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고원_발제] 1. 서론: 리좀
lizom
/ 2016-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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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고원 세미나 / 1. 서론: 리좀 / by 박정수
“하지만 땅 밑의 줄기, 바람뿌리, 우발적인 것과 리좀을 제외한다면,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고, 어떤 것도 사랑스럽지 않으며, 어떤 것도 정치적이지 않다.”
“한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 <천의 고원>을 들뢰즈, 가따리의 ‘생각’, ‘의도’, ‘관념’으로 환원하지 말자. 그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집착하거나 머무르지 말자. 한권의 책에는 분명 “분절의 선들, 선분성의, 지층의, 영토성의 선들이 존재한다.” 안정된 의미를 형성하는 요소들 말이다. 그러나 “뿐만 아니라 탈주의 선들, 탈영토화 운동의 선들 그리고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 낯설고 새로운 요소들 말이다. <천의 고원>은 낯설게 하는 요소가 무척 강하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책이 접속하는 외부(dehors)들, 가령 “전쟁기계, 사랑의 기계, 혁명기계들” 등과 같은 구체적인 활동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가히 즐길 만할 것이다. “글쓰기는 의미하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기 보다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언표행위의 효과인 “탐사하기와 지도그리기, 심지어는 도래할 나라들과의 관계”이다.
책의 고전적 유형으로 뿌리racine가 있는 수목arbre 형 책이 있다. 뿌리는 ‘근원, 원천, 기초, 기원’이다. 주체(저자)의 영혼이 뿌리가 되는 책, 그 영혼(기의)을 담은 기표들로 이뤄진 책. 그것은 하나의 굵은 줄기가 있고 그로부터 뻗어나가는 가지로 이뤄진 나무 형상으로 이뤄져 있다. 뿌리-나무에는 ‘일자’(Un)이 있다. 하나의 근원, 하나의 주체, 하나의 구조, 하나의 의미, 변증법의 이항대립 역시 ‘하나’에서 분기되거나, 하나로 귀결된다. 하나가 주축(pivot)이 되어 셋, 넷, 또는 다섯으로 분기된다고 해도 마찬가지.
뿌리-나무에서 파생된 잔뿌리radicelle 체계 또는 뿌리다발 형상의 책이 있다. 근대적인 책의 형상으로, “주요한 뿌리가 발육부진되어” “직접적인 다양성과 이차적인 잔뿌리들이 번창하는” 형상이다. ‘보충’과 ‘포갬’의 원리로 전개되는 책. 각각의 작품이 전집으로 묶여지는 책. 모자이크? 조이스의 글, 니체의 경구들은 “영원회귀의 순환적인 통일성에 의거함으로써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나 이원론과 주체-대상 관계를 부순다고 해도 이 다발형 뿌리에서 새로운 종류의 통일성이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것은 코스모스-뿌리와는 조금만 다른 카오스모스-뿌리다발로 이뤄져 있다.
이런 일자의 ‘보충’이나 ‘포갬’이 아니라 일자의 ‘삭제’를 통해 형성되는 다양체muliplicity를 사유하자. n-1. “언제나 감해짐으로써만 복수적인 것의 일부를 이루는 것, 다양성으로부터 유일자를 빼는 것, 이런 체제를 리좀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리좀의 개략적인 특성. 첫째는 접속의 원리이고, 둘째는 이질성의 원리이다. 리좀의 어떤 점도 다른 접과 접속할 수 있다. 그것은 점과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 다르다. 가령,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고” 통사론적 법칙을 찾는 것은 언어 안에서 뿌리-나무를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