 뛰어드는 일.
이것은 통합을 위한 권력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모두를 목자의 마음의 자리에 서게 하는 일이기도 한 듯 보여요.
즉 모두로 하여금 사목의 권력에 대한 맛을 보게 하고 그것을 살게 하여, 그 신성함을 체험하게 하는 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사목 권력, 혹은 그 신성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건 머리로만 아는 제왕 권력보다 모두의 마음에 더 깊고 굳건하게 뿌리내리게 될 듯 싶거든요.
물리적 고통과 고난의 체험을 통해 모두의 몸 안으로 부지불식간에 잠입해 들어간 권력의 영토라고나 할까.
저야말로 진짜로 못생긴 상념 하나 얹어 봤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