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고원] 4장 발제문 (12/23)
삼월
/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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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공준
언어학의 네 가지 공준 (혹은 가설, 나아가 오류)
1. 언어는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리라
2. ‘외적인’ 어떤 요소에 호소하지 않는, 언어라는 추상적 기계가 존재하리라
3. 언어를 동질적인 체계로 정의할 수 있게 해 줄 보편성과 항성성이 존재하리라
4. 다수적인 혹은 표준적인 언어 아래에서만 언어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1923년 11월 독일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사상최고치를 찍었다. 1914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마르크화를 마구 찍어내기 시작했다. 1918년 황제가 망명하고 임시정부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베르사유조약에서 승전국들은 독일에 전쟁배상금으로 1,320억 마르크를 요구했다. 독일정부는 사실상 파산상태였고, 화폐를 계속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은 점점 가속화되었다. 1923년 독일 물가는 10년 전에 비해 10억 배 상승했고, 1달러는 4조 2,000억 마르크에 거래되었다. 지폐뭉치는 땔감이나 아이들 장난감으로 사용되었다. 은행에 예금한 전 재산을 잃은 독일 국민의 분노는 유대인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혐오를 가중시켰다. 이런 상황은 동네 양아치 패거리나 다름없던 나치와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1. 언어는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리라
언어에는 잉여로 따라붙는 것이 있다. 바로 명령이다. 문법의 규칙은 명령이며, 권력의 표지이다. 언어활동은 삶이 아니라, 삶에 명령/질서를 주는 것이다. 모든 명령-어에는 우리 삶을 결정내리는 판결이 들어있다. 이야기의 본질은 소통이 아니라 들은 것의 변환이다. 그러므로 모든 담론은 들은 것을 전달하는 것, 즉 간접화법이다. 언어활동이 기호가 아닌 말들의 전달에 불과하다면, 언어는 정보도 아니고 소통도 아니다.
언표와 행동 간에는 내재적인 어떤 관계가 있다. 이런 언어의 수행적 영역은 언어활동을 코드로 간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명령·질문·약속·확언은 행동을 수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언어에서 화용론를 떼어낼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언어-발화 간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언어(langue)는 발화(parole)에서 떼어내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수행을 동반하는 발화수반행위는 집합적 배치에 의해 설명되고, 이 배치와 행위가 주체화를 분배한다. 결국 주체화는 일차적인 게 아니라 복합적 배치의 결과일 뿐이다. 명령-어는 관계를 전제한다. 명령-어는 ‘사회적 강제’에 의해 언표에 연계되는 모든 행위와 관계가 있다. 모든 언표는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연계를 보여준다. 결국 언어활동은 암묵적 전제들과 화행들의 집합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언표와 행동의 관계는 내적이고 내재적이지만, 동일성은 없다. 동일성 대신 잉여성이 있다. 명령-어는 행위와 언표의 잉여성을 보여준다. 언표는 잉여로 명령을 전달하면서, 지배적 의미작용과 질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개인적인 언표행위는 있을 수 없고, 언표행위의 주체도 없다. 문제는 언표행위의 필연적 사회성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집합적 배치에는 담론 안에서 개인성을 소환하고 분배를 결정해주는 배치가 존재한다. 이 간접화법이 담론 안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나타나면서, 말 안에서 명령-어를 설명해준다. 중요한 것은 언표 행위의 집합적 배치이다.
집합적 배치에 대해 말하려면 명령-어를 만들어내는, 언어활동에 내적인 행위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 행위는 사회의 비신체적 변환의 집합이고, 사회의 신체에 귀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신체를 변환시키는 능동 혹은 수동은 비신체적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화폐적 신체가 다른 신체들을 변용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물질적 자산인 신체가 비신체적인 기호의 변환을 가능하게 했다. 배치는 끊임없이 변화되며, 그 자체로 변환에 종속된다. 명령-어야말로 낱말 그 자체를 언표행위로 만드는 변수이며, 신체적 변환의 관계 속에서 변이를 가능하게 해 준다. 화용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며, 화용론 외부에는 언어학에 관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2. ‘외적인’ 어떤 요소에 호소하지 않는, 언어라는 추상적 기계가 존재하리라
신체적 변용과 비신체적 변환의 집합을 구별하면서 두 가지 형식화를 마주하게 된다. 내용과 표현이라는 형식화이다. 두 형식화는 동일한 본질을 갖지 않으며, 각각 이질적이고 독립적이다. 두 형식은 화행을 통해 서로 개입하면서, 서로의 독립성을 확인해준다. 언표행위의 배치는 사물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사물의 상태나 내용의 상태와 동일한 수준에서 말한다. 그리하여 동일한 x가 신체, 혹은 행위나 명령-어를 이루는 기호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곳은 두 형식의 상호전제 위에서 개입이나 삽입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두 형식은 모두 탈영토화와 분리될 수 없다. 각각의 형식은 탈영토화의 정도에 따라 서로 결합하고 촉진하거나, 반대로 재영토화를 작동하면서 안정된다. 여기서 탈영토화의 정도가 상황이나 변인이다. 1923년 11월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화폐적 신체를 탈영토화했으나, 화폐의 변화라는 재영토화를 통해 기호적 변환을 야기했다.
내용과 표현이라는 형식을 통해 배치의 성질을 말할 수 있다. 배치는 내용과 표현이라는 두 개의 선분을 포함한다. 수평적 측면에서 보면 한편에서 그것은 기계적 배치이고, 신체의 혼합이다. 다른 한편에서 행위와 언표의 집합적 배치이고, 신체에 귀속되는 비신체적 변환이다. 다시 수직적 측면에서 보면 한편에서 그것은 안정화를 위해 재영토화된 배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제거하는 탈영토화의 첨단점이다. 배치의 절합은 각 형식들의 탈영토화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회적 장은 그 내부의 갈등이나 모순보다는 그것을 횡단하는 탈주의 선에 의해 정의된다.
들뢰즈-가타리가 언어라는 추상기계의 정립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기계가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추상이 진전된다면, 언어학에서 비언어적 요인을 분리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진정한 추상기계는 배치 자체와 연관되며, 배치의 다이어그램으로 정의된다. 내용은 기의가 아니고, 표현은 기표가 아니다. 내용과 표현은 모두 배치의 변수들이다. 내용과 표현의 변수들도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구도의 가변성은 형식의 이원성 위에 군림하며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3. 언어를 동질적인 체계로 정의할 수 있게 해 줄 보편성과 항성성이 존재하리라
언어학의 본질은 구조의 불변성을 내세워 언어학이 순수한 과학임을 말하거나, 혹은 과학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님을 말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추상기계에는 보편성이나 항상성을 증명할 무엇도 없다. 촘스키와 라보프 사이의 토론에서, 라보프는 내재적 변이를 부각시킨다. 라보프는 언어학이 변인들에게 상이한 체계를 부여하거나, 변인들을 구조 외부에 두는 것을 거부한다. 라보프에게는 변이 자체가 체계적인 것이다. 오히려 모든 체계는 변이 속에 있으며, 특정한 방식으로 규제되는 가변성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언어학적 변화는 체계적 단절보다는 주파수의 점진적 변용이나 상이한 용법의 공존과 연속성에 의해 발생한다.
화용론은 언어 내적인 것으로서 언어학적 변이를 포괄하며, 여기에는 ‘환원’을 추구하는 경향이 언제나 존재한다. 내용의 유사상수를 추출함으로서 나타나는 이런 환원의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변이화이다. 명령-어와 불연속적인 변수를 위한 연속적 변이. 문체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적인 연속적 변이의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문체는 개인적 심리의 창조물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배치이며, 언어 안에서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문체는 필연적으로 외재적 원천에서 온다. 문체는 언어활동 자체를 더듬거리게 하고 모든 언어학적 요소를 변이시키면서 새로운 잉여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언어 안에서 이방인이 될 때 문체는 언어가 된다. 언어의 추상기계는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특이적이다. 현재적이진 않지만, 잠재적-현실적이다. 그것은 불변적 규칙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이와 함께 하는 임의적 규칙이다. 또한 추상기계는 배치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4. 다수적인 혹은 표준적인 언어 아래에서만 언어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문법성은 권력의 지표이며, 언어의 통일성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다. 모국어는 없으며, 지배적 언어를 통한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항상적인 것을 말하고 항상적 관계를 추출하려는 과학적 시도는 언제나 명령-어를 전달하는 정치적 시도와 겹쳐 있다. 여기서 다수성과 소수성은 권력이 아니라 변이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한 언어가 다수적 언어의 특징을 많이 가질수록 그것을 소수적 언어로 옮기는 연속적 변이에 더욱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결국 다수어조차도 내재적 변이와 무관할 수 없다.
사실은 두 가지 종류의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한 가지는 상수와 항상적 관계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가변적인 것을 처리하고, 다른 한 가지는 연속적 변이의 상태 속에 놓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항상적인 것이 가변적인 것과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적인 것은 가변적인 것으로부터 나온다. 다수적, 소수적인 것인 두 가지 종류의 언어 규정이 아니라, 언어의 두 가지 용법 혹은 기능이다. 소수어를 특징짓는 것은 빈곤함이 아니라, 표준어의 소수적 처리 혹은 다수어의 소수어-화 같은 절제와 변이이다. 문제는 다수어와 소수어를 구별하고 방언이나 은어를 재영토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어를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소수어는 다수어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는 자신의 다수어를 소수어로 만들어야 한다. 위대한 저자들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정복하고 연속적 변이의 상태에 두기 위해 다수어의 사용을 절제했다.
소수성과 다수성의 대립은 양적인 대립이 아니다. 다수자는 스스로 권력과 지배의 상태를 전제하고, 척도를 전제한다. 그러나 추상적 척도 안에서 분석적으로 포착되는 한, 다수자는 어떤 누구도 아니고 언제나 아무도 아니다. 반면 소수자는 잠재적으로 만인이 된다. 다수적 ‘사실’에는 해당자가 아무도 없고, 이는 모든 사람을 소수화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문제는 다수성을 획득하고 새로운 상수를 세우는 게 아니다. 동질적이고 항상적인 체계로서 다수적인 것과, 창조적인 잠재적 생성으로서 소수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수적 생성은 없으며, 다수성은 생성이 아니다. 모든 생성은 소수적이다. 소수어와 다수어를 구별하는 것처럼, 소수화되기와 다수적 언어를 구별해야 한다. 해당자가 없는 다수적 사실에 대립하여 만인의 소수화되기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연속적 변이이다.
다수적 양식과 소수적 양식은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다. 다수적 양식은 항상적인 것을 추출하고, 소수적 양식은 연속적인 변이화를 통해 성립된다. 이때 명령어는 이중적 방향을 고려할 수 있는 유일한 ‘메타언어’이다. 명령-어는 명령받는 자의 삶을 결정내리지만, 거기에는 경고의 외침이나 탈주의 전언 같은 것들이 함께 들어 있다. 명령-어는 두 가지 어조를 함께 가지고 있다. 죽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축소하며 죽음 자체를 변이로 만드는 일이다. 문제는 명령-어에서 탈출하는 게 아니라 명령-어가 내리는 (사형)선고에서 어떻게 탈출하는가이다. 탈주의 능력을 발전시키고, 명령-어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지하고 되살리는 일이 필요하다. 도피하지 말고, 탈주하고 창조하기 위해. 동일한 사물, 동일한 말은 이중적 성질을 가지므로, 우리는 명령/질서의 구성을 이행의 성분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