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공백] - 쉼보르스카 후기 +1
토라진
/ 2017-01-03
/ 조회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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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세미나 전날 몸살감기로 하루 종일 앓고 난 후, 다음 날 발제 때문에 겨우 일어나 세미나에 참석했던지라,
그 당시 세미나 회원 여러분들의 의견들에 집중하기 힘들었네요. 기억나는 것은 세미나 후 나누었던 농담과 침연님의 태국어......
아름답고 명랑하게 들리는 태국어의 낭랑함뿐입니다. ㅋㅋ
따라서 다음의 제 후기는 시 세미나 회원분들의 소중한 의견이 반영되지 못한,
지극히 주관적인, '병환 속의 메아리' 정도가 될까요? 암튼 그렇습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
쉼보르스카라는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조국인 폴란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아우슈비츠가 있었던 폴란드,
그곳에 살고 있던 폴란드인들은 나치의 만행을 지켜보며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목격자로서의 부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이 폴란드에서 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쉼보르스카는 1995년 노벨문학상 수상했습니다.) 이런 폴란드의 모순적인 정치 상황, 인간의 본질과 삶의 비애들을 드러내는 현실이 그대로 문학적인 화두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인 역시 인간의 잔인한 본성과 비극성을 목도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문학으로 그려낼 것인지 고심하며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책무로서 증언의 임무를 저버릴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등단작 <단어를 찾아서>에서는 이런 작가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난다.
단어를 찾아서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피로 흥건하게 물든 고문실 벽처럼
내 무덤들이 똬리를 틀지언정,
나는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고 싶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론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쉼보르스카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삶의 심연 속에 들여다보는 힘을 가지고 있던 시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어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때로는 식상해보이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세미나 회원분들 몇몇은 시에 살짝 실망하기도......) 너무나 당연하고 일반적인 진술이 진부한 희망가처럼 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음의 시 <두 번은 없다>에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런 혐의들이 엿보인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그러나 희망의 노래는 쉽게 불러진 것이 아닌 듯하다. 한계가 분명한 인간의 유한한 운명과 결코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 인식과 그에 대한 수긍, 그리고 인간의 실천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하지만 시인은 ‘우리’라고 불리는 서로간의 관계와 ‘꽃’이라 여기는 대상들을 인식하는 문제에 있어서 어려움을 토로한다. 이어지는 시어들은 이에 대한 답답한 심경이 드러난 한탄과 한숨의 구절들이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네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결국, 희망의 노래는 연습과 좌절과 통탄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쉽게 써진 듯 보이는 그녀의 시가 울림을 주고 있는 이유이다. 니체가 그리스인들을 두고 ‘심오했기 때문에 단순할 수 있었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가장 힘 있는 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음은, 모든 세미나 회원분들의 찬사와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지도>라는 시이다.
지도
평평하다,
자신이 몸을 펴고, 누워 있는 탁자처럼.
그 밑에서 꿈틀대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배출구를 찾지도 않는다.
그 위에서 내가 내뿜는 인간의 숨결은
대기에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고
표면 전체를 평화롭게 놔둔다.
평원과 골짜기는 늘 초록색,
고지대와 산맥은 노란색과 갈색,
가장가리에 찢긴 해안과 맞닿아 있는
바다와 태양은 친근한 하늘색.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그맣고, 닿을 수 있고, 가깝다.
손톱 끝으로 화산을 눌러버릴 수도 있고,
두꺼운 장갑 없이도 극점을 어루만질 수 있다.
한 번의 눈짓으로 사막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
바로 옆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과 더불어.
밀림은 나무 몇 그루로 표시되어 있어
그 속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동쪽과 서쪽,
적도와 위와 아래 -
음식 위에 살며시 검은 깨를 뿌려놓은 듯 고요하고 잠잠하다.
그리고 그 검은 점 하나하나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다.
수많은 무덤들, 느닷없는 폐허들은
도면 속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나라들 간의 국경선은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마치 존재 여부 자체를 망설인 것처럼.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허용치 않으니까.
관대하고, 너그러우니까.
그리고 탁자 위에다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내 눈앞에 펼쳐 보이니까.
이 시는, 시인이 죽기 전에 완결한 마지막 시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 자연과 인공, 진실과 거짓 사이를 관통하며 유려하고 분명한 빛깔들로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그 지도의 세계는 우리들 누구나가 한번 쯤 망상 속에서 가 보았던 세계일 뿐 아니라 우리가 늘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은 지도 속에서는 검은 점일 뿐이며 손톱 끝으로 누르는 것만으로도 사라져버릴 수 있다. 배출구가 없을뿐더러 길을 잃을 리도 없는, 그러나 늘 거짓을 말하는, 그러나 마치 존재 여부 자체를 망설인 것처럼 나라들 간의 국경선은 아주 희미하게 보이게 하는 지도. 그 지도에 대해 시인은 ‘나는 지도가 좋다.’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이 지도 말고, 우리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막연하지만 분명히 자신 안에 존재하는 꿈의 지도를 쫒지 않고서, 어떻게 허망한 현실을 살아낼 것인가 말이다.
나는 이런 시인의 역설이 좋다. 아프게 좋다.
감기몸살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함께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는지도.
마지막으로, 쉼보르스카의 유품 노트의 메모로 여운을 남기고자 한다.
“죽음에 대해 쓰는 것은 쉽지만 삶에 대해 쓰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삶에는 무수히 많은 세부 항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인 것은 결코 흥미로울 수 없습니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병환 속의 메아리, 절절합니다.^^
비록 많은 이야기가 담기진 못했지만, 애써 주신 시간이 다 느껴집니다.
지도라는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인의 역설이 '아프게' 좋다는 말씀도 깊이 와 닿고요.
마지막에 남긴, 시인의 유품 노트 속 말도 참 좋았어요.
삶의 그 무수한 항목들, 그 복잡다단한 슬픔의 결들에게 글쓰기로써
또 하나의 삶을 주려 했던 시인의 마음이 무척이나 가깝게 전해지는 문장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