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알렙 - 죽지 않는 사람들, 죽어 있는 사람, 신학자들 발제
가이아
/ 2016-12-22
/ 조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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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죽지 않는 사람들 =
‘호머와 나는 탄지에 항구 어귀에서 헤어졌다. 나는 우리들이 서로 이별의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죽음 또는 그것에 대한 유혹은 인간을 소중하고 애상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인간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환영적인 존재 조건 때문에 가슴 뭉클해한다. 인간이 행하는 각 행동은 그들의 마지막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마치 꿈에서의 어떤 얼굴처럼 흩어져 버리는 운명을 가지지 않는 얼굴은 결코 없다. 죽음의 운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복원이 불가능하며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가치를 소지하고 있다.’
단 한번도 불사를 꿈꿔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작품 속의 혈거인들처럼 될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드랴큘라처럼 나른하고 무심한 허무주의자의 모습이거나 신선처럼 술과 바둑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이었다. 기록 속의 주인공이 발견한 죽지 않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세운 도시의 모습은 <너무도 기괴스러워 동떨어진 사막의 한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것이 존재하고 영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도록 만들고, 한편으로는 천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것이 영속하는 한 세계의 그 어떤 누구도 용맹스러울 수 있거나 행복할 수가 없다.> 그 도시는 그들이 모든 외재적 노고라는 게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이상은 물질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아주 가끔 기이한 자극에 의해서… 그날 아침의 비처럼 아주 원초적인 희열을 느낄 때 뿐이다.
= 죽어 있는 사람 =
벤하민 오딸롤라… 굽힐 줄 모르는 용기 외에 다른 덕목을 가지고 있는 않은 한 비장한 싸움꾼,브라질 국경에 있는 말 탄 사나이들이 난무하는 사막으로 들어가 밀수꾼들의 두목이 되었다가 리우 그란데 두 술의 교외에서 한 발의 총탄에 맞아 죽다. 누군가의 한 생을 표현하는데 트위터가 허용하는 길이 140자로 족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박이나 음악이 그러하듯 순전히 위험 자체의 맛에 끌리고, 다른 나라의 남자들이 바다를 예감하고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발굽 아래에서 메아리를 울리는 지칠 줄 모르는 평원을 그리워하는 사람. 오딸롤라는 두목이 백발과 피로와 쇠약함으로 범벅된 늙은이라는 것을 알고 두목이 가진 모든 것 - 흑색 발목을 가진 빨간 말과 금속판으로 도금한 마구와 찬란한 빛을 내는 머리를 가진 여자를 원하게 된다. 우주가 그와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고 우주가 사건의 진행을 독려하는 것처럼 그는 싸움에서 승리하고 두목의 적토마를 타고 돌아와 두목의 여자와 잠을 잔다. 끝간 데 없는 환희와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인 바로 그 순간 세상은 그를 배신하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살아 있으나 삶에 대한 선택권을 잃은 죽어 있는 사람이었기에 사랑과 지휘권과 승리가 허용됐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신학자들 =
<그대들은 장작더미가 아닌 불로 미로를 태우고 있는 것이니라. 나를 태웠던 모든 불들이 여기에 모인다면 지구에서 그치지 않고 천사들의 눈까지도 멀게 되리라., 나는 이 말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했었노라>
역사의 반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후안 데 빠노니아의 논리 정연한 논박이 역사는 순환적이고 과거에 없었거나 미래에 없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무변교 교주 에우포르부스에게 화형을 언도하고, 몇 년 후, 역사의 반복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혼란을 가져오는 어릿광대교를 논박하기 위한 아우렐리아노의 논문이 후안 데 빠노니아의 명제를 인용하면서 무변교를 거부하기 위한 후안의 노력이 어릿광대교를 옹호하는 아이러니에 빠져 결국 화형을 선고 받게 된다. 아우렐리아노는 같은 편에서 같은 신앙을 가지고 같은 적과 싸웠으나 깊이 증오했던 사람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지켜보면서 누군가의 얼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몇 년 후 히베르니아의 오두막에서 번개에 맞아 후안과 같은 방식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