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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알레프 2017년의 후기 +2
장재원 / 2017-01-04 / 조회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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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롭지 않은 날이었다. 일을 뜻하는 알레프의 첫 발제일에 테이블위에는 두번째달 음반이 놓여있었고, 세가지 밝기로 조명을 조절할 수 있는 무선스피커가 놓여있었다. 그날의 간식은 발제자인 가이아가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홍대까지 가서 사온 네가지맛의 타르트였다. 

 

무긍은 이 때까지도 다섯번째 주의 발제문을 올리지 않았는데 사실 그것은 그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며칠간의 시도 끝에 겨우 우리실험자들 사이트에 접속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홉개의 똑같은, 그리고 링크에 링크를 거쳐 또다시 아홉개의 링크가 기다리고 있는 미로와 같은 웹사이트였다. 하지만 오라클은 이유야 어찌되었건 후기를 제 때 올리지 않은 것은 우리의 신성하고도 거역할 수 없는 교리를 어긴 것이기 때문에 비난을 피해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에야 털어놓는 이야기지만 무한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무긍에게 발제문을 몇 달 먼저 올리고 말고 하는 일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것을 천년 정도 미룬다고 해서 고작 백년을 살 뿐인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무긍과 같은 사람들은 도깨비나 저승사자처럼 우리주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대번에 알아보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그들의 존재를 들어본 적이 있다할지라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무긍이 본인의 닉네임을 통해 그의 정체를 대범하게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보르헤스는 혈거인을 통해 그들은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특히 혈거인을 언급하는 부분은 보르헤스의 여러 설정 중에서도 픽션이 아닌것으로 널리 알려져있기도 하다.

 

혈거인들은 한때 낙원의 삶을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유한의 존재를 지각하게 되면서 그들의 타락도 시작되었다. 시간의 개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념이 물질화 되는 순간 허무가 다가왔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연속의 시간을 갈망하며 그들은 단절된 시간, 인간의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추구했다. 인간이 그들처럼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버렸고, 말과 글을 다듬어가자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버렸다. 혈거인들의 미개한 삶은 실상 유한을 망각하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이자 결과였다.

 

구전으로만 전해진 그들의 존재는 과거의 화려한 영화와 세월이 덧붙인 온갖 치장들로 인해 인간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존재의 무한함은 능력의 무한함과 동의어로 여겨졌고 만들어진 이야기속(실제와는 다른) 그들의 무결점한 삶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플라톤과 같은 소피스트들은 그들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원형이며, 우리는 그것의 재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거듭할수록 타락을 거듭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인간들 중 일부는 그들을 동경한 나머지 그들의 삶을 최상의 미덕으로 여기고 실제로 그러한 삶을 추구하기도 했는데, 물론 그들이 동경했다는 삶의 형태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이들의 삶이 무한의 삶과는 거리가 먼 오늘만 사는 삶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이런 담대함을 추구한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는 불한당이 되었고, 정복자가 되었으며 가우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무한의 존재와 닮아간 점이 있다면 스스로가 만든 문화를 거부하고 자연상태에 가까운 삶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

 

여기까지가 그날 언급되었던 죽지않는 사람과 죽은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사실의 전부다. 이 후에 일어난 일들은 마치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동원된 한편의 연극과 같이 벌어졌다. 자리를 일어서며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인양 맥주 이야기를 꺼냈고 A의 배역을 맡은 이는 강원도 고산지역에서 가져온 배춧잎을, 또 어떤 이는 마른 멸치 몇마리를 마지못해 꺼내왔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사전에 미리 계획된 일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제서야 이제껏 테이블위에 놓여있었던 칠레산 와인 까시에로 델 디아블로가 눈에 들어왔다. 세미나가 어두운 가운데 깜빡깜빡이는 크리스마스 조명 아래서 이루어졌다는 사실 역시 그때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연극의 다음 순서는 플레이리스트대로 신청곡을 요청하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대한 반응역시(능청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까지와 같이 모두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클라이막스는 리차드막스가 신탁에 의해 언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말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보르헤스의 완벽한 패러디 혹은 자의적인 변형이군요~~!! 흥미로운 에세이입니다~!!
2010년대의 우리실험실과 보르헤스가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맥락이 시와 같이 아름답습니다.

1. 먼저
[알레프의 첫 발제일 ...... 두번째달 음반 ...... 세가지 밝기로 조명을 조절할 수 있는 무선스피커 ......
네가지맛의 타르트 ...... 다섯번째 주의 발제문 ...... 그리고 아홉개의 똑같은 링크] 로 이어지는 숫자놀이^^

2. 다음으로, 아름다운 텍스트들
- 무한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무긍
-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것을 천년 정도 미룬다고 해서
  고작 백년을 살 뿐인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 자신은 존재를 대범하게 드러내면서도,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
- 유한의 존재를 지각하게 되면서 그들의 타락도 시작되었다. 시간의 개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들은 무한의 존재들이지만) 이들의 삶은 무한의 삶과는 거리가 먼 오늘만 사는 삶에 가까웠다.
- 이런 담대함을 추구한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는 불한당이 되었고, 정복자가 되었으며 가우초가 되었다.

3. 그리고,
- 2016년 보르헤스 세미나의 송년회 풍경을 계획된 사건으로 묘사한 부분까지

...... 보르헤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놀이가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보르헤스 세미나 후기가 올라올 때마다 번쩍번쩍하는 도끼눈으로 살피는 1인입니다.
이응 님을 필두로 하여, 장재원 님까지 이렇게 신나고도 재기발랄하게 보란 듯 보르헤스 놀이를 하다니.
보르헤스 세미나 안 하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서럽다 서럽다 하면서도 '버려야했어' 님 댓글은 언제 올라오지, 하고
다시금 숙명적으로다가 이 놀이를 구경하는 데 목을 빼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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