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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안전, 영토, 인구 3강 발제 +1
아라차 / 2016-12-15 / 조회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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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_안전, 영토, 인구 3강 발제_아라차

푸코가 안전장치와 규율장치의 구별을 강조하는 것은 더 이상 권력자=지배자, 권력=(신)유일자=타자 공식을 긍정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규범화와 정상화

정상화라는 것을 규율과 안전이 각각 어떻게 다르게 다뤘는지 보자. 규율은 정상과 비정상을 분할한다. 정상적인 것은 규범에 부합할 수 있는 능력이고, 비정상적인 것은 무능력이다. 규범에는 원래부터 명령적 속성이 존재하며, 규범과 관련해 정상과 비정상이 결정되고 포착된다. 정상에 비해 규범이 먼저 존재하는 것, 즉 규율적 정상화는 규범을 출발점으로 삼아 최종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의 분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정상화라는 관점에서 안전장치는 어떻게 다뤄졌는가. 식량난의 예에서도 살펴봤듯이 식량난을 막으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현실적 요소들을 작동시켜 식량난 현상이 스스로 소멸되게 만들려고 했다. 1720년대 천연두 접종의 예를 보면 천연두 접종이 천연두를 억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천연두에 감염되도록 만들었다. 이 인위적 감염을 통해 증상이 약한 병을 얻고, 나중에 있을 수 있는 천연두의 다른 침입을 막았다. 식량난과 동일한 유형의 안전메커니즘이다.

새로운 개념(사례, 재해, 위험, 위기)의 출현

이런 안전장치가 일반화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해지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첫째, 사례라는 개념. 병이라는 집단적 현상을 개별화하는 방식, 개별 현상을 집단적 영역 내부로 통합시키는 방식이다. 둘째, (재해?)각각의 연령대에 어떤 특수한 위험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일종의 위험도. 셋째, 위험도의 차이가 발견되면서, 위험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마지막으로 위기라는 개념. 상위의 자연적인 메커니즘이나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저지될 수 있는 순환적인 폭주현상.

규율에서와 안전장치에서의 정상화 형식

예전에는(규율체계 하에서는) 병에 걸린 주체를 무력화하거나 격리시켰다. 치유하거나 더 이상의 감염을 막는 게 목표였다. 천연두 접종 이후(안정장치 하에서는)에는 병에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인구로 고려했다. 인구의 개연적인 발병률이나 사망률 등 평균값을 확인하려고 했다. 정상적인 발병률과 사망률이라는 개념을 얻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두 번째 목표는 소위 정상적인 것,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된 발병률‧사망률과 관련해 그 각각에 결부된 상이한 정상성을 서로 분리할 수 있는 더 섬세한 분석을 달성하려고 했다. 예방의학은 서로 다른 정상성을 차별적으로 다루고 이 정상성을 저 정상성에 맞춰 평준화하려는 수준에서 작동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규율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체계이다. 규율체계는 규범에서 출발했고, 그 규범에 따라 행해진 훈육과 비교하고 나서야 정상과 비정상이 구별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안전장치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포착, 상이한 정상곡선의 포착이 이뤄진다. 그리고 상이한 정상성의 분포가 상호작용하도록 만들고, 가장 부적합한 정상성을 가장 적합한 정상성에 근접시키는 식으로 정상화가 가동된다.

인구의 통치라는 새로운 정치테크놀로지

지금까지 살펴 본 도시, 식량난, 전염병의 예는 매우 가시적이고 명시적인 상호관계가 있다. ①이 모든 현상은 도시 자체의 현상과 연관이 있다. 식량난과 곡물의 문제는 시장-도시의 문제이고, 감염과 전염병의 문제는 발병 장소로서의 도시문제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도시 문제가 다양한 안전메커니즘 사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안전테크놀로지의 출현은 도시가 새롭고도 특수한 정치적‧경제적 문제와 통치기술의 문제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도시는 봉건제도의 영토적 권력체계 안에서 늘 예외였고, 어느 정도 가능성과 권리, 자치권을 인정받는 자유도시였다. 영토와 관련해서는 거의 자율구역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권(권력)을 도시에 어떻게 행사해야 할까? 영토보다는 도시가 일차적 문제로 등장한 이 역전 현상은 안전메커니즘을 통해 설명될 수밖에 없다.

도시, 식량난, 전염병 문제에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순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 무엇인가를 순환시키거나 순환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까지 주권, 주권이라는 형식에 묶인 정치권력의 전통적 문제는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거나 정복이 끝난 영토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영토의 안녕, 영토 위에 군림하는 주권자의 안녕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문제였다. 푸코는 마키아벨리가 정치사상의 근대를 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어떤 시대의 종말을, 군주와 그 영토의 안녕을 문제삼던 어떤 시기의 정점을 표시했다고 생각한다.) 영토를 고정하거나 구획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이 일어나도록 놔두는 문제, 즉 순환을 관리하고 좋은 순환과 나쁜 순환을 가려내고, 항상 이러저러한 것이 움직이고 이동하면서 옮겨지도록 만드는 문제가 등장한다. 단, 이 순환에 내재하는 위험성을 없애는 식으로. ②이제는 군주와 영토의 안녕이 아니라 인구의 안전, 인구를 통치하는 자들의 안전이 문제가 된다.

안전메커니즘은 개인들이 주권자에게 전면적‧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주권자-신민의 관계축에 접속하지 않는다. 중농주의자들이 말한 물리적 과정, 자연적 과정이라거나 현실의 요소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과정과 접속된다. 현상을 금지하는 법을 부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수용가능한 한도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법률메커니즘이나 규율메커니즘과는 달리 안전메커니즘에서 통치행위가 적절해지는 수준은 사실은 구체적인 개개의 신민들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현상과 과정을 동반하는 인구의 수준이다. ③이제 개개인을 줄기차게 감시하는 형식(판옵티콘)이 아니라 개인적인 현상이 아닌 특수한 현상을 통치나 통치자들을 위해 뭔가 적절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인구의 통치는 개인의 세세한 것에까지 미치던 주권의 행사와는 완전히 다른, 서로 완전히 다른 권력의 경제이다.

중상주의자와 중농중의자가 본 인구문제

한편으로는 완전히 다른 권력의 경제가,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인물이 문제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새로운 인물은 이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인지되지도, 뚜렷이 드러난 적도 없다. 바로 인구다. 본래 포플라시옹은 인구감소, 디플라시옹의 반대말이었다. 대재앙으로 사망률이 극적으로 높아질 때 필요했던 개념이었던 것. 인구 개념의 실정적 가치는 주권자의 힘을 이루는 요소로서 평가될 때였다. 사태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이다.

(17세기)중상주의자들은 인구를 본질적으로 생산력으로 간주한 사람들이다. 중상주의자들이 인구는 부와 힘의 원천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에, 중농주의자들은 더 미묘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중상주의자들은 인구문제를 여전히 주권자-신민의 축에서 고려했다. (18세기) 중농주의자들에게 인구는 더 이상 법권리의 주체를 모아 놓은 어떤 것, 주권자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는 온순한 의지들의 집합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구는 일련의 절차들, 그 절차들 안의 자연적인 부분에서부터 출발해 그 안에서 관리되어야 할 절차들의 집합으로 여겨지게 된다.

인구를 신민의 사법적‧정치적 개념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관리와 통치의 기술적‧정치적 대상으로 지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①인구는 단순히 일정한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총합도 아니요 인구자체를 조장하거나 설계할 수 있는 주권자의 상대자도 아니다. 인구는 일차적인 소여가 아니라 일련의 변수에 의존한다. 인구는 기후, 환경, 무역, 부의 순환, 법, 조세, 인습, 가치관, 특히 식량에 따라 변한다. 주권자-신민의 관계에서 법의 한계는 신민이 ‘싫다’고 하면 끝이지만 통치와 인구의 관계는 단순히 거부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구는 주권자의 법률적 의지와 관련해 일종의 빽빽한 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인구의 자연성은 변형의 동인과 기술에 늘 열려 있다. 단, 그 변형의 동인과 기술이 설명, 고찰, 분석, 계산, 예측가능한 것이라는 조건에서 말이다. 인구증가를 촉진시킨다거나 국가의 자원/국력과 제대로 관계를 맺게 하려면 인구 자체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요인/요소를 작동시켜야 한다. 통화, 수출, 수입의 예.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기술의 등장을 보게 된다. 신민을 권력에 종속시켜 복종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구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나 계산, 분석, 고창 등을 통해 사실상 인구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아낸 것들을 포착하는 기술이다. 푸코는 권력의 조직화/권력 행사의 합리화에 매우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이 인구의 자연성(본성/특성?)이라고 생각한다.

②인구를 하나의 전체로 본다면 인구를 움직이는 행동의 원동력은 단 하나다. 욕망! 욕망은 ‘양심지도’에 사용된 낡은 개념인데 이제 권력과 통치의 기술안으로 유입되어 재등장한다. 욕망의 작동을 통한 집단적 이익의 생산, 바로 이것이 인구의 자연성뿐만 아니라 이 자연성을 관리하는 데 사용되는 수단들이 지닐 수 있는 인위성을 특징짓는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어떤 개인의 욕망이든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정당화의 근거이다. 중농주의자들은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어떤 정당성에서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돼”라고 말할 수 있는가가 통치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기애/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겨 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로 이것이 모든 공리주의 철학의 모태이다. 공리주의 철학은 인구의 통치라는 당시의 신제품을 지지하는 이론적 도구가 됐던 것이다. ③인구의 자연성은 여러 현상의 항구성 속에서도 출현한다. 불규칙해야만 할 것 같은 현상도 알고 보면 규칙적이라는 것.

인구에 고유한 여러 효과를 고려하거나 적절하게 만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권력기술의 영역에 일종의 자연이 들어온 것이다. 인구의 자연(본성)은 주권자가 그 안에서, 그것의 도움으로, 그것에 대해 숙고된 통치의 절차를 펼쳐야 하는 그런 자연(본성)이다. 이제 인구란 한편으로는 인종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중Public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푸코는 인구를 논의하면 할 수는 ‘주권자’라는 말보다 ‘통치’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통치가 규칙과 관련해 행사하기 시작한 특권, 통치가 본래 주권이나 군림이나 황제권보다 더 근대적인 정치의 문제였다는 사실, 이것이 전적으로 인구와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지식 내부의 변화조작자로서의 인구 : 부의 분석에서 정치경제학으로, 자연사에서 생물학으로, 일반문법에서 역사적 문헌학으로

인구라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출현했고, 이와 함께 법적/정치적/기술적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나 인구라는 동일한 문제가 지식의 계열 전체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정치경제학의 예. 인구라는 주제-객체가 부의 분석에 도입되어 경제적 성찰과 실천의 영역을 뒤흔드는 효과를 야기했을 때 더 이상 부의 분석이 행해지지 않고 정치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의 영역이 열렸다. 인구문제가 정치경제학적 사유에서 근본적인 문제임을 증명한 것은 맬더스와 맑스의 대립이다. 맬더스는 인구가 본질적으로 생물-경제학적 문제였던 반면 맑스는 인구 개념 자체를 배제하려고 했다. 맑스는 계급/계급대립/계급투쟁의 역사-정치적 형식으로 재발견했다. 인구냐 계급이냐. 여기서 경제적 사유, 주체-인구가 도입됨으로써만 가능했던 정치경제학적 사유에 근거해서 단절이 일어난 것이다.

자연사와 생물학의 예. 자연사는 생명존재의 특성을 분류해 일람표를 배치하던 것에서 유기체의 내적 구성을 분석하는 것으로, 유기체와 생명환경의 구성적/조정적 관계로 옮겨갔다. 찰스 다윈에서는 유기체와 구성적 관계를 맺는 생명환경에서 개체군(인구)로 옮겨갔다. 생물체의 분석에 있어 개체군이라는 문제설정은 자연사에서 생물학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한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일반문법에서 역사문헌학으로의 이행. 문헌학은 집단적 주체로서의 인구가 역사 속에서 그 자신이 아니라 언어의 고유한 규칙성에 따라 자신이 말하는 언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이 문제가 됐을 때 비로소 탄생했다.

이처럼 모든 지식체계를 뒤흔들어 생명, 노동과 생산, 언어의 과학을 이끌어낸 조작자를 찾으려면 인구를 봐야 한다. 변화는 권력기술과 그 대상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해 인구와 그것의 특유한 현상을 현실에서, 현실의 영역으로서 서서히 뚜렷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인구가 권력기술의 상관물로서 구성됐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만 우리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일련의 영역 전체가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19세기의 휴머니즘에 의해 고찰된 인간은 인구의 한 형상에 불과하다. 권력의 문제가 주권 이론 내에서 정식화되는 한, 주권 앞에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법권리의 주체라는 사법적 개념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반대로 주권이 아니라 통치나 통치술 앞에 인구가 있었던 순간부터 인간과 인구의 관계는 법권리의 주체가 주권자와 맺었던 관계와 똑같아졌다고 생각한다.

댓글목록

라차님의 댓글

라차

3강 발제 올립니다.
쉬운 듯 하면서도 명쾌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울 세미나원들이 명쾌하게 해 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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