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천의 고원> 발제문 - 도덕의 지질학
희음
/ 2016-12-20
/ 조회 2,482
첨부파일
- 도덕의 지질학 발제.hwp 다운 31
관련링크
본문
3. 기원전 10,000년: 도덕의 지질학
- 기원후 2016년: 고통기계, 희음으로부터
<지구1> 지구는 기관 없는 신체이고, 지층은 신의 심판이다. 지층들은 이중 분절이라는 구성적 현상을 나타낸다.
--- 분절은 어떤 질료의 흐름을 기본적인 구성단위로 분할하고 그것을 일정한 형식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구성단위를 ‘실체’라 하고, 그 실체들을 결합하는 규칙을 ‘형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절은 두 가지 층위에서 진행된다. 마르티네에 의하면 그 둘은 1차분절과 2차분절로 나뉘고, 엘름슬레브에 의하면 그것은 ‘내용’과 ‘표현’으로 나뉜다.
저자들은 마르티네의 개념을 그와는 역순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음운론적 최소단위로 분절되는 것을 1차분절로,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로 분절되는 것을 2차분절로 들고 있는 것 같다.
‘첫번째 분절은 불안정한 입자-흐름들, 준안정적인 분자적 내지 유사-분자적 단위들(실체)로 선별하거나 채취한다. 분절은 거기에 연결과 계속의 통계적 질서를 부과한다. 두 번째 분절은 기능적, 밀집적, 안정적 구조(형식)를 수립하며, 이 구조들이 동시에 현재화되는 몰적 화합물(실체)을 구성한다.’
저자들은 챌린저 교수의 입을 빌어 옐름슬레브의 ‘내용’과 ‘표현’ 분절을 설명한다.
“그는 일관성의 구도 혹은 기관 없는 신체, 다시 말해 형식화되지 않고 비유기적이며, 비지층화되거나 탈지층화된 신체와 그 신체를 흐르는 모든 흐름, 즉 원자 이하의, 분자 이하의 입자들, 순수한 강밀도, 전생명적이고 전물리적인 자유로운 특이성들을 질료라고 불렀다. 그는 형식화된 질료를 내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두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러한 질료들이 ’선별된다‘는 점에서 실체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특정한 질서에 따라 선별된다는 점에서 형식이다(내용의 실체와 내용의 형식). 그는 기능적 구조를 표현이라고 불렀는데, 이 역시 두 가지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 고유한 형식의 조직이란 관점과, 그 화합물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실체의 관점이다(표현의 형식과 표현의 실체).”
저자들은 ‘실체’를 두고, 형식화된 질료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토성을 나타내고, 각 분절은 코드와 영토성을 모두 갖는다. 따라서 각 분절은 그 나름대로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지층, 그 모든 곳에, 모든 방면에, 그것들의 내용과 표현 모두에 이중구속과 이중분절의 복수성이 작동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하며 다시금 옐름슬레브를 불러들인다.
“표현의 구도와 내용의 구도라는 용어는... 기존의 통념들에 부합하도록 선택되었으며 매우 자의적이다. 그것의 기능적 정의에 의해서 이 두 거대자 중 어떤 하나를 ‘표현’, 다른 하나를 ‘내용’이라고 해야 정당하며 그 반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내용과 표현은 오직 상호 결속에 의해서만 정의되며,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는 규정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기능에서 상호 대립되는 기능소들로서, 오직 대립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만 정의된다.” ---
기관 없는 신체란 수정란의 상태, 아직 아무것도 완전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어떤 기관으로든 고착화된 것을 가지지 않은 흐름의 상태, 잠재의 상태다. 그런 지구 위에서 지층화가 이루어진다. ‘지층은 질료의 형식을 부여하고, 공명과 잉여성의 체계 속에 강밀도를 가두는’ 하나의 ‘포획’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포획의 형식을 채취함으로서만 그 강밀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건, 지구 역시 지지 않고 이 심판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는 중이라는 점이다.
<지구2> 질료, 즉 일관성(혹은 비일관성)의 구도의 순수 질료는 지층의 외부에 있다.
퀴비에와 함께 비교해부학의 확립에 공헌한, 프랑스의 동물학자인 조프루아 생틸레르는 질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그것이 ‘점점 감소해가는 크기의 입자, 또는 공간으로 방사함을 통해 “스스로 전개되는” 탄력성 있는 흐름이나 유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무한히 분할되는 연소의 과정이 이런 탈주의 예로 적합할 것이다. 전화(電化)는 그 과정의 역방향으로 전개되지만, 그 또한 이중의 집게발이자 이중분절이다. 그것은 ‘비슷한 것끼리의 인력’에 의하는 것이지, 특수한 생명 질료를 갖는 게 아니다. 다만 흐름으로서의 하나의 동일한 질료를 갖는다. 조프루아와 저자들 간의 추상 유령은 지층의 외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부학적 원소들은 특정한 장소에서 분자적 충돌이나 환경의 영향, 혹은 주위의 압력에 의해 억류되거나 제지되어 서로 다른 기관들을 구성할 수도 있지. 그러면 동일한 형식적 관계 혹은 접속들은 완전히 다른 형식과 배합을 실행시키지. 지층 전체에 걸쳐서 실현되는 것은 여전히 동일한 추상 동물이야. 다만 정도가 달라지고, 양태가 바뀔 뿐이지.” 이 추상 유령은 위상학적으로 사고하고, 속도와 강렬도의 유목적 인간에 대해 예시하는, 포갬의 예술가다.
<지구3> 하나의 지층은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이 층에서 저 층으로 옮겨 다닌다. 그것은 이미 다수의 층을 갖고 있다. 그것이 중심에서 주변으로 옮겨가는 동시에 주변은 중심에 반작용해서, 새로운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중심을 형성한다. 흐름들은 끊임없이 외부로 방사되고 되돌아온다.
--- 상태들의 파생과 복수화의 과정을 매개적 상태로 볼 수 있고, 그 또한 매개와 포개짐 혹은 소재들의 새로운 형상들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수준에 대해 수직지층(epistrates, 바깥지층)이라는 개념을 입힌다.
지층과 그것의 토양이 되는 환경의 관계 또한 주요하게 다뤄진다. 지층과 그 외부의 관계. 외부 역시도 단순한 외부, 절대적 외부, 영구적 외부는 아니다. 때로는 그 외부 또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그것을 ‘병합된 혹은 결합된 환경’이라 말하기에 이른다.
‘결합된 환경들은 영양소재와는 다른 에너지원들을 함축한다. 이 에너지원들을 얻기 전에는 유기체가 영양을 섭취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호흡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질식 상태다.’
결합된 환경, 결합된 세계의 대표적 예시가 될 수 있는 것이 진드기의 경우다. 낙하의 중력에너지-땀을 감지하는 후각의 성격-생채기의 능동적 성격, 즉 가지에 올라가서 지나가는 포유류를 냄새로 인식하고 그 위로 떨어져 그것의 피부에 들러붙는 일. 이것을 병렬지층이라 부른다.
‘손-입-혀’를 ‘먹기 위한’ 하나의 수직지층으로 두었을 때, 음식과 맛이라는 외부환경이 손-입-혀를 만나면서 그것의 병렬지층이 되는 것.---
<지구4> 오히려 코드는 탈영토화로부터 존재할 수 있으며, 재영토화는 탈코드화로부터 존재할 수 있다.
바다가 말라버린 자리에서 원시의 어류는 자기 발로 서게 된다. 그리고 그 바다의 물을 자신의 내부에 담게 된다. 탈영토화가 하나의 코드로 구축된 경우다.
또한 누군가 자신만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어내려 한다면 기존의 코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뒤샹은 1917년 <엥데팡당전>에 남자 소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존의 예술작품을 흐르는 코드인, 시간과 노력과 감각의 결정체가 아닌, 떠도는 공산품을 그저 그 장소에 던져놓은 것만으로 그는 시대의 예술가라는 영토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구5> 탈영토화 운동에 질을 부여하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그 본성이다.
그 운동이, 수직지층과 병렬지층을 구성하면서 분절화된 선분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닌, 일관성의 구도의 메타지층을 그려내는, 분해불가능하고 비선분적인 선을 따라 하나의 특이성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특이성으로 도약하는 본성을 가질 때에만, 절대적 탈영토화, 절대적 탈주선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복수적이라 해도, 그것은 일관성의 구도 혹은 기관 없는 신체의 운동이다. 이것은 일관성의 구도 혹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 지층화가 일어난 이후에야 상대적인 것이 된다. 언제나 지층이 잔여인 것이다. 권력, 혹은 이데올로기 등이 탈영토화, 탈지층화라는 일관성의 구도를 앞설 수는 없다.
<지구6> “사람들은 자주 본 것을 말하지만, ‘본 것’은 결코 말한 것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 사물은 말 안에 가두어질 수 없다. 사물은 말을 초과하고도 남는다. 우리는 말을 그에 대응한다고 가정되는 사물에 대립시켜서는 결코 안 되며, 기표를 그와 일치한다고 가정되는 기의에 대립시켜서도 안 된다. 대립되어야 하는 것은 불안정한 평형 혹은 상호전제 상태 속에 있는 상이한 형식화들이다. 내용의 형식들과 표현의 형식들은 관련성이 매우 높으며, 항상 상호전제의 상태에 있다. 양자 간에, 혹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일치하는 일이란 결코 없다. 형식들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도 특수한 가변적 배치를 필요로 한다. 표현의 형식이 기표가 아닌 것처럼, 내용의 형식도 기의가 아니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 관계로부터 출발한 기표의 제국주의 역시 스러져 가야 할 나라다.---
모든 지층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기호체계란 없다. 추상기계는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적 코드화 속에서 지층에 감싸여,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추상기계는 다만 일관성의 구도 속에서만 전개될 뿐이며 기호와 입자 간의 범주적 구별을 갖지 않는다.
‘감옥’은 하나의 형식이지만 내용과 표현이 독립되어 별개의 지층을 이루게 되는 유형의 이중분절을 포함하고 있다. 감옥이 내용의 형식이라면 이와 상관적인 표현 형식은 비행이지만, 감옥은 비행이란 ‘기표’의 ‘기의’가 아니며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도 아니다. 법 내지 정상성에서 벗어난 행동들의 집합을 그런 말을 표현한 것일 뿐. 비행 자체는 또한 그 행위를 범죄로 간주하고 평가하는, 강간, 강도, 절도 경제범죄 등의 말로 표현되는 표현 형식을 갖지만, 동시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양상을 내용의 형식으로 갖는다. 한편 감옥은 특정한 형식의 건축물과, 수형자를 다루고 감시하는 간수들을 내용의 형식으로 갖지만, 또한 독방, 혼거방, 절도방, 폭력방, 혹은 면회, 운동, 배식, 식구통 등과 같은 고유한 언표들을 표현의 형식으로 갖기도 한다. 한편, 감옥은 소년원 검찰청, 교정국 등과 같은 바깥지층을 갖고 범죄자, 수인, 교도관 등과 같은 병렬지층을 갖는다.
<지구7> 내용과 표현의 서로 다른 형상들은 단계가 아니다. 어느 곳에나 동일한 기계권만이 존재한다.
지층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어떤 지층들은 서로에게 우위로 자리할 수 없다. 한 지층이 어떤 지층과 소통할 것인지, 어떤 쪽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것도 미리 알 수 없다. 그들이 갖는 일관성의 구도는 모든 비유를 지우고 오직 현실적인 것만으로 구성된다. 수준의 차이나 크기 또는 거리의 질서상의 차이를 무시한다.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간의 차이를, 내용과 표현 간의 차이를, 형식과 형식화된 실체 간의 차이를 무시한다.
일관성의 구도의 고유한 세 요인들은 강렬도의 연속체, 입자 혹은 기호-입자들의 결합적 사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통접이다. 이들은 추상기계에 의해 작용하며 탈지층화한다. 여기에는 규칙들이 있다. 구도화의 규칙과 다이어그램화의 규칙. 이는 뒤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보이게 될 것이다.
<지구8>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 전개되거나 지층에 감싸여지는 한, 모든 면에서 기계적 배치들은 추상기계를 실행시킨다.
--- 1. 기계적 배치는 한 지층 위에서 내용과 표현의 상호적응을 수행하고, 내용의 선분들과 표현의 선분들 간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을 보장하며, 지층이 수직지층들과 병렬지층들로 분할되도록 유도한다.
2. 지층들 간에서 그것은 하부지층으로 복무하는 것들 간의 관계를 보장하며, 이에 상응하는 조직상의 변화들을 유발한다.
3. 일관성의 구도로 나아간다. 특정한 지층 위에서, 지층들 사이에서, 그리고 지층들과 구도 간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추상기계를 실행시키기 때문이다.---
기계적 배치가 지층들 간의 관계를 조절하고, 각 지층의 내용과 표현을 조절하는 한, 그것은 간지층이다. 또한 그것은 일관성의 구도와 접촉하며 필연적으로 추상기계를 실행시키므로 메타지층이기도 하다. 각 지층에 감싸인 채 존재하며 에쿠메논(세계적인 수준에서의 통합성 내지 보편성)을 정의한다.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 그 탈지층화를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플라노메논(일관성의 구도로 인도하는 것)적이기도 하다.
<지구9> 이제 모두가 떠나는 중이다. 희음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그의 그림자는 시계모양인지 관 모양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희음 자신이다. 희음은 그렇게 흐물흐물해지며 일관성의 구도를 향해 스스로 빨려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