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발제_허구의 정원과 시간의 철학 +3
오라클
/ 20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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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정원과 시간의 철학 [보르헤스-되기의 요소들]
들뢰즈의 문학-기계 > 허구의 정원과 시간의 철학 :: 이진경
1. ‘보르헤스-되기’, 보르헤스-‘되기’
[1] 보르헤스 작품 :: 각각
보르헤스는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 그는 철학을 문학화하며, 동시에 문학으로 철학을 한다. 《픽션》들의 모든 작품들은 각기 하나의 철학적 주제를 다룬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지식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계몽주의적 통념을 극한적 허구로 몰고 간다. <알모따심을 찾아서>는 각자에게 내재하는 존재로서 ‘신’을 다룬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동일한 텍스트가 씌여진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형의 페허들>은 현실과 꿈의 관계는 물론 꿈속에 존재하는 인물-주체의 비주체성을 철학적 주제로 부상시킨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니체의 ‘우연들의 영원한 놀이’라는 관념이 카프카의 ‘무제한한 연기’와 잇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하나의 동일한 사실이 연결되는 과거의 다른 사실들에 의해 다른 의미를 갖는 다른 사건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보르헤스의 연기적 사유(연관된 조건에 따라 현존하는 어떤 것의 의미가 끊임없이 변화된다)는 들뢰즈보다 먼저 ‘사건의 철학’을 제시한다. <틀뢴······>과 <바벨이 도서관>은 존재와 진리,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되던진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시간에 관한 선형적 관념을 전복한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기억과 망각에 관한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칼의 형상>에서는 억압적 세계, 비열하고 치졸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배신자와 영웅에 대한 논고>에서는 배신자와 영웅의 역설적 단일성을 통해서 모든 외부를 삼켜버리는 목적론적 관계에 대해 풍자한다. <비밀의 기적>에서는 시간의 선형성, 시간의 외재성, 시간의 단일성에 대한 반문을 정지된 시간의 형식으로 던지며, <불사조 교파>에서는 가장 완벽한 비밀이란 모든 말에 의해 치장되는 비밀이고 감추어지지 않은 비밀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2] 보르헤스 작품 :: 개괄
확실성의 관념을 조롱하다 > 이 모든 소설들에서 허다하게 많은 책들, 있는 저자의 책-없는 저자의 책, 없는 잡지의 있는 글-없는 잡지의 없는 글.....들을 뒤섞어 인용함으로써, / 한편으로는 상호인용의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확실성의 관념이나 문학적 진리관념을 조롱하면서, /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인용과 재인용이며 그것의 변용일 뿐이라는, 인용과 변용이 바로 생산이고 창조라는 생각을 보여준다.
전통적 저자의 관념을 파괴하다 > 모든 소설을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 만들고, 그 텍스트들에 자신이 등장하고 ‘나’와 ‘보르헤스’라는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 전통적인 저자의 관념을 깬다.
문학의 철학-되기, 철학의 문학-되기 > 이처럼 보르헤스는 철학과 문학, 아니 백과사전적인 모든 지식들로 흥미로운 정원을 만들어낸다. 그 정원에서 문학은 철학이 되고, 철학은 문학이 된다. 그렇게 ‘된’ 문학은 진실보다 강렬한 허구를 만들고, 그렇게 ‘된’ 철학은 동시대 철학자들보다 앞서 사유한다.
‘보르헤스-되기’와 보르헤스-‘되기’ > 보르헤스의 정원에 흘러넘치는 이러한 반시간성/반시대성을, 자신의 시간/자신의 시대와 싸우며 창조한 새로운 사유와 삶의 영역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뒤에 찾아온 창조적 사유와 보르헤스를 섞어서 새로운 보르헤스를 만드는 것이 낫다. (우리의 ‘보르헤스-되기’) 그것은 보르헤스에 대해 쓰면서 우리가 보르헤스가 되는 것이고, (보르헤스의 다른 것 ‘되기’) 그럼으로써 보스헤스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고 수많은 보스헤스가 되게 하는 것이다.
2. 진실과 허구의 아이러니
[1] 진실과 허구, 진리와 거짓의 아이러니
진실과 거짓의 아이러니 > ① <신학자들>에서 아우렐리아노의 말과 행동은 진리 혹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고 행해지지만, 그는 더없이 가증스런 위선과 거짓을 행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 내지 진실이 거짓과 위선에 봉사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본다. ② <엠마 순스>에서 엠마 순수는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동과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자신의 삶에서 느꼈던 수치-분노-증오에 값하는 것이었고 아버지와 자신을 고통스런 감정 속에 살게 한 인물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에 봉사하는 ‘약간’의 거짓들이라는 반대의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③ <죽음과 나침반>에서는 사건의 감추어진 비밀을 안다는 것이 거꾸로 예기된 사건 안으로 유인되는 이유가 된다. 진리 내지 진실을 향한 의지가 사태를 악화시키고 죽음으로 인도한다. ④ <매수>에서 공명심에 빠진 아이너슨과 공정성을 미덕으로 삼은 윈드롭은 서로의 의도를 읽고 이용한다. ⑤ 보르헤스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 위에서 말한다. 거기서 진실은 때로 거짓에 봉사하고, 거짓 역시 때로 진실에 봉사한다. 그 경우 진실은 거짓보다 더 거짓될 수 있고, 거짓은 진실보다 더 진실될 수 있다.
진리와 거짓의 경계 : 틀뢴 > 보르헤스는 지식 또한 그 경계로 몰고 간다. ‘틀뢴’은 백과사전을 만들어냄으로써 만들어진 가상의 혹성이다. ① (계몽주의와 ‘표상’) 18세기 계몽주의는 백과사전적 지식의 배열을 통해 세상의 모든 질서를 드러내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그들은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표상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무의식적 확신(에피스테메)을 공유하고 있었다. ② (근대 수학자들과 ‘진리’) 반면 근대 수학자들은 내부가 서로 정합적인 방식으로 배열되었다면, 외부 실재와 상관없이 확고한 ‘진리’라고 믿었다. ‘틀뢴’의 백과사전이 완전히 정합적인 논리에 따라 구성되었다면, 그들에게 그것은 ‘진리’가 아닌가?
[2] 환영과 결부된 우리의 믿음과 욕망
환영 :: 실재하는 힘 > 보르헤스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환영이다. 그것이 사실성의 형상으로 나타나든, 지식이나 책의 형상으로 나타나든, 표상이나 감응의 양상으로 나타나든. 그러나 환영이란 단순한 거짓-환영-착각이나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가상이 아니라, 강한 힘을 가지고 현실을 만들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이다.
환영-자이르 :: 삶을 만드는 실재, 실재를 만드는 환영 > ① (환영-자이르) ‘자이르’는 돈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뜻하는데, “끊임없이 떠나지 않는 이런저런 물체의 형상이고 망각될 수 없는 것을 속성으로 하며, 그것을 본 사람이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마찬가지로 화폐는 그것을 본 이상 누구도 떠날 수 없는 우리 근대인의 삶의 공통된 지반이다. ② (화폐-자이르) 화폐의 어디에도 자이르와 같은 속성은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화폐가 그런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확실히 화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환영이고, 화폐를 통해 우리의 삶에 새겨지는 환영이다. ③ (실재-자이르) 자이르는 가상적인 것도 비실재적인 것도 착각된 것도 아니며, 실제 삶을 만들고 삶을 조형하는 중요한 실재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밤낮으로 자이르를 생각하고 있다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일까? 지구, 아니면 자이르?”
환영과 결부된 사람들의 믿음-욕망-의지 > ① (환영-실재 :: 사람들의 믿음-집착-환영) 그런데 자이르-환영을 실재로 만드는 것은 자이르의 물질적 특징이 아니라, 강박증과도 같은 자이르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집착-환영이다. 사람들의 믿음과 환영이 허구를 진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과 환영 자체가 진실과도 같은 허구, 진실로 존재하는 허구이다. ② (환영-꿈 :: 사람들의 공포-욕망-마음) 환영이 일종의 꿈이라면, 환영의 허망하고 무의미함 때문이 아니라, 환영을 만드는 우리의 공포-욕망-마음 때문이다. ③ (환영과 결부된 :: 사람들의 의지) 그렇기 때문에 환영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성을 갖는 현실이고 유효성을 갖는 실재이다. 환상문학의 리얼리티! 모든 것은 환영과 결부된 우리 의지의 산물(우리 마음에 의해 삶으로 들어오는)이다. 부인을 패는 남자는 패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고, 우리는 두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스핑크스의 꿈을 꾸는 것이다. 아우렐리아노는 경쟁자에 대한 적의를 표현하기 위해 인용과 고백이라는 진실의 형식을 빌렸으며, 엠마 순수는 분노와 증오를 표현하기 위해 위장과 거짓의 힘을 빌렸던 것이다.
[3] 진실/허구 ······> 실재 (유효성으로서의 실재 :: 유효한 효과를 갖는 것이 실재이다)
진리/거짓, 진실/허구, 실재/비실재, 본질/가상 > 이런 환영과도 같은 세계를 진리/거짓, 진실/허구, 실재/비실재, 본질/가상이라는 개념으로는 적절하게 다룰 수 없다. 어이없어 보이는 믿음이나 확신조차 유효한 효과를 갖는다면 충분한 실재이고, 그럴 듯해 보이는 백과사전적 지식도 유효한 효과를 갖지 못하면 실재가 아니다. 진리와 진실의 형식을 갖더라도 적대자에 대한 살의를 품고 있는 것이라면 진실이나 진리가 아닌 것이고, 거짓과 허구를 동원했다고 해도 간절함과 절실함이 있다면 거짓은 사소한 것일 수 있다.
환영과 결부된 실재성/무상 > ① (환영-실재성) 보르헤스에게 환영과도 같은 세계란 진실도 아니지만 거짓도 아니다. 아니, 그것은 거짓인 만큼 진실이다. 또한 그것은 실재도 아니지만 허구도 아니다. 아니, 그것은 허구적인 것 이상으로 실재적이다. 그것은 믿음-욕구-확신을 통해 발휘되는 유효한 효과로 존재하는 실재이고,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의지-마음의 표현이다. ② (환영-무상함) 다만 그것이 환영이란 말의 ‘환영됨’에 값하는 것은, 욕망이나 마음이 무상하며, 현실성도 유효성도 무상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무상한 마음의 일부라는 점에서, 어떠한 자성自性도 갖지 않는 마음이 잠시 머무는 어떤 형상을 빌어 나타난 것이다. 환, 환영, 용수가 말하는 가假, 가명假名, 가상假象이다. ③ (가상과 본질) 여기서 가假란 거짓이 아니라, 빌린다는 것-이름을 빌어 표현되는 것-형상을 빌어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假’는 빌린 형상 뒤에 어떤 것도 감추고 있지 않다. 본질이란 가상 뒤에 감추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가상을 통해 표현되는 만큼만 존재하는 것이다. 본질이란 자성을 갖고 실재하는 존재도 아니자만, 자성 말고는 따로 존재하는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환幻, 진실도 아닌 허구도 아닌 환幻!
3. 시간의 정원
[0] 동일한 시계-시간 & 계열화된 사건-시간
연기적 관계의 무한성 > 보르헤스가 유효성으로서 실재만을 보고 있다고 말해선 충분하지 못하며, 어떤 것을 환영으로 만드는 관계들-연기적 관계들을 그리고자 한다. 동일한 것-동일한 책-동일한 텍스트를 한 번도 허용하지 않는 연기적 관계의 무한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동일성과 근접해 있는 공간보다는, 가변성과 근접해 있는 시간을 통해 세상을 보려고 한다.
동일한 시계-시간 & 계열화된 사건-시간 > 보르헤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시간이다. “세계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시간적인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시간이란 외연적인 양 내지 시계적인 시간이 아니라, 사건적인 것이다. 상이한 사건들은 하나로 고립되어선 가치가 없고 서로 병치되어야만 효과를 발휘한다. 여기서 시간의 선이란 이어지는 사건에 따라 다르게 그려진다. 현재 사건의 의미는 어떤 과거를 갖는가에 따라, 다른 시간의 선을 그리고 그때마다 다른 미래를 갖는다. 시간이란 하나로 계열화되는 사건들의 연속체일 뿐이다.
[1] 시간에 관한 보르헤스의 제1명제 :: 시간의 가변성
제1명제 > 보르헤스가 상이한 사건적 계열화의 선들을 병치함으로써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시간이란 사건들의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어떤 직선 같은 게 아니라, "시간은 사건들의 계열화를 통해 정의되는 연속체"라는 것이다. (시간은 이질적인 사건들의 연속체) 우리는 상이한 공간으로 분할되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상이한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끝없이 ······ 정원> 알버트와 유춘은 동일한 세계-시간 안에서 만나기도 하고 못 만하기도 하는 게 아니라, 계열화의 선으로 연결되는 사건적인 시간의 선 안에서 만나기도 하고 따로 있기도 한다.
[2] 시간에 관한 보르헤스의 제2명제 :: 시간에 의한 가변성
"시간은 모든 반복에 차이를 새겨넣는다." 시간의 차이화하는 힘.
<삐에르 메나르,《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메나르의 텍스트는 똑 같지만, 메나르의 텍스트는 세르반테스의 텍스트보다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동일한 문장으로 《돈키호테》를 쓸 수 있었다면, 메나르의 문체는 세르반테스와 달리 국경과 시대를 넘나드는 고어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다. 내용에서도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와 동일한 문장을 통해 전혀 다른 사유를 펼치고 있다.
<타자> 1969년의 보르헤스와 1918년의 보르헤스는 생물학적 동일성-법적 동일성-사회적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1972년의 보르헤스가 보기에 두 사람의 보르헤스는 결코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에 대해서도, 문학에 대해서도, 자기 문학의 민중에 대한 생각에서도 너무나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시간-차이화하는 힘 > 시간은 동일한 두 개의 문장, 동일한 두 사람조차 전혀 다른 것이 되게 한다. 시간은 동일성에 상이한 삶의 흔적을 새겨넣는다. 동일한 문장이 씌어지고 읽혀지는 외부에 의해서든, 신체와 사유에 끼어들어 내부가 되어버린 삶을 통해서든, 시간에 의해 다른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시간은 동일해 보이는 것 사이에 차이를 새겨넣는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한 동일한 것은 없다. 다만 서로 닮은 것이 차이를 포함한 채 반복하여 출현할 뿐이다. 닮은 채 나타나는, 하지만 습관적으로 우리가 동일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들뢰즈처럼 ‘반복’이라는 말로 표시할 수 있다면, 보르헤스가 제시한 것은 “시간은 모든 반복에 차이를 새겨넣는다”고 요약할 수 있다.
[3] 시간에 관한 보르헤스의 제3명제 :: 시간 안에서의 차이
제3명제 > 시간에 관한 제1명제가 시간의 가변성에 관한 것이었다면, 제2명제는 시간에 의한 가변성에 관한 것이다. 제3명제는 시간 안에서의 차이에 관한 것으로, "하나의 동일한 사건적 시간 안에도 다른 종류의 시간이 끼어들 수 잇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은 이질적인 사건들의 연속체라는 제1명제에서 추론될 수 있는 것으로, 하나의 시간 안에도 차이가 숨쉴 수 있는 수많은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비밀의 기적> 총살이라는 사건의 시간 안에 창작이라는 전혀 다른 사건화의 시간이 끼여들 공백이 숨어있었다. 베르그송의 시간개념에 대한 강의가 행해지는 시간의 선 안에서, 그 시간의 선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 다른 이질적인 시간의 선을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서 새로운 사건적 연속체로서 시간의 선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강의로 요약되는 시간의 선은 가던 방향으로 계속 흘러갈 것이지만, 강의가 끝나기 전에 이미 다른 시간의 선들이 그려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제3명제 > 시간에 관한 제3명제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발산의 지대들을 지적하는 것이고, 상이한 시간들이 하나의 시간으로 수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시간 안에서 예정된 종결이, 그 사이에 끼여드는 우연적인 이질적인 선들에 의해 무한히 연기된다는 것을 뜻한다.
<바빌로니아의 복권> 복권의 추첨이 우연성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모든 추첨의 단계에 우연을 개입시키는 게 옳으며, 그 경우 추첨의 회수는 무한히 거듭될 수밖에 없다. 이는 ‘우연들의 영원한 놀이를 만들어낸다. 이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연상시키며, 카프카의 소송의 ’무제한 연기‘와 사실상 동일하다.
[4] 시간에 관한 보르헤스의 제4명제 :: 차이 안에서의 시간
"현재에 의해 미래는 물론 과거 또한 수정되고 변경될 수 있다." 보르헤스는 <틀뢴, 우크바르, 오리비스 떼르디우스>에서 ‘미래 못지 않게 굳어 있지 않은 유연한 과거’라는 말로 요약하였다. <또다른 죽음>에서는 현재의 행동에 의해 수정되는 과거를 다룬다면, <1983년 8월 25일>에서는 결정된 미래를 수정하는 현재를 부각시킨다.
현재가 과거를 수정할 수 있다! > 우리는 통상 현재의 행동에 따라 다른 미래를 갖지만, 지나간 과거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치욕적인 죽음-과거를, 후일 수정하는 <또 다른 죽음>은 충격적이거나 허황되다. 현재가 과거를 수정할 수 있다는 발상은, 시제 형식으로 항상-이미 직선적인 시간개념을 내장하고 있는 우리의 언어와 근본적인 불화를 드러낸다. 그러나 1946년, 오랫동안 품고 있던 열망에 따라 1904년 마소예르의 패전에서 전사했다.
현재가 미래를 수정할 수 있다 > 반면 현재가 미래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두 명의 보르헤스를 이용한다.<1983년 8월 25일>, <셰익스피어의 기억>. 미래에 죽음을 앞둔 ‘나’를 지금 만난다면, 삶의 모든 과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된 미래 안에 있는 것이고, 현재는 봉인된 미래 안에 갖히게 될 것이다. 현재의 보르헤스는 결정된 미래를 거부하고 자살함으로써, 봉인된 미래와도 같은-결정된 미래 안에 가두는 그 방에서 빠져나온다. 이로써 그의 미래는 다른 선에 연결된다.
현재를 통해 과거를 수정하는 방법 :: 통상적 방법 & 보르헤스의 방법 > 현재를 통해 미래는 물론 과거 또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제4명제는 파격적이고 공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상식이 허용하는 문법적 시제에 갇힌 우리는 완화된 형태로 과거를 수정하는 방법을 떠올린다. ① (과거······다른 현재와 연결) 과거에 있었던 일이, 달라진 현재와 연결되면서 다른 의미를 갖는 다른 사건이 되는 경우다. 맑스를 공부하던 일······감옥에 갇힌 수인의 ‘현재’와 연결되는 경우 / 맑스를 공부하던 일······맑스로 책을 쓰는 지식인의 ‘현재’와 연결되는 경우 /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 상이한 과거가 된다. ② (현재의 필요에 의해 발견되거나 망각되는 과거) 어떤 현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다른 현재에서는 존재하는 경우로 통상 어떤 과거의 사실이 새로이 발견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단군 고조선-삼국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나라가, 단군 고조선-20세기에 단일민족의 기원이 필요해지면서 ‘발견’ 된다. 시온-20세기에 유태인들은 국가와 영토없는 고통 속에서 그 신화에서 자신의 영토를 찾아낸다. 이처럼 과거는 현재의 삶이나 현재의 필요에 의해 ‘발견’되고 ‘발명’되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현재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과거가 다른 현재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로, 과거가 지워지고 망각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③ (보르헤스의 방법) 보르헤스가 없는 저자의 책을 인용하거나, 있는 저자의 없는 글을 인용하는 방식의 허구적 인용은, 현재가 변형시키는 과거를 예시하는 문학적 게임이다.
시간과 불멸성 > ① (차이-시간) 이처럼 현재 안에 다른 삶-이질적인 시간의 선을 끌어들임으로써, 현재에 이어져 있던 과거와 미래의 점들은 분기하고 갈라지며 분리된다. 현재 안에 만들어내는 차이를 통해 다른 시간의 선이 그려지고, 다른 미래-다른 과거가 만들어진다. 이로써 차이는 시간화된다. 차이 안에서의 시간! 결국 가변성과 차이, 반복을 통해 시간을 다루는 보르헤스의 이러한 시간에 관한 사유는 또다른 가능성을 향해 열린 사유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살려는 욕망의 사유다. ② (불멸성) 이로써 보르헤스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려는 것이다. 때론 아베로에스가 되고, 때론 삐에르 메나르가, 때론 다미안 드등이 되는 무스한 많은 ‘나’들을 통해서 무한히 새로운 삶의 지대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만 도달가능한 어떤 영원성-불멸성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4. 불멸성, 혹은 다른-것-되기
[1] 불사의 존재 :: 다른 것이 되는 삶
시간에 대한 관심이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죽지 않는 사람들>은 불멸성의 개념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불사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새로운 왕국, 새로운 제국을 헤매고 다니며 수많은 생을 산다. 불락에서 《천일야화》를 필사하기도 하고, 사마르칸드의 감옥에서 장기도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존재이며, 다른 것이 되는 삶 그 자체이다.
[2] 불사의 역설1. “불사의 존재는 수없이 죽는 존재”
그러나 불사의 존재는 강한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불락은 그렇게 많은 존재로 살았지만, 그는 또한 사마르칸드에서도 죽었을 것이고, 보헤미아에서도, 라이프치히에서도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사의 존재로서 불락은 수많은 죽음을 죽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불사의 존재란 특별한 소설적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고 확인해준다. 우리는 “불사의 존재란 수없이 죽는 존재다”라는 역설적 명제를 발견한다.
[3] 불사의 역설2. “불사는 불사의 소망을 버릴 때 가능하다”
불사의 조건 :: 죽음에 대한 무지 > 그런데 불사의 존재는 불사성에 대한 신앙, 죽지 않음에 대한 소망, 따라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불사에 대한 소망은, 그 소망에 반하여 그 때마다 닥치는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고, 그런 만큼 죽음을 불사성 안에서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들이다.” 불사에 대한 소망은 사실은 죽음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고, 죽음으로써만 가능해지는 다른 삶을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영원히 죽는다. “언제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보는 존재”, “죽음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인간적 실존”이야말로 죽음 앞에서 자신의 불사성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사의 조건 :: 불사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 > 여기서 또하나의 역설이 발견된다. 불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불사에 반하는 것이고, 따라서 불사에 대한 믿음을 쉽게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불사의 조건이라는 역설.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해 무지한 존재야말로 불사의 존재”라는 앞의 명제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불사성이란, ‘윤회’라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반복되는 삶과 죽음에 그대로 이어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불사의 존재 <······> 불사에 대한 신앙
불사의 존재 ::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 ① (불사란) 두 개의 역설을 통해 보르헤스가 말하려 하는 것은, 불사의 존재란 반복되는 죽음에 붙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사의 존재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고 다양한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이한 존재-다른 삶으로 반복되는 과정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② (죽음이란) 반면 죽음이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현재의 삶을 멈추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현재의 어떤 존재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경계이다. 불사의 삶이란 다른 삶의 계속됨으로만 존재하는 과정, 그 삶들에 있는 경계를 반복하여 넘어가는 과정, 차이의 반복으로서만 존재하는 과정이다.
불사에 대한 신앙 ::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부정하는 것 > ① 반대로 불사에 대한 신앙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긍정하지 못하는 태도이고 자신의 삶의 동일성-정체성애 대한 고집이다. 그것은 다른 삶으로 진해되는 반복을 긍정하지 못하는 것이고, 반복을 동일성 안에 가두려는 욕망이다. 그 경우 불사성은, 그 믿음과 반대로 불가능하다. ② 보르헤스의 불사 개념은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 ‘차이 나는 것만이 영원히 되돌아온다’와 겹쳐진다. 오직 차이를 포함하는 것, 변화하는 것만이 영원하다! 다시 하나를 추가할 수 있다. 오직 가변성을 뜻하는 영원성이란,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차이로서의 반복의 다른 이름이다.
불사의 삶 :: 반복되는 삶, 여행 같은 삶 > ① (여행 같은 삶) 그런데, 죽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경계,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통상적인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문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불락이 산 불사의 삶이란, 윤회처럼 반복되는 삶이며, 여행과도 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이생에서 가능한 수많은 삶) 우리 역시 ‘하나의 삶’ 안에서 수많은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생’의 삶에서만도 수많은 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빈번하게 닥쳐오는 순간바다 동일성을 고집하지 않고, 쉽게 죽을 수 있다면, 다른 삶의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한없이 반복될 불사의 과정을 항상-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5] 불사의 존재 :: 다른 사람-되기, 다른 삶-살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 :: 전적인 모방 & 제3의 인물-되기 > ①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따라서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불사의 존재일 수 있다! 소설가 보르헤스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기록-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삶을 산다. 문학이란, 작가로서 어떤 이야기를 쓰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② (전적인 모방과 제3의 인물-되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어떤 사람을 전적으로 모방하고 그 사람의 삶에 동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현재 선 지점과 가려고 하는 지점 사이에서 제3의 인물이 되는 것이다. ③ (예시) 메나르는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에 도달하는 것보다, 메나르이면서 《돈키호테》에 도달하는 것이 더 야심적이며 더 흥미로운 작업이다. 전적인 모방은 메나르의 관점이 아니라, 세르반테스의 관점에서 《돈키호테》를 쓰는 것이고, 세르겔이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세르겔은 자신을 셰익스피어로 데려가는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혀 다른 무엇을 섞는다. 반면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어떤 것도 지우지 못하며 어떤 것도 고치지 못하며, 그저 기억할 뿐 사유하지 못하며 다른 것이 되지 못한다. 차이 없는 반복의 불모성.
불멸의 존재_신 = 다른 삶을 사는 존재_나 > 이는 불멸의 존재로 간주되는 ‘신’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네가 너의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나는 세계를 꿈꾸었다.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속에서, 수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네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신 사이에, 나와 신 사이에, 혹은 세상이 모든 것과 신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구별이 사라진다. 내가 끊임없이 다른 삶을 사는 불멸의 존재라면, 내가 바로 신인 것이다.
‘나’가 ‘햄릿’이 되는 것 & ‘햄릿인 나’ > 이는 다른 사람이 될 어떤 ‘나’가 따로 존재한다거나, ‘나’라는 존재의 동일성을 가정하는 게 아니다. “나도 나가 아닌 것”이고, “나는 수많은 세계들 속에서 수많은 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어떤 ‘내’가 있고 그 ‘내’가 햄릿도 되었다가 오델로도 되었다가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때는 햄릿인 내가 있다가 다른 때는 오델로인 내가 있다. 어떤 때는 사과장수인 ‘나’가 있고, 어떤 때는 학생인 ‘나’가 있고, 또 다른 때는 감옥에 갇힌 수인인 ‘나’가 있는 것처럼.
불사의 존재 :: 자아 & 무아 > ① (자아) 수많은 ‘나’들 사이에서 하나의 동일성을 찾고자 하는 것은, 가변성 안에서 불변의 것을 찾고자하며 다른 삶들 사이에서 하나의 ‘나’를 보장받고자 하는 불사에 대한 신앙이다. 따라서 변함없는 ‘나’, 확고한 죽지 않는 ‘나’라는 자아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불사의 존재란 있을 수 없다. ② (무아) 이는 무아를 설파하는 부처의 법륜을 보르헤스가 다시 굴리려는 것이다! 불사의 존재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고, 다른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죽지 않는 사람>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불사와 불멸이란, ‘모든-사람이-되는-것’이며,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은 ‘나의 죽음 곧 무아無我임을 언명한다.
5. 알렙
[1] 신의 글, 알렙
신의 글 >보르헤스가 평생 찾아다는 것은 바로 ‘신의 글’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마술적인 하나의 문장<신의 글>”, 혹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단 한 줄의 시<거울과 가면>, 우주의 모든 책이기도 한 한권의 책<모래의 책> <바벨이 도서관>, 모든 별이기도 한 하나의 별, 모든 사람이기도 한 한명의 사람<알모따심으로의 접근>.
알렙 > 알렙은 수학적으로 모든 실수를 자신 안에 포함하는 수다. 보르헤스는 알렙을 “서로 겹치거나 투명해지는 일 없이”, 그리고 “전혀 크기의 축소 없이 모든 점들에서 본 우주의 모든 상들이 들어있는 조그만 구체”로 변형시켰다. 우주 전체를 머금은 한 알의 좁쌀(설봉이 좁쌀), 혹은 시방삼세를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먼지.
[2] 신의 글, 운드르
알렙 = 연기적 관계 전체 >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하나의 구체’는 우주 전체로 펼쳐져 있는 상호적인 관계의 망-연기적인 관계의 그물 전체이다. 즉 신의 글은 “미래에 있을 것이고, 현재에 있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서로 얽혀짜인 채 형성하고 있었다.<신의 글>” 하지만 이는 ‘알렙’이나 ‘모래의 책’ 같은 특별한 존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방삼세의 연기적인 관계 전체를 포함하는 모든 것이다. “인간의 언어들에서조차 우주 전체를 암시하지 않는 발화는 단 하나도 없다. ‘호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낳은 호랑이, 그가 삼켜버린 사슴과 거북이들이, 사슴이 뜯어먹은 목초, 목초의 어머니인 대지, 대지를 낳은 하늘을 말하는 것이다.”
운드르 = 모든 말 > 마지막 말-신의 글을 보르헤스는 경이로움을 뜻하는 ‘운드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운드르’라는 말뿐 아니라, 모든 말이 신의 말이고, 모든 말이 “그 안에 수많은 말들이 들어있는 단 하나의 말”이다<신의 글>. 하나의 먼지가 시방삼세를 다 포함하고 있듯이, 모든 먼지 또한 그러하다.
운드르 ······ 삶이 모든 것을 주는 것임을 깨닫는 것 > “삶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운드르>” 하지만 ‘운드르’는 자신의 삶이 모든 것을 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발견할 수 없는 단어다. 반대로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에서 우주 전체를 보고, 모든 말에서 신의 글을 보게 되면, 어떤 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경이로움으로 느끼게 되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을 경이로움 속에서 긍정하고 그것이 주는 우주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보르헤스가 평생을 찾아다녔던 깨달음의 징표-신의 글이었다!
댓글목록
무긍님의 댓글
무긍
발제가 정말 힘이 됩니다. 따로 따로 띄어 놓고 보아도, 감동이 오네요.
보르헤스의 힘찬 상상력이 샘을 통해 알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역시 영원회귀에 대한 낱낱의 프로세스, 이렇게 누가 먼저 써놓을 줄이야 ㅠㅠ .
늘 진지함과 열린 자세의 조화 부럽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무긍과 함께 텍스트를 읽는 해석하는 과정이 흥미롭고 즐겁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이야말로 '철학으로 하는 놀이'가 아닐까요?
무긍님의 댓글
무긍그래도 좀 김빠지네요. 억울까지는 아니지만, 영원회귀 그 단계 단계를 이렇게 누가 써놨으니, 책을 읽어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