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폴란드 문학 12/28 후기 +5
희음
/ 2017-01-03
/ 조회 1,356
관련링크
본문
<언제든 철회할 수도 있는>
- 야로스와프 이바시키에비츠의 ‘자작나무 숲’을 읽고
볼레스와프와 스타시는 형제지간이다. 요양소에서 지내던 스타시가 형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둘은 사사건건 맞닥뜨리고 또 부딪게 된다. 사실 스타시는 그곳에 살기 위해 간 것이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제 생의 마지막 실타래를 그곳에다 풀어 놓으려고, 즉 죽기 위해서 그곳에 간 것이다.
그런데 스타시가 그렇게 가게 된 장소에는 이미 죽음이 만연해 있다. 1년 전의 치명적인 죽음. 볼레스와프의 아내가 죽음으로 묻힘과 동시에 그곳에는 깊고 촘촘하게 짜여진 죽음의 카펫이 깔리게 된다. 무색무취의 적막한 죽음은 집과, 집 주변의 자작나무 숲에 번져있다. 그 집과 숲에는 볼레스와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와 밀착된, 일체화된 장소. 그러니 그곳은 그의 몸이며, 그곳에 깔리고 번진 죽음은 볼레스와프의 몸을 뒤덮은 옷, 혹은 피부다.
소설은, 죽음을 앞둔 자와 죽음을 입고 살아가는 자의 대결구도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대결구도는 왜 생겨났는가. 죽음끼리의 대결이 무슨 소용이라고. 마주 선 두 죽음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측은해하기에도 모자란 게 아닌가. 그것의 시작은 묵을 대로 묵은 죽음을 살고 있는 형의 질투, 혹은 동생의 죽음에 대한 오해 때문인 것 같다. 동생이 죽으러 이곳에 왔다는 걸 뒤늦게 알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동생에게서 삶만을 본다.
‘스타시가 현관 앞에 멈춘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볼레스와프는 마음이 언짢았다. 어린애처럼 촐싹대며 훌쩍 뛰어내리는 것도 그렇고, 사파이어빛 양말도 눈에 거슬렸다. 깡똥하면서도 헐렁한 바지 아래에서 그 색깔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소설 안의, 동생과의 첫 대면에서 그의 심경은 이렇게 기술된다. 그는 내내 괴로워하고, 동생에게 연신 모진 말을 뱉는다. 동생이 처음 사랑을 느낀 상대인 말리나에게는 묘한 질투와 매혹을 느끼며, 자신의 딸인 어린 올라에게서 그간 보이지 않던 활기가 생겨난 데 대해서도 올레스와프는 불안의 시선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올라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요람처럼 어깨를 흔들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올라의 발과 머리가 나뭇잎들에 스치자 물방울들이 후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스타시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짐짓 밝게 말했다. “올라, 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어. 아주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고... 그래서 너는 물방울들로 목욕을 해야만 해. 내가 제대로 목욕을 시킬 거야. 공중에다 집어던질까...?” 올라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삼촌, 삼촌! 머리가 가지에 부딪힐 것 같아.” 스타시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야. 삼촌은 고양이라서 어두워도 다 보인다고.”’
스타시는 이렇게 자주 자작나무 숲을 걸으며 올라와 즐거운 시간을 나눈다. 둘은 서로를 웃게 한다. 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의 삶을 팽창하게 하듯, 그런 팽창의 운동을 끝없이 주고받듯.
스타시는 말리나와도 그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덤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으로 갔다. 잡목이 우거져 있고 그 밑으로 작은 풀밭이 펼쳐진 구석 자리가 다른 곳보다는 덜 젖어 있었다. 스타시는 말리나가 여기까지 자기를 따라와 준 것이 고마웠다 그들은 풀밭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말리나를 껴안았다. 그의 여윈 팔이 처녀의 넓고 탐스러운 등을 더듬었다. 그는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여인을 생각했다. 한없는 고마움과 더불어 예민한 감각, 꿈결 같은 나른함을 동시에 느끼며 그는 자신의 머리를 처녀의 가슴에 묻었다. 처녀는 아무 말 없이 이슬에 젖은 채 따뜻한 체온으로 스타시를 안았다. 그러고는 그를 뒤로 젖히고 함께 누웠다. 그렇게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그들은 한밤중 숲이 생동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연약한 자작나무 가지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사람의 속삭임 같았다.’
물론 스타시가 자신의 미약한 사랑을 극점까지 길어 올릴 수 있었던 건 그의 맞은편에서 묵묵히 붙들어 주는 말리나라는 존재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병상에 누운 채로 생을 잃어가는 스타시의 창 바깥으로 이런 노래가 흐른다.
“처음에 닫은 것은/저의 시선이었어요,/당신을 알고 싶지 않았기에...//그리고 두 번째로 닫은 것은/높은 현관문이었어요, 제가 발을 디뎌놓아야 할...//세번째로 닫은 것은/잿빛 바윗돌이었어요,/그 밑에서 제가 잠들어야만 하는...//회색의 바윗돌이에요,/그 밑에서 제가 잠들어야만 하는...”
말리나는 그의 삶의 마지막 하루 앞에서는, 목을 가장 높이 빼어 노래 부르고, 그의 죽음의 첫 하루 앞에서는, 가장 낮은 포즈로 그의 초라한 몸뚱이를 닦기 위해 다가선다.
스타시는 자작나무 숲에 묻힌다. ‘자작나무 숲’이라 불리는 장소에 와서 그는 ‘끝까지’ 살다 갔다. 볼레스와프는 그곳을 떠나기로 한다. 그에게는 평온이 깃든다. 이제야 대결이 끝났다는 듯이. 이제야 실컷 애도할 수 있겠다는 듯이.
‘볼레스와프를 괴롭히는 것은 무덤이 또 하나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때로는 삶이란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언제든 철회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 속 이야기의 풍경을 복기하다가 문득, 저 두 개의 문장이 소설의 진실을 가장 직설적으로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의 대결구도가 동생과 형의 대립으로 그려졌거나, 볼레스와프 내부의 분열이 소설의 인물들에게 투사되었다는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
매순간 볼레스와프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건 다름 아닌 불안이었다. 또 하나의 죽음에 대한 불안. 잃고 싶지 않았던, 끝내 붙들고 싶었던 한 사람의 목숨. 그것을 잃게 될 머지않은, 그러나 언제일지는 모르는 어느 날에 대한 불안. 그 절대적으로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떨림으로 인해, 그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위악을 떨었던 게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두 사람을 잃고 이제 그는 편안해졌다. 언제든 철회할 수도 있는 것이 스스로를 철회한 광경을 보고 난 뒤, 그는 홀가분함을 얻었다. 그리고 그 역시 상상 같고 농담 같은 삶을 언제든 철회하면 그만이라는 가벼움으로, 자작나무 숲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숲을 향해 떠날 것이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일단 '자작나무 숲'부터 올립니다. 숨 좀 고르고 나머지 작품들 후기도 올릴게요. 쓰고 보니 후기라기보다는 독후감이 돼 버렸네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삶의 의지와 죽음의 의지가 대결하는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불안이군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게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안 때문이겠지요.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
스피노자는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성찰한다'고 했는데,
죽음을 성찰하는 이는, 삶을 성찰하는 이를 질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 영혼을 어떻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스타시가 죽음의 순간에 두려움과 한탄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볼레스와프는 1년 전 죽은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겠지요.
그리고 이미 그 떠올림을 예감하고 있었겠지요.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는 순간 우리의 영혼에는 이미 불안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그 불안이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잠식하지 못하게 노력할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볼레스와프라고 입을 모았나 봅니다.
더불어 그의 위악과 다른 숲을 향해 가는 행보를 미워할 수 없었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 조금씩은 볼레스와프처럼 불안이 깃든 영혼들이기에.
잘 읽었습니다. 그냥 넘기기 안타까운 소설을 복기시켜주고, 아름다운 감상문으로 남겨주어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우왕, 이렇게 신속정확한 덧글이라니, 감동입니다.ㅠㅠ
글을 쓰다보니 볼레스와프에게 너무 미안해지더라고요.
마지막 문장의 '행복하기까지 했다.'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간사함과 파렴치함을 읽기도 했으니까요.
소설의 캐릭터가 대부분 매력적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스타시는 스타시대로, 볼레스와프는 볼레스와프대로, 말리나는 말리나대로, 올라는 올라대로.
심지어는 유령처럼 자작나무 숲에 깃들어 있던 미하우에게까지도
소설 속 그의 소임을 충실히, 충분히 매력적으로 행한 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피노자의 저 말은 죽음은 성찰할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이기도 한 듯해요.
죽음은 우리가 고스란히 맞아야 할 일이니까. 삶이 스스로를 철회할 때가 오면
그저 그 철회와 그로 인한 죽음의 절차를 따르면 되는 일.
그 '따름'의 일을 보다 자연스럽게 해내기 위해 삶의 성찰은 필요한 것이겠고요.
죽음 앞에 서서, 죽음으로 끌려들어가는 사랑하는 이의 고통과 곤혹에 대한 떠올림을
볼레스와프가 이미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삼월 님의 발견은 정말 빛나네요.
그 예감이 그를 더더욱 불안하게 했을 테고, 죽음보다 못한 삶의 시간을 겪게끔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번 주는 문학세미나를 통한 우리의 발견들이 잠깐의 동면을 맞겠네요.
누구보다 삼월 님이, 오랜 시간, 열심의 시간을 문학세미나에 선사해주신
소중한 삼월 님이 더 깊고 더 따뜻한 잠 자고 나오셨음 합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추운 겨울 밤. 따뜻한 찻집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희음님과 삼월님의 글입니다.
따뜻한 찻물을 넉넉히 데우고 곁에 다가와 슬며시 이야기를 건네봅니다.
가장 잔인한 것은 죽어가는 것들을 지켜보는 일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죽어가는 것들을 지켜보는 대가로 받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이거나 새로운 삶은 아닐까요?
어쩌면 그 죽음과 삶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역시도 마찬가지이구요.
우리 역시 어떤 죽음이든 늘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마지막에 행복한 미소를 띠고 돌아서는 블레스와프가 참 맘에 안들었는데......
희음님의 글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 모든 죽음들을 내 방식대로 합리화하고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제 자신이었고, 그래서 유독 블레스와프가 불편했다는 것을......
세계종말론이 득세했던 한 때 제 꿈의 테마의 비밀이 벗겨지는 것 같은.....ㅋ
그새 차가 식었네요.
다시 물을 덥히려 잠시 물러나야겠습니다~~
그 사이 다른 이가 곁을 대신해 주어도 좋을 듯하군요~~^^
mheejung님의 댓글
mheejun…
어제 늦게까지 깨어 계셨군요, 토라진 님.
언젠가 한 번은 아주 오랜 밤중까지 품이 넓고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차를 돌려 마시고
무거워진 서로의 눈꺼풀을 가리키며 깔깔거리기도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가장 잔인한 일이 죽어가는 것들을 지켜보는 시간이라는 말씀, 공감합니다.
게다가 그 죽음이 예정돼 있을 때,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부서지는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를 때의
살얼음 같은 불안을 무엇에 비할까 싶어요. 지켜보는 것이 '나'의 죽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이의 꺼져가는 목숨에 나의 생을 대입하느라, 더더욱 그 시간이 부대끼는 것일지도요.
감상문 쓰느라 다시 책장을 넘기며 볼레스와프의 날 선 신경질들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향해있음을 재발견하게 되면서,
우리가 이 작품을 처음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볼 수 없었던 이면이 이제야 드러나 보인 것은,
그 부분이 작가의 의도나 욕망이 아닌, 소설 자체의 욕망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를 떠나 자유로이 활보하고 다른 시간과 공간과 맞닥뜨리면서 다른 신체로 새로이 태어나는 텍스트의 욕망.
기회가 되면 토라진 님의 꿈 이야기도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