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픽션들②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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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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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형의 폐허들> + <공각기동대>
<원형의 폐허들>의 마지막 문장. “안도감과 함께, 치욕감과 함께, 두려움과 함께 그는 자신 또한 자신의 아들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꿈꾸어진 하나의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그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영혼(고스트)마저도 ‘광대한 네트’를 떠도는 비트로 전화되어버린 서기 2029년의 세계를 무대로 한 <공각기동대>. 주인공 쿠사나기는 이런 물음에 매달린다. “어쩌면 자신은 훨씬 이전에 죽었고, 지금의 자신은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모의인격인 게 아닐까. 아니 무릇 처음부터 나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인형사의 다음과 같은 대사. “당신들(인간들)의 DNA도 역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과 같은 거야.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지니며, 사람은 단지 기억에 의해 개인일 수 있지. 혹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라고 해도 사람은 기억에 의해 사는 법이야.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어.”
*프로젝트 2501 : 이는 외무성에서 추진하던 비밀 프로젝트의 이름. 본디 외무성은 기업탐사, 정보 수집, 공작 등을 목표로 네트워크상에서 활동가능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던 것이었으나, 어느 순간 이 프로그램이 자의식을 얻게 되면서 난처한 상황이 벌어진다.
*고스트 해킹 : 기술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간의 영혼마저도 데이터화되어 조작, 처리가 가능해진 2029년의 세계에서는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타인의 의식에 침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행위를 고스트 해킹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기억 또한 언제든지 조작가능하며 자신의 기억이 조작된 것임을 깨달은 이들은 절망감에 빠진다.
2. 바빌로니아의 복권
- 작품에서 텍스트로
현대문학의 주요 쟁점중의 하나는 리얼리티에 관한 문제. 사실주의 문학론이 추구하고 있는 ‘객관적 리얼리티’라는게 진정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허구적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이러한 논쟁은 리얼리티와 허구의 이분법으로 대별되던 사실주의 문학론이 꿈과 현실이 도처에 혼재하는 오늘의 문학적 추구 성향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환상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초현실적인 사회, 그로 인한 작가의 인식론적 불확실성은 리얼리티가 갖고 있는 객관성을 부인하도록 만들었고 결국은 리얼리티는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작가의 인식 속에서 창조 되어지는 주관적, 개인적 실체로 변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종래의 실체와 허구, 현실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의 이분법은 사라지고 실체와 허구가 섞여 하나가 되어 버리는, 무엇이 현실의 세계이고 무엇이 상상의 세계인지 구분이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리얼리티가 가지고 있는 허구성, 주관성, 복수성, 자의성, 불연속성은 우리에게 현재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하나의 농담, 꿈, 우연한 사고, 속임수, 무대에서의 연기로 인식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자연, 문학은 이제 언어의 각종 실험장으로 탈바꿈되면서 문학 텍스트에 대한 인식전환이 요구된다. 닫힌 공간의 종래의 작품(Work)개념은 사라지고 열린 공간을 의미하는 텍스트(text) 혹은 텍스츄어(texture)개념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이제 작가의 임무는 과거의 객관적 실체를 그의 문학 텍스트에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리얼리티의 허구성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주된 임무가 된다. 문학 텍스트의 전달 매체 기능은 사라지고 작가와 문학 텍스트의 관계가 단절된다. 독자는 이제 수용자의 입장을 떠나 텍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텍스트는 자아 반사적 경향을 띄게 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문학 텍스트의 의미는 작가가 아닌 텍스트와 텍스트와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다.
- 미로(迷路)적 세계관
보르헤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유아적 신이 만든 불완전한 창조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보르헤스가 보는 세계는 불확실하고, 혼미하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픽션들』의 단편,「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보는 것처럼 '우연'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런 곳이다. 코스모스적 질서의 세계가 아닌 혼돈과 무질서,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과 우연으로 짜인 이 세계는 어찌 보면 출구 없는 미로와 같다. 이 미로는 신비의 연속이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그는 도서관의 있는 수많은 책 가운데서 "개인적 문제나 세계 보편적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우주의 존재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책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도서관'의 그 어디에서도 개인적 문제나 우주, 세계 보편적 문제에 명쾌한 답을 주는 책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신 끝없는 난삽한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책들만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서관'은 혼돈과 무질서의 상징이었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는 세계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그 어떠한 기도도 허구적 허망함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 메시지를 던져준다. 보르헤스의 소설 대부분은 삶의 모든 불가사의를 해결해 줄 의미의 '중심'과 자신의 '근원'에 도달하고자하는 몸부림 속에서 결국 길을 잃고 포기해버리는 '미로'의 절망적 패턴이 주를 이루고 있다.
3. 바벨의 도서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기도 했던 보르헤스는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 같은 곳일 것”이라 말했다. 바벨의 도서관은 육각형 모양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열실로 구성되고, 그곳에 비치된 책들은 모두 410쪽의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책의 글자들은 쉼표, 마침표, 여백을 포함한 알파벳으로 조합되어 있는데, 이 책들은 가능한 모든 알파벳의 조합을 망라하고 있다. 결국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책은 물론이고 장차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책이 이 도서관에 있게 된다. 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들의 수는 아마 지금까지 알려진 우주의 모든 원자의 수만큼 많을 것이다. 물론 그 엄청난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작품들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 육각형의 도서관
바벨의 도서관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부정수 또는 무한수로 된’ 육각형의 방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육각형은 가장 안정적이며 완전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육각형은 벌집, 눈(雪), 수많은 원자들의 구조로써 생태에서 최적의 생존 요건을 필요로 하는 자연에서 쉽게 발견된다. “관념론자들은 육각형이 절대적인 공간, 또는 적어도 공간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을 표상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육각형으로 쌓아올려진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도서관은 소설에서 우주로, 삶의 모든 곳으로, 또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고 명명된다.
1> 도서관은 우주이며 삶의 모든 곳이다.
2> 도서관은 계속해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이 도서관은 일생을 바쳐도 순례를 마칠 수 없기 때문에 사서들은 도서관의 육각형이 부정수이거나 무한할 것이라고 말해왔으나, 화자는 만일 영원한 순례자가 나타나 도서관을 가로지른대도 그는 “몇 세기 후에 똑같은 무질서 속에서 똑같은 책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도서관의 영원의 성질에 대한 논란을 종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작가의 ‘그노시스적’ 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노시스교에 의하면 조물주, 즉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절대자가 아니라 수많은 하급 신들 중에 조물주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바벨의 도서관은 그노시시스적 질서 속에서 연쇄되는 하나의 체제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원하고 안정적인 질서 속에 인간들은 ‘불완전한 사서’인 채로 살아간다.
- 책들
첫 번째 책은 “완전한 해석인 책”, 단 한권의 진리의 책이다. 이 책은 “나머지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사서들은 이 책을 찾기 위한 “인생의 시간을 탕진하고 낭비하는”수행을 지속하고 있으며, 화자는 “우주의 어떤 책장에 그러한 총체적인 책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는 동시에 수행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모순적인 태도를 취한다.
단 한 사람, 설사 그게 몇 천 년 전일지라도ㅡ이래도 좋으니 그 책을 들춰보고, 그것을 읽어본 사람이 있기를 기도했다. 만일 영광과 지혜와 행운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되게 하소서. 비록 나의 자리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천국이 존재하게 하소서. 내가 능멸을 당하고 죽어 무로 사라져버린다 해도, 단 한 순간,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당신>의 거대한 <도서관>이 정당한 것이 되도록 해주소서.
도서관에서 ‘완전한 단 하나의 진리’는 역행적으로 생각했을 때 진리를 위해 영원히 존재해선 안 된다. 완전한 단 하나의 진리가 존재할 때 진리에 대한 탐구는 종결될 것이고 그때에 도서관의 영원은 영원으로부터 단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단 한권의 책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계속되어야 진리는 진리에 대한 끝없는 수행을 통해 보존될 수 있다.
두 번째 책은 변론서(vindicatiónes)이다. 이것은 ‘나에 대한 책’이며, 이 책은 ‘나’와 책의 관계를 규정한다. 변론서는 “영원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진 고유성을 변호하고, 그리고 그의 미래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참회서와 예언서”이며, 사람들은 자신의 미리 기록된 자신의 삶을 통해 보다 큰 행복감을 얻고자 변론서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 실재하는 변론서를 찾을 수 있는 확률, 그 책의 불충실한 해적판들이나마 찾을 수 있는 확률은 0에 가깝다.
- 알파벳
소설이 내세우는 공리 중 다른 하나는 알파벳 철자의 수가 스물다섯 개라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알파벳22자에 마침표와 쉼표, 띄어쓰기를 합친 것이다. 특기할 것은 이 두 개의 구두점과 글자 사이의 공간이 ‘알파벳 철자’로 명명된 것이다. 이 ‘부록’들은 글자의 지위를 얻어 ‘차이’의 의미망을 형성한다고 정의된다. 이는 “그 어떤 가정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던 한 문제를 만족스럽게 풀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이 부록들이 더해진 알파벳들은 글쓰기의 발명가들에 의해 쓰여진 것들을 위해 꾸준히 모방되어 왔으며 이 적용들은 오늘날 전적으로 오류인 것과 오류가 아닌 것의 중간에 놓이게 되었다.
쓰여진 것들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생성되었다. 첫 번째는 암호표기법으로의 접근이다. 이것은 쓰여진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 방식은 언어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접근이다. 언어는 순차적인 속성이 있으며, 모든 언어는 언어로부터 태어난다.
4.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독일의 첩자인 '나'는 누구이며 무슨 연유로 '메든'이라는 사람에게 쫓기게 되는 것일까? '나'는 메든 대위를 피해 소식을 전달해줄 수 있는 인물을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그곳으로 향한다.
바로 펜톤의 교외에 살고 있는 스티븐 알버트 박사. 그를 만나 그의 조상인 취팽의 정원과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던 중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 (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에서 <다양한 미래들(모든 미래들이 아닌)> 이 구절은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의 무한한 갈라짐을 연상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과정이 발생하게 되고 그 무한하게 갈라진 과정들은 각기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알버트 대위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집을 둘러싼 정원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다른 차원 속에서 여러 모습을 한 '나'자신과 알버트였다. '나'는 알버트를 향해 총을 발사했고 공격당할 도시의 이름을 교신하는데에 성공했다. '나'는 알버트가 유춘이라는 사내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바로 유춘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소설은 끝나지만 끝나지 않았다. 알버트가 살해되면서 끝났지만 책 앞부분으로 돌아가면 '나(유춘)'는 다시 메든 대위에게 쫓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동시에 많은 과정이 발생하고, 그 과정 중 선택된 하나가 다른 과정을 낳고 다른 과정속에서 다른 결과를 낳는다.
하이퍼링크란 문서 내 하나의 단어나 구, 기호, 화상과 같은 요소와 그 문서 내의 다른 요소 또는 다른 하이퍼텍스트 문서 내의 다른 요소 사이의 연결이다. 문자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는 어떤 것을 전하기 위해선 어떠한 시공간이 존재해야만 했고 그 시공간 속에 있는 사람들만이 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자가 생기고, 그 문자로 기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어떤 정보를 말하려는 이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지 않아도 그가 남긴 글로 우리는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발전한 형태가 하이퍼링크다. 통신기술이 발달한 요즘 누구나 쉽게 인터넷을 접할 수 있다. 지금도 인터넷 속에는 많은 링크들이 존재한다. 포털을 키고 로그인을 하고 뉴스기사를 읽고 누군가의 타임라인에 들어가고 모든 것들이 링크클릭의 연속이다. 이런 링크에 접속하는데에는 어떤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없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끝없이 엮이고 엮여있어서 내가 누르는대로 반응만 할 뿐. 셀 수 없이 많은 링크들이 마치 다른 차원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알버트와 유춘 같이.
#참고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유운성
- <보르헤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최낙원
<보르헤스의 지팡이>, 양운덕
<보르헤스 문학에 나타난 종교의 의미>, 정경원
<20세기의 창시자 보르헤스의 작품세계>, 김홍근
<책에 대한 책-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세계>, 황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