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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폴란드 문학 12/14 후기 +4
주호 / 2016-12-18 / 조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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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릭 시엔키에비츠의 '등대지기',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파문은 되돌아온다'와 '모직조끼' 세 편을 읽었다. ​러시아 편을 읽을 때는 작가들 이름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는데 이번 폴란드 편은 이름을 틀리지 않고 읽는 것 자체가 난관이었다. 

 

 

첫번째로 읽은 작품은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등대지기'였다. 주인공 스카빈스키 노인은 폴란드 11월 봉기 이후 조국을 떠나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굵직굵직한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함께 했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도 참여했었고 심지어 포경선에서 3년 동안 일한 적도 있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스카빈스키들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태평양전쟁과 해방을 겪고 현대사의 그 수많은 굴곡을 몸으로 겪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포레스트 검프로, 알런(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스카빈스키로 자주 변주된다. 등대지기로 취직해 끊임없는 방랑을 멈추고 이제는 쉬고 싶다고 말하는 스카빈스키 노인의 말은 그래서인지 더 짠하게 다가온다.​ 등대지기로 취직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하는 스카빈스키 노인에게 영사는 "실수는 곧 해고를 의미"한다고 경고한다. 이미 그 순간 스카빈스키의 실수는 예정되어 있었다. 다만 실수를 하고 다시 방랑하게 된 스카빈스키의 품에 소중한 보물, 폴란드어로 된 시집이 있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나는 가끔 다른 어떤 언어도 아닌 한국어로 소설을 쓴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다른 언어에 능통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어만큼 서사전달에 적합한 언어가 또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한국어를 쓰는 나라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새삼 감사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이탈리아 남부의 포지타노에 가는 길에 해안도로에 잠시 차를 정차하고 절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었다. 그때 그 해안도로를 따라 심어진 선인장의 손바닥만한 잎에 한국어로 새겨진 이름들을 보며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먼 타국에서 만난 한국어 단어들이 나는 심하게 낯설고 어려웠다. 그 이름 안에 담긴 정서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국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감사함이 되기도, 부끄러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그래서 자신에게 배달되어 온 폴란드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스카빈스키 노인을 보며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게 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나는 코스모폴리탄, 세계인이다"라고 말하는 '파문은 되돌아온다'의 페르디난트에게 공감하는 것은 내가 근현대사의 그 굴곡들을 몸으로 겪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파문은 되돌아온다'의 아들러와 페르디난트 부자는 욕망에 지나치게 솔직하다. 아버지 아들러는 빈곤했던 젊은 시절이 있기 때문에 돈에 집착한다. 자신은 돈을 버느라 마음껏 즐기지 못한 인생을 아들 페르디난트가 대신 살아주길 바란다. 페르디난트는 한번도 빈곤해본적이 없다. 아버지가 벌어놓은 돈을 흥청망청 쓰는 삶에 익숙하다. 아들러의 절친한 친구인 뵈메 목사는 친구의 잘못에 대해 지적하고 설교하지만 그때마다 안경이 없어 논리적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 대신 친구의 아들과 자신의 아들을 비교하며 직업학교에 다니는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성실한가에 대해 안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경없이는 설교하지 못하는 목사라. 누군가가 써준 연설문 종이 없이는 논리적으로 말할 줄 모르는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은 과한 것일까. 저수지에 던진 돌멩이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파문이 저수지 가장자리에 닿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듯 아들러가 자신과 아들을 위해 한 이기적인 행동들이 커다란 파문이 되어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이 소설의 명백한 주제의식이 와 닿지 않는 것은 내가 한번도 파문이 되돌아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러와 페르디난트 더불어 고스와프스키의 불행은 차라리 인과율이라는 단어와 더 가까운 듯하다. 

 

 

같은 작가의 '모직조끼'는 명백히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과 닮아있다. 부부가 서로를 위해 착한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사실 흔하디 흔한 이야기이니 두 작품이 닮아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모직조끼에 얽힌 이 슬픈 이야기가 나는 어쩐지 '파문은 돌아온다'의 고스와프스키와 그 부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서로 다른 작품에 나오는 두 부부의 이야기가 서로 닮았다는 것은 두 작품이 같은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시절을 살았던 소시민들의 삶이 모두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모직조끼의 부부와 고스와프스키 부부를 연결시킬 수도 있군요.
맞아요. 두 부부의 이야기에서 남편의 죽음은 우리를 안타깝게 했지요.
아마도 우리의 가족 이야기를 거기서 떠올렸기 때문일 거예요.
'파문은 되돌아온다'도 재미있었지만. 저는 '등대지기'에 대해 우리가 나눈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식민지 경험의 잔상으로 남은 과도한 애국심, 그리고 이에 대한 거부감이었지요.
사건이 많은 시절이라 소설 속 이야기들을 단지 소설로만 읽게 되지는 않는 요즘입니다.
그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자리라 좋았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나눌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주호님 발제 덕에 폴란드의 근현대사까지 간단하게 알게 되어 좋았고, 소설 읽기에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호님의 댓글

주호 댓글의 댓글

저 역시 등대지기 쪽이 말할 거리가 많았던 듯합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양가감정이랄까, 그런 부분까지 후기에서 다루기는 다소 어려웠습니다.
다른 나라의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을 함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곧 열릴 역사강좌와 언젠가 열릴 역사세미나를 오매불망 학수고대하고 있지요.

에스텔님의 댓글

에스텔

짅짜 다 이름이 낯선 작가들이군요. 함께 못해서 아쉬워요.

주호님의 댓글

주호 댓글의 댓글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작가이름은 낯설지만 전 러시아보다 폴란드 소설이 더 읽기 좋더라구요.
다음 시간에는 에스텔 님도 함께 하실테니 아쉬움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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