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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진리와 방법> 11/9 세미나 발제문 (11/16으로 연기됨)
삼월 / 2016-11-09 / 조회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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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가 연기되었습니다.

11/9 세미나는 11/16에 진행합니다.

자세한 일정은 다시 공지될 예정입니다.

발제문부터 미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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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예술경험에서 발굴하는 진리 문제

Ⅰ 미적 차원의 초월

1 정신과학에서 인문주의 전통이 지니는 의미

1) 방법의 문제

2) 인문주의의 주요 개념들

① 교양 ② 공통감각 ③ 판단력 ④ 취미

2 칸트의 비판을 통한 미학의 주관화

1) 칸트의 취미론과 천재론

① 취미의 선험적 특징 ② 자유미와 부속미에 관한 이론 ③ 미의 이상에 관한 이론

④ 자연과 예술에 있어서 미에 대한 관심 ⑤ 취미와 천재의 관계

2) 천재 미학과 체험 개념

① 천재 개념의 부각 ② ‘체험’이라는 낱말의 역사에 관하여 ④ 체험의 개념

3) 체험 예술의 한계, 알레고리의 권리 회복

 

3 다시 제기한 예술의 진리에 대한 물음


1) 미적 교양의 문제점


가다머는 예술의 진리에 대한 물음의 파괴력을 가늠하기 위해 ‘미적 의식’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다. 이 ‘미적’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칸트가 사용했던 의미가 아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론을 ‘선험적 감성론’,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과 숭고에 관한 이론을 ‘감성적 판단력 비판’으로 이해했다. 여기에 실러는 취미에 관한 선험적 사유를 도덕적 요구로 전환했다. 그러나 칸트는 예술이 일종의 자유 연습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칸트보다는 피히테를 따랐다. 칸트가 말한 자유로운 유희를 실러는 피히테의 충동이론을 토대로 유희충동으로 설명하였다. 실러에게는 이러한 충동을 도야하는 일이 미적 교육의 목적이다.

이제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의 예술로서 실제의 현실에 대립되고, 이 대립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예술과 자연의 관계는 긍정적 보완관계에서 가상과 현실의 대립으로 대체된다. 전통적 규정에서 ‘순수예술’은 현실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지, 현실을 가상으로 은폐·위장·미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과 대립하는 가상으로 각인된 예술은 그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한다. 예술이 지배하는 곳에는 미의 법칙이 효력을 발휘하고, 현실의 한계가 극복된다. 이 ‘이상의 왕국’은 예술이 마련해줄 것이라던 진정한 인륜적·정치적 자유 대신 ‘미적 국가’, 즉 예술에 관심 있는 교양사회를 형성한다. 이에 따라 이미 극복된 줄 알았던 감각세계와 도덕세계라는 칸트의 이원론도 새로이 대립하게 된다.

예술에 의한 이상과 생의 화해는 단지 부분적이다. 아름다움과 예술의 미화는 일시적이다. 미와 예술이 고양시키는 마음의 자유는 미의 국가에서의 자유이지 현실의 자유는 아니다. 실러가 문학과 대립시킨 현실은 더 이상 칸트의 자연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적 존재의 유명론적 편견에 타당성을 부여함으로 인해 19세기 미학의 존재론적 곤경은 칸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적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개념들로부터의 해방은 19세기 심리학과 인식론에 대한 현상학적 비판으로 인해 가능했다. 현상학적 비판은, 미적인 것의 존재양식을 현실과 연결시키는 모든 시도가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였다. 미적 경험을 모방, 가상, 탈현실화, 환상, 마법, 꿈과 같이 현실과의 관계를 전제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으로 인식된 미적 경험은 현실을 능가할 수 없다. 미적인 것의 존재론적 규정을 가상으로 모는 이론적 근거는, 자연과학적 인식모델의 지배가 여기서 벗어난 모든 인식 가능성을 ‘허구’라고 불신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한편 헬름홀츠는 정신과학이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계기를 ‘예술적’이라 특징짓는다. 이 ‘미적 의식’은 실러가 최초로 정초했던 ‘예술의 입장’과 더불어 주어졌다. 미적 의식은 현실로부터의 소외를 포함하고, 이는 헤겔이 교양이라고 인식하는 ‘소외된 정신’의 한 형태이다. 미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교양 있는 의식의 한 계기다. 그러나 미적 교양의 형태를 만드는 일과, 한 사회를 특징짓고 결합하는 취미 이상의 통일은 다르다. 취미는 사회의 척도를 따르고, 사회적 삶의 공통성을 형성한다. 예술가가 창조하고 사회가 인정하는 것은 삶의 양식과 취미 이상의 통일에 함께 속해 있다.

반면에 실러의 미적 교양 이념은 내용적 척도의 타당성을 벗어나, 예술작품과 세계와의 일체성을 해체시킨다. 미적 의식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소유의 보편적 확대를 표현한다. 이제 미적 의식이 체험의 중심이여 여기서부터 예술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평가된다. 한 작품이 근원적 삶의 연관으로부터 분리되어 종교적·세속적 기능을 도외시하면, 우리는 이를 ‘순수예술작품’으로 본다. 추상작용은 ‘순수예술작품’을 볼 수 있게 하고 그자체로 존재하게 한다. 가다머는 이러한 미적 의식의 성과를 ‘미적 구별’이라고 부른다. 미적 구별이란 미적 성질 차제만을 목표로 하여 선택하는 추상작용이다. ‘미적 체험’은 본래적인 작품을 지향하고, 작품의 목적, 기능, 내용의 의미 등 부속된 미적 계기들을 도외시한다. 미적 의식은 미적으로 의미된 것을 미 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한다. 작품을 우리에게 드러나게 하는 모든 접근조건을 도외시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유한 미적 구별이다.

미적 의식의 독립성에 따라 미적 의식은 동시성을 갖는다. 미적 의식은 타당한 것을 자기 내부에서 동시성으로 고양함으로써 자신을 역사적 의식으로 규정한다. 미적 의식은 역사적 지식을 포함하고, 그것을 미적 의식의 징표로 사용한다. 미적 교양 의식은 자신을 시대의 통합으로 이해하지 않고, 고유한 동시성을 통해 취미의 역사적 상대성에 기초한다. 이에 따라 취미는 통일 대신 유연함을 추구하게 된다. 미적 구별은 동시성을 통해 자신의 생산성을 증명한다. 도서관, 미술관, 상설극장, 연주회장 등. 이렇게 현대의 예술은 교양사회의 특징인 자기확인의 요구에 적응하며, 동시성으로 끌려들어간다.

이런 ‘미적 구별’을 통해 작품은 미적의식과 자신의 장소에 속함으로써 세계를 잃게 된다. 예술가도 세계 내에서 자신의 장소를 잃는다. 자유로운 영감으로 창작하는 일이 예외적인 시대에 주문예술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문 없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창작하는 예술가는 사회적으로도 삶에 일반적 관습이 적용되지 않는 국외자였다. 19세기 보헤미안이라는 개념이 이를 반영한다. 동시에 자유로운 예술가는 이중적인물이 된다. ‘예술의 입장’에서는 종교와 분리된 교양사회에서 예술에 더 많은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낭만주의적 요구를 통해 예술가는 세계 내에서 새로운 성직 의식을 부여받는다. 예술가는 창조를 통해 속죄를 수행하는 ‘세속의 구세주’가 된다. 이러한 요구는 늘 개별적으로만 수행되므로 예술가에게 비극적이며, 요구의 거부로 나타난다. 예술의 개별화는 공동체의 개별화를 통해 붕괴를 증언할 뿐이다. 여기서 본래적 교양, 보편성으로의 고양 과정은 자기 자신 속으로 함몰된다. 교양은 절차탁마가 아닌 향유에 그친다.

 

 

2) 미적 의식의 추상작용에 대한 비판


가다머는 미적 구별 개념의 형성에 대한 기술에 이어 미적인 것의 개념이 지니는 이론상의 난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리하르트 하만의 미학 발전 시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순수 미적인 것’을 추상해낼 경우 순수 미적인 것 자체가 지양된다는 점이다. 하만은 미의 외적 연관들로부터 미적인 것을 구별해내지만, 포스터와 같이 목적이 특수한 예술형식들에도 미적 권리를 부여해준다. 우리는 예술경험 없이도 누군가의 미적 태도에 관해 말할 수 있다. 다시 미학의 문제가 전 영역에 걸쳐 개진된다. 예술이 미적 가상과 조야한 현실을 구분함으로써 내버려둔 선험적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미적 체험은 그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무제한적 주권을 행사한다. 하만의 시도는 예술의 개념에서 무산된다. 미적 구별의 극단은 예술과 기교의 완벽성을 일치하도록 만들어 마침내 예술마저 도외시하게 된다.

하만의 출발점은 ‘지각의 자기함의’이다. 칸트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중요한 개념과 의미의 척도는 그 기능을 상실한다. ‘함의적’이라 함은 인식 또는 언표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자기함의’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의미가 규정되는 근거와의 연관을 전적으로 단절시킨다. 결국 ‘미적 체험’도 지각활동이나 인지기능, 인식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감각 지각이 보편적인 것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개별화된 무엇을 보편적인 것으로 지각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감각의 지각 자체가 일종의 추상이다. 한편 ‘미적으로 보기’의 특징은 감각의 보편 지향을 넘어 미적으로 보이는 그 대상 자체에 머문다. 그렇다고 그 대상을 표현적인 무엇으로 보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지각작용은 감관들에 주어진 것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현대심리학이 ‘자극 상관적’ 지각의 개념에 가한 날카로운 비판을 보면 순수한 지각은 관념상에만 존재하는 극단적인 경우에나 가능하다.

지각 역시 단순한 반영은 아니다. 본다는 것은 늘 선별작업을 전제한다. 또한 보는 작업을 통해 전혀 현존하지 않는 것을 ‘들여다보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물을 가급적 항상 동일한 눈으로 보려고 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순수한 지각이론에 관한 비판들은 실용주의적 경험의 입장에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다. 순수한 지각이론에 관한 비판은 미적 의식에도 적용된다. 본다는 것은 분류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표현된 것을 인식할 때뿐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우리에게 명료해질 때에만 우리에게 예술적 형성체로 존재하게 된다. 단순히 보는 것과 단순히 듣는 것은 현상들을 인위적으로 단순화시키는 독단적 추상이다. 지각은 항상 의미를 파악한다.

예술가의 ‘모티프’는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일 수 있다. 모티프는 존재론적으로 비소재적이지만, 내용이 없지는 않다. 어떤 것이 모티프가 되기 위해서는 확고한 통일성을 지니고, 예술가가 이 통일성을 의미의 통일성으로 수행하며, 수용자도 이 통일성을 통일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칸트는 이와 연관하여 ‘이름붙일 수 없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감성적 이념’에 관해 말한다. 칸트는 감성적인 것의 선험적 순수성을 넘어서 예술의 존재방식을 인정한다. 예술을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미학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 미적인 것의 ‘순수성’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미학이 확고한 위치를 찾는 일을 어렵게 한다.

가다머는 오늘날 예술가의 의식이, 칸트의 후계자들이 미학의 보편적 토대로 확장한 천재개념에 대립하고 있다고 본다. 천재들의 몽유병자적 무의식을 활용한 창작은 오늘날 우리에게 잘못된 낭만주의로 여겨진다. 폴 발레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예술가이자 동시에 엔지니어인 척도를 제시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적 의식은 18세기 천재 숭배와 19세기의 예술가의 신성화를 시민사회의 특징으로 파악한다. 천재 개념이 근본적으로 관찰자 입장에서 구상되었다는 데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창작자들도 자신을 관찰할 때 관찰자와 같은 이해방식을 사용한다. 이렇게 볼 때 18세기 천재 숭배 사상은 창작자들에 의해서도 배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작자의 자기이해는 더 냉철하다. 창작자는 관찰자가 작품 속에서 찾는 의미 외에도, 제작 및 능력의 가능성과 ‘기교’의 문제를 생각한다.

천재의 무의식적 창조성 이론에 대한 비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다시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칸트나 관념론의 입장에서 예술은 천재의 작품이라고 정의된다. 예술작품의 탁월성은 향유자와 관찰자에게 고갈되지 않는 해석의 대상을 제공한다. 그러면 천재 개념 없이 예술작품과 예술 아닌 것의 차이, 그리고 예술 향유의 본질에 대해 말할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작품의 완성 기준은 어떻게 정하는가?

폴 발레리는 예술작품을 대하는 사람이 갖게 되는 예술작품의 미완성적 성격을 부정하지 않았다.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완성될 수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수용과 이해의 적절성 문제는 전적으로 수용자에게 맡겨야 한다. 결국 적절성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다머는 이런 견해를 논거가 박약한 해석학적 허무주의로 본다. 폴 발레리가 무의식적 생산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린 결론이 본격적으로 다시 그러한 신화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다머가 보기에 발레리는 자신이 행사하고 싶지 않은 절대적 창작의 전권을 독자와 해석자에게 넘겨준다. 그런다고 이해의 천재성이 창작의 천재성보다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해 줄 리는 없다.

천재 개념 대신 미적 체험 개념에서 출발한다 해도 같은 곤경에 빠진다. 루카치는 미적 대상의 통일성이 결코 사실적 소여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작품은 단지 빈 형식, 다수가 가능한 미적 체험들의 단순한 합류점일 뿐이다. 이런 미적 대상의 통일성 해체는 체험 미학의 필연적 결과이다. 오스카르 베커는 루카치의 견해를 따르면서 예술 작품은 ‘지금’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미학을 체험에 정초시킬 경우 미학은 절대적 순간성으로 인도된다. 이 순간성은 예술작품의 통일성을 해체하고, 예술가의 정체성 및 향유자의 정체성도 파괴한다.

키르케고르가 이런 논거의 박약성을 증명했다. 키르케고르는 주관주의의 파괴적인 결과를 인식하고, 미적 직접성의 자기 파괴에 관해 최초로 기술했다. 윤리학자의 입장에서 구상한 그의 비판적 시도는 미적 실존의 내적 모순을 파헤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이렇게 실존의 미적 단계는 그 자체로는 지탱하기 어렵고, 예술현상이 실존에 피할 수 없는 과제를 제기한다는 사실에서 인정된다. 그 과제는 미적 인상이 순간순간 제시하는 현재에 직면해서도 자기이해의 연속성은 획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기이해의 연속성만이 인간의 현존재를 받쳐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존의 해석학적 연속성 밖에서 미적 현존재를 구성하는 존재구성을 시도한다면, 키르케고르의 비판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이해에서 벗어난 것 또한 우리 자신을 제한하는 것으로 경험되며, 우리의 이해에서 벗어난 것이 인간 현존재의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기이해의 연속성에 속하게 된다. 우리 존재를 형성하는 해석학적 연속성에 대한 과제는 미적 존재와 미적 경험의 불연속성 앞에서 제기된다. 예술 안에는 무시간적 현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집합하는 정신의 활동이 깃들어 있다. 미적 경험 또한 자기이해의 한 방식이다. 모든 자기이해는 대상을 필요로 하고, 그 대상의 통일성과 동일성을 포함한다. 우리가 세계 안에서 예술작품을 만나고 개별 예술작품 속에서 세계를 만나는 한,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직접성 및 순간성을 띤 천재성, ‘체험’의 중요성을 근거로 삼는 것은 연속성과 자기이해의 통일성에 대한 인간 실존의 요구 앞에서 힘을 잃는다.

다음으로 가다머가 제기하는 문제는 미적 경험의 진리 평가 방법과, 칸트에게서 시작된 미의 주관화에 대한 극복 방법이다. 예술의 경험에는 과학의 진리 요구와 구별되고, 거기에 예속되지 않는 진리 요구가 깃들어 있다. 미학의 과제는 바로 예술의 경험이 독자적 인식 방법이라는 사실을 근거 짓는 데에 있다. 이런 인식은 과학을 위한 감각 인식과 다르며, 윤리적 이성 인식 및 모든 개념적 인식과도 다르다. 그리고 이것 또한 인식, 즉 진리의 매개임에 틀림없다. 칸트처럼 인식의 진리를 과학의 인식 및 자연과학의 현실 개념으로 측정할 경우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워진다. 경험의 개념을 칸트보다 확대하여 예술작품의 경험도 하나의 경험으로 이해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 헤겔의 미학 강의를 원용하면, 미학은 세계관들의 역사, 즉 예술의 거울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역사가 된다. 동시에 예술경험에서 진리의 인식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과제가 인정받게 된다.

‘세계관’은 칸트와 피히테가 도덕적 세계질서를 보충한 것을 특징짓기 위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처음 언급했지만, 그 고유한 의미는 《미학》에서 비로소 획득된다. ‘세계관’이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는 세계관의 다양성과 변화가능성 때문이다. 헤겔의 철학이 예술의 경험에서 인식한 진리의 길을 다시 거부할 때, 가다머는 이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하려고 한다. 정신과학은 모든 경험의 다양성을 능가하지 않고 이해하려 한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려 한다는 말이다. 미적 의식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테두리에서만 예술의 문제를 올바르게 다룰 수 있다.

이제 가다머는 미적 의식의 자체 해석을 바로잡고, 미적 경험이 증명하는 예술의 진리에 관한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이로써 예술의 경험이 하나의 경험으로 이해되도록 고찰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예술의 경험이 미적 교양의 소유물로 날조됨으로써 그 고유한 권리가 무력화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언어와의 모든 만남은 완결되지 않은 사건과의 만남이며, 만남 자체가 이러한 사건의 한 부분이다. 이것이 미적 의식과 그것이 자행하는 진리 문제의 무력화에 맞서 우리가 타당성을 획득해야 할 문제이다.

근대의 주관주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이 생산적인 점은 존재를 시간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유한성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예술을 철학과 분리하려면 우리는 유한성을 고수해야 한다. 자기이해의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철학의 물음은 자기이해의 지평을 뛰어넘는다. 이 물음은 자기이해의 지평에 숨겨진 근거인 시간을 발견함으로써 주관주의를 뛰어넘는 경험에게 자신을 개방한다. 하이데거는 이 경험을 존재라고 부른다.

예술의 경험은 자신이 경험한 것의 완전한 진리를 완결된 인식에서는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러나 미적 의식이 경험으로 간주한 것을 미적 의식으로부터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미적 의식은 자신의 경험을 체험의 불연속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예술의 경험이 무엇이고 예술경험의 진리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술의 경험이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는가이다. 우리는 예술을 경험할 때 작품에서 진정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경험하는 것의 존재양식을 묻는다. 이제 이 진리가 어떤 종류의 진리인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정신과학이 수행하는 ‘이해’에서 진리에 대한 문제가 다른 차원에서 새로이 제기된다. 정신과학의 자기이해가 들려주는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정신과학에서 의미하는 이해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예술의 진리에 관한 물음이 이 폭넓은 물음의 준비에 기여할 수 있다. 예술작품의 경험은 이해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해란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와의 만남에 속하므로 오직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으로부터 밝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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