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젠더 허물기> 6장 발제: 인정을 향한 갈망 (0809)
삼월
/ 20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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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인정은 의사소통을 통해 가능하다
제시카 벤저민은 상호주관적 인정의 가능성과, 치료담론에 대한 철학적 규범을 연구했다. 비평적 사회이론과 임상적 실천에 기반을 둔 벤저민의 연구에서 핵심 유산은 인정개념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된 인정개념을 벤저민은 자신이 쓴 거의 모든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벤저민의 연구는 인정이 가능하며, 인정이 인간주체가 자기이해와 수용을 획득하는 조건이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인정은 임상적 실천을 이끄는 규범적 이상이자 열망이다. 인정개념에는 우리가 대타자를 우리와 별개로, 그러나 심리적으로 공통된 방식으로 조직된 것으로 본다는 함의가 들어있다. 따라서 벤저민에게 의사소통(기표, 상징계) 자체가 인정의 수단이자 사례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벤저민이 말하는 ‘상호주관성’도 대상관계에 외부의 대타자라는 개념이 더해진 것이다. 외부의 대타자는 상호보완관계에 있는 심리적 대상의 구성을 초월한다. 대상과의 관계는 인정이라는 역동적 관점에서 이해된다. 주체는 대상과의 심리 관계를 형성하고, 심리 관계를 통해 주체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인정을 향한 투쟁의 구조가 나타나고, 그 구조 안에서 대타자가 재현대상과 분리되거나 분리되지 않기도 한다. 인정을 향한 투쟁은 대타자와 의사소통을 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인정은 단일한 일련의 사건들이 아닌, 심리적 파괴의 위험이 있는 진행 중인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벤저민은 헤겔과 달리 ‘부정’을 위험으로 보지 않으며, 변별성으로만 기술한다. 대타자와의 심리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부정이지만, 이 관계가 파괴적인 것은 아니다. 부정을 해소하려는 심리적 반응은 파괴적이지만, 그 파괴는 인정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벤저민은 관계와 인정의 문제에서 오는 동요나 긴장이 인간의 정신생활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벤저민이 파괴와 인정의 관계에 주목하면서도, 인정의 어떤 이상을 고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벤저민에게 긴장은 반드시 분열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파괴에 대항하여 분열을 극복하고 공격성을 누르면서 인정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파괴와 인정의 관계는 모호해진다. 버틀러는 주체의 분열이 인정을 추동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헤겔의 자아에 대한 해석을 살펴본다.
상보성에서 오이디푸스 이후의 삼각형으로
벤저민의 상보성 연구는 양자관계에서 점점 삼자관계 수용 쪽으로 전환했다. 벤저민에게 제3항은 한쪽의 부모가 아닌 초월적 이상, 재현을 넘어서는 상호욕망의 기준점을 구성한다. 욕망의 구체적 대타자가 아니라, 욕망관계를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개입·자극·초월하는 대타자의 대타자이다. 버틀러는 이런 식의 접근방식이 치료관계에서 주는 신뢰와 편안함을 인정하지만, 상보성의 원칙에 암시된 이성애적 편견의 위험을 넘어서기 위해 몇 가지 논의를 덧붙인다. 먼저 팔루스에 대해서. 버틀러는 팔루스를 신봉하지 않으며 욕망관계의 제3항으로서 팔루스 개념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팔루스 되기, 팔루스 갖기 등 라캉 계열 논의 차단)
다시 오이디푸스 이전으로 회귀하기 위해 모성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도 양자 관계가 부활된다. 라캉계 페미니스트에 대한 벤저민의 비판은 젠더의 상호배타성과 이성애라는 전제를 향하고 있다. 벤저민은 ‘과포괄성’개념을 통해, 다른 젠더를 거부하지 않으면서 젠더 동일시가 일어날 수 있는 오이디푸스기에 대한 회복을 이야기한다. 일관되지 않은 정체성으로 살 수 있다는 벤저민의 주장은 이상에 가깝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틀이 동성애와 이성애 안의 동성애적 경향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젠더 동일시가 어떤 욕망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나타난다고 말하는 한, 일관된 젠더 논의는 이성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버틀러는 벤저민이 비이성애적 정신분석학 연구를 하고 있다고 보며, 몇 가지를 부연·지적한다.
(a) 삼각관계는 오이디푸스적인 것을 오이디푸스기 이후에 변화시키는 부분으로 유용하게 재고해 볼 수 있다.
(b) 젠더 이형성 논의를 우선시하는 몇 가지 전제는 벤저민의 급진주의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
(c) 과포괄성 모델은 벤저민이 주장하는 차이를 인정할 만한 조건이 될 수 없다.
버틀러는 다시 욕망이 단순히 이원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라캉의 공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오이디푸스기 이후 삼각관계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려 한다. 물론 팔루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가능한 라캉을 초월하려는 방향으로. 라캉은 헤겔에 대한 장 이폴리트의 해설을 재해석하면서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즉 욕망은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은 스스로 배가시키고 쇄신하며 복제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타자가 된다. 욕망은 대타자를 원하고, 대타자는 욕망의 대상으로 이해된다. 다시 욕망이 원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이고, 대타자는 욕망의 주체가 된다. 결국 대타자의 욕망이 주체의 욕망의 모델이 된다.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입장은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교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여성은 대타자의 욕망으로 인해 교환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 여기서 욕망의 주체와 대상은 대타자인 남성들이다. 여자와 여자를 욕망하는 남자의 관계로 보이던 것은 결국 은밀한 동성 사회적 유대였다. 동성애가 아닌 동성 사회적 유대는 이성애를 통해서 표현된다. 이런 주장은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를 사유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팔루스는 누군가에게 소유되는 게 아니라, 이성애와 동성애 회로에서 동시에 순환된다. 버틀러는 이성애와 동성애가 서로를 통해 정의되는 근원적이고 불가피한 방식을 읽어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본다.
욕망과 동일시를 상호배제 관계에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벤저민의 주장은 동성애와 이성애의 동시적 열정을 이해할 여지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어떻게 이성애가 동성애적 열정의 장소가 되는지, 동성애가 이성애적 열정의 전달자가 되는지를 설명할 방법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버틀러는 관계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금지된 욕망의 대상인 제3항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버틀러에게 하나의 욕망은 다른 욕망을 이루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게 아니다. ‘진짜’ 욕망은 따로 없으며, 모순되는 연속적 사건들이 모두 ‘진짜’일 수도 있다. 동성애적 열정과 이성애적 열정은 서로 다른 묶음이 아니라 동시에 발생하며 서로 전달·교차된다.
버틀러는 트렌스젠더 논의에서 이 점이 두드러진다고 본다. 트랜스젠더의 섹슈얼리티는 동성애와 이성애로 구분하기 어렵다. 정체성은 획득되는 과정중이고,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젠더를 분명하게 지칭할 수 없는데, 어떤 기준으로 섹슈얼리티를 주장할 수 있는가? 단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의 성관계를 하기 위해 트랜스젠더가 된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과연 젠더가 섹슈얼리티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전제할 수 있을까? 성전환 과정 중에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트랜스젠더에게는 각자의 쾌락이 있고, 젠더 자체의 목적도 있다.
인정, 그리고 상보성의 관계
벤저민은 젠더 상보성 비평이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험 체계를 세우면서도, 그 대립 범주를 뒤집는 필연적 패러독스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여기서 벤저민이 이성애 관계를 가로지르는 동성애를 설명하는 제3항을 언급하면서도, 다시 젠더 이분법 전제로 돌아간다고 지적한다. 버틀러는 규범적 젠더가 확립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 주목하고 싶어 한다. 상보성은 동성애적 목적 때문에 경계를 넘지는 않는, 자기 지칭적 이성애자를 전제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인정이고, 인정이 다른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 합체와 파괴의 기질을 초월하여 자아를 움직이는 과정이라고 보면 위의 주목은 중요하다.
그러나 벤저민의 주장대로 부정이 파괴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지의 문제도 살펴보아야 한다. 벤저민은 인정에서 일어나는 붕괴를 예측하지만 이 파괴가 극복될 수 있다고 보며, 더 진정한 층위에서 생존이 가능해질 때까지 파괴는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진정한 층위가 인정이며, 파괴성 자체의 초월을 의미한다. 이것은 외부성이 인정되는 ‘대화적 과정’이다. 버틀러는 이 ‘진정한’ 양식의 상호주관적 공간에는 정말로 파괴가 전혀 없는가 하고 묻는다. 또 욕망이 대타자에 대한 욕망임을 받아들일 때, 자아와 대타자를 구분하는 일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대타자를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때, 오히려 대타자를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상 세계를 자기중심으로 바라보지 못함을 인정하는 일이 아닌가? 버틀러는 인정이 그런 겸양의 면모로 나타날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벤저민은 부정의 파괴성과 공격성을 축소하고. 파괴의 결과를 부정이라 본다. 벤저민이 부정을 통해 양자의 변별성을 강조한다면, 버틀러는 이 양자관계를 전제가 아닌 성과물이라고 강조한다. 버틀러는 조화로운 양자관계와 파괴성의 완전한 극복을 믿지 않는다. 벤저민이 파괴의 극복을 최종목표처럼 인식한다면, 버틀러는 자아의 관계성이 분열을 거듭하여 회복될 수 없게 된다고 본다. 버틀러에게 자아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고, 차이는 돌이킬 수 없는 미래로 자아를 내던진다. 버틀러가 보는 자아는 헤겔에게서 비롯된 자아의 탈아적 개념에 기반하며, 자아의 존재를 보장하는 대타자 안에서 늘 자기 길을 잃는 자아 개념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자아는 자율적인 주체 같은 게 아니다. 두 개의 자의식이 서로를 인정하는 ‘주인과 노예’의 순간은 생사를 건 투쟁 속에 있으며, 두 자아는 대타자를 소멸시킬 힘이 있음을 알고 자기 반영성의 조건을 파괴한다. 욕구가 자의식적인 것이 되는 근본적 취약성의 순간에 인정이 가능해진다. 인정은 파괴를 억제하며, 자아는 모든 관계에 앞서 대타자에 양도된다. 자아가 대타자와 맺는 관계의 윤리적 내용은 소유가 아닌 이 ‘양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자아는 스스로 ‘합체’를 거부하며, 대타자를 자신의 내부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버틀러는 벤저민이 ‘분열’과 ‘탈중심화’를 가정하는 포스트모던한 자아 개념을 언급하면서도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의미는 단순히 ‘자아가 분열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아가 자신의 바깥에서 모호하게 설정되었음을 아는 대타자와 맺는 근본적 관계를 말한다. 자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본래는 자족적이었다가 분열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상식의 차원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자아의 존재를 묻곤 한다. 문법에 대한 전통적 요구, 비평적 능력 발달 이전의 요구가 비평적 성찰에 대한 요구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자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자아가 분열행위 이전의 온전한 것이라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 버틀러는 이처럼 관계성에 관해 사유하는 이원적 모델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게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욕망 속에 있는 삼각관계의 반향을 이해하게 도와줄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