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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2] 후기-11/11 폴 발레리 +2
소리 / 2016-11-14 / 조회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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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발레리

  발제자인 저는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아티초크 빈티지 출판사에서 나온 성귀수 시인이 옮긴 책을 참고해서 발제 했습니다. 폴 발레리의 생애를 따라 청년기(1890-1892), 침묵기 이후(1917-1922), 말년(1937-1945)의 구분을 했습니다.

  반디님이 가져오신 김현이 번역한 오래된 판본을 참고해서 함께 읽었습니다. 좋은 판본 감사합니다!!

첫 번째로, 청년기 때의 시인 <꿀벌>을 읽었습니다.

 

 

꿀벌

 

                      프랑시스 드 미오망드르에게

 

네 가시가 그렇게 가늘고

치명적이라지만, 금빛 꿀벌아,

이 다감한 꽃바구니에 나는

레이스 꿈을 한 겹 둘렀을 뿐.

 

찔러라, 사랑이 죽거나 잠드는

아름다운 호리병 젖가슴을,

동글고 당돌한 살점에

진홍빛 내가 조금 빛나게!

 

나는 반짝하는 통증이 정말 필요해.

강하고 깔끔한 고통이

하품하는 아픔보다 낫지!

 

이 미세한 금빛 경고가

부디 내 감각 일깨우길,

사랑이 죽거나 잠들지 않게끔!

 

 이 시는 소네트 형식으로 쓴 시입니다. 섹스를 묘사한 1, 2연을 지나 3, 4연에서는 시인의 지속적인 사랑을 위한 갈망을 드러냅니다. 3연의 “반짝하는 통증”과 4연의 “금빛 경고”는 권태롭게 “하품하는 아픔”을 지닌 사랑이 아닌, 강렬하게 온 감각이 꿈틀대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들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섹스를 통한 쾌락추구가 아닌, 사랑과 결합한 섹스의 강렬함을 지속시키고 싶은 남성화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라고 다들 느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희음 님은 최승자 시인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는 시를 떠올리기도 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시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찌르고 찔리는 표현과 그려지는 상황은 비슷했지만, 시적화자의 성별이 확연히도 드러났습니다. 발레리의 시는 찌르는 자의, 남성적인 화자에 의해 여체의 묘사가 되었다면, 최승자의 시에서는 찔리는 자의, 여성적인 화자에 의한 묘사와 감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여성/남성의 화자, 시인에 의한 묘사가 어떻게 다른지 확연하게 재확인 할 수 있었던 시였습니다.

 <꿀벌>에 이어 비슷하게 소네트 형식으로 쓴 <석류>를 읽었습니다. 이 시는 폴 발레리가 20년의 시작활동의 침묵기를 거치고 쓴 시입니다.

 

석류

 

알갱이들의 과잉을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아,

마치 자신의 발견들로 터져 나간

당당한 이마들을 보는 듯하여라!

 

오, 어정쩡 입 벌린 석류들,

자긍심으로 과로한 너희가

태양들을 견디다 못해

홍옥의 격막을 찢어,

 

껍질의 건조한 금빛이

어떤 힘에 부응해

과즙 붉은 보석들로 자폭하면,

 

그 찬란한 파열은

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

은밀한 건축술을.

 

  발제자인 저는 이 시가 무척이나 맘에 들었습니다. 마치 하이쿠를 읽듯 간결하고, 선명하고 빨간 석류 알들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이 시가 무척이나 감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 이 시가 석류를 통한 여성기의 은유로 보였습니다. 흥분한 여성기에 대한 묘사와 섹스로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는데 꽤나 많은 제 안의 검열기제들을 이겨내야 했었는데...ㅋㅋㅋ많은 분들의 응원으로 잘 설명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얘기가 많았던 부분은 이 시의 4연이었습니다. 4연에 대한 해석이 각각 다 달랐습니다. “그 찬란한 파열은/ 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 은밀한 건축술을”을 두고 저는, 한 존재가 겪어온 과거들을 통해 구성된 현재의 ‘나’의 굳건한 자기동일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며,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이전과 다른 것으로 재건축 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반면 희음님은 살면서 이해되지 않는 과거의 일들이 다시 이해되는 것을 표현한 구절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반디님은 20년간의 시작 활동의 침묵기를 거치고 나온 시임을 감안하여, 새로운 시기를 시작하는 작가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참 많은 해석들을 들을 수 있어 무척 즐거웠던 시입니다!

 

 

 

 세 번째로 읽은 시는 <해변의 묘지>라는 시입니다. 이 시 또한 <석류>처럼 20년 간의 침묵기를 거쳐 나온 시입니다.

 

 

해변의 묘지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생을 탐하지 말라.

다만 가능의 영역을 파고들라.

핀다로스 <아폴론 축전(퓌티아) 찬가 Ⅲ>

비둘기들 어정거리는 저 조용한 지붕,

소나무들과 무덤들 사이에서 파닥거린다.

공정한 자(者) 정오가 화염으로 짜 나간다,

항상 다시 시작하는 바다, 바다를!

오 사색에 이은 보상이여,

신들의 고요를 굽어보는 오랜 시선이여!

섬세한 광채가 극진하게 연소시키는

미세한 거품들의 무진장한 금강석이구나.

엄청난 평강(平康)을 잉태하려나 보다!

심연 위에 태양이 휴거(休居)할 때,

불멸의 인자(因子)의 순수 작동인

시간이 반짝거린다, 꿈이 깨달음이다.

견고한 보고(寶庫), 간결한 미네르바 신전,

고요함 덩어리, 가시적인 저장물,

찡그린 물이여, 불꽃의 너울 아래

그 많은 잠을 간직한 눈이여,

오 나의 침묵!... 영혼 속 축조물이여,

수많은 황금기와가 들고일어나는 지붕이여!

시간의 신전, 단 하나의 숨결이 요약하는

순수의 점으로 나는 떠오른다, 친화(親和)한다,

바다를 아우르는 시선으로 휘감아 오른다.

신들을 향한 숭고한 봉헌처럼,

청명하게 부서지는 빛부심이

지고한 경멸을 고공에 흩뿌린다.

쾌감으로 녹아드는 과일처럼,

그 형체가 사라지는 입안 가득

단맛으로 화하는 과일의 부재처럼,

연기로 피어오를 나를 지금 나는 들이마신다.

그러자 연소 중인 영혼에게 하늘이 노래한다,

웅성거리는 경계와 경계의 변화를.

아름다운 하늘, 진짜 하늘이여, 변화하는 나를 보라!

그토록 오만하고 기이한, 그러나

힘으로 가득한 무위(無爲)를 끝내고

나는 이 찬란한 공간에 나를 내어 준다.

망자의 집들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가면서

아슬아슬한 움직임에 나를 길들인다.

영혼이 태양극점 횃불에 맞서니,

나는 견딘다, 무자비하게 무장한 빛의

경탄할 만한 정의여! 나는 그대를

최초의 자리로 온전히 돌려놓으련다.

보라, 그대 자신을!...그러나 빛의 회복은

어두운 반쪽인 그림자를 전제한다.

오 나만을 위해, 나 자신의, 내 안에서,

폐부 깊숙이, 시(時)의 근원에서,

비어 있음과 빛나는 사태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어둡고 쓰라린 영혼의 공명통,

언제나 미래의 동공(洞空)으로 울려퍼질,

나의 거대한 내공(內空)의 메아리를!

무성한 잎사귀들에 사로잡힌 척하는 바다,

육지를 파고들어 앙상한 철책까지 갉아먹는 바다여,

눈부신 비밀의 눈을 감고 묻나니, 너는 아느냐,

어느 몸뚱어리가 그 나태한 목적지로 나를 끌고 가는지,

뼈가 드러나는 이 땅으로 어느 이마가 그 몸뚱어리를 끌어당기는지?

여기 한 점 불티가 나의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빛에 헌납된 땅덩어리는 닫혀 있고, 성스러우며,

질료 없이 타는 불로 충만하다.

이 장소가 나는 좋다, 화염이 지배하는 곳,

황금과 돌과 어둑한 나무들로 구축된 이곳,

그 많은 망령들 위로 그 많은 대리석들 몸서리치는데,

나의 묘석들 너머 충성스러운 바다가 잠을 자는구나!

번쩍거리는 암캐야, 우상숭배자를 내쫓아라!

홀로 목자의 미소 지으며,

수수께끼 같은 양떼, 조용한 무덤들의

백색 무리는 오래도록 내가 돌볼 테니,

허망한 꿈들, 호기심 많은 천사들,

신중한 비둘기들, 모두 내쳐라!

이곳에서 미래는 게으르다.

까칠한 곤충이 메마른 가려움을 긁어 댄다.

일체가 불에 타고, 부서지고, 공기로 돌아가

내가 모를 혹독한 본질이 되고...

부재에 취한 삶은 광활하니,

쓰라림은 달콤하고, 정신은 명징하다.

죽어서 감춰진 자들은 땅속에 잘 있다.

흙이 그들을 데워 주고 그들의 비밀을 바싹 말린다.

드높은 정오, 움직임 없는 정오는

자기 안에서 자신을 사고하고 자신에 적중하니...

완전무결한 머리여, 철두철미한 왕관이여,

나는 그대 안의 은밀한 변화다.

그대의 걱정거리는 오로지 나.

나의 후회, 나의 의혹, 나의 한계

이 모두가 거대한 금강석의 흠집...

그러나 대리석들로 무거운 밤,

나무뿔리에 휘말린 모호한 족속은

이미 그대 편으로 서서히 기울었다.

그들은 두터운 부재 속으로 녹아들었다.

붉은 진흙이 백색 종족을 집어삼켰다.

생존의 소질은 꽃들에게로 넘어갔다!

망자들의 친숙한 문장(文章)은 어디로 갔느냐?

각각의 기예(技藝), 별난 영혼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눈물이 영글던 곳으로 구더기가 기어든다.

간지럼 타는 아가씨들의 새된 신음 소리,

축축하게 젖은 눈시울, 눈, 이빨,

불장난하는 매혹적인 젖가슴,

허락한 입술에 감도는 핏기,

언약의 반지, 그걸 고수하는 손가락,

모두 지하에 묻혀 작란(作亂)에 합류한다!

그러니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꿈을 바라는가?

육신의 눈앞에 파도와 황금이 펼쳐 보이는

저 거짓 색조로 치장되지 않을 꿈을?

그대 연기가 되어 사라질 때 노래 부르겠는가?

보라! 일체가 증발하니, 나의 현존은 구멍투성이.

신성한 초조감조차 죽어 가는구나!

금빛의 어둡고 앙상한 불멸이여,

끔찍한 불멸의 월계관을 쓴 위로자여,

죽음에서 모유를 짜내고

화려한 거짓과 경건한 술수를 꾸미는 자여!

해골이 텅 비어 미소가 영원함을

그 누가 모르랴, 싫다하지 않으랴!

숱한 삽질의 무게에 짓눌린 머리들이여,

스스로 흙이 되어 우리 발자국을 뒤섞는,

깊이 파묻힌 선인(先人)들이여,

존재를 갉아먹는 진짜 구더기는 숨어 잠든 그대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놈은 생명을 먹고 산다, 나를 물고 늘어진다!

사랑일까,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증오?

그 은밀한 이빨이 어찌나 친근한지

어떤 이름이어도 어울리겠구나!

상관없다! 놈은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살점 맘에 들어하니, 잔자리에서까지,

살아 있는 그놈 먹거리로서 나는 살아간다!

제논! 가혹한 제논! 엘레아의 제논이여!

날개 달린 화살이 기어이 나를 관통했는가,

날면서 날지 않는, 그 부르르 떠는 화살이!

소리는 나를 낳고, 살촉은 나를 죽이는구나!

아, 태양이여...영혼에 거북 그림자라니,

움직이지 않고 빨리 달리는 아킬레우스여!

아니다, 아니야!...일어서라! 시대를 이어가라!

깨트려라, 나의 육체여, 저 사고의 형상을!

마셔라, 나의 가슴아, 바람의 탄생을!

바다가 뿜어 대는 싱싱한 생기가

내게 영혼을 돌려주니... 오 짜디짠 힘이여!

파도로 달려들어 산 채로 솟구치자!

오호라! 광란을 타고난 거대한 바다여,

태양의 무수한 반영들로 부글부글 구멍 난

고풍스러운 망토여, 표범 가죽이여,

고요와도 같은 술렁임 속에서,

너의 푸른 살점에 취한 절대적 히드라가

그 빛나는 꼬리를 다시 물어뜯나니,

바람이 일어난다!...살아야겠다!

광활한 대기가 나의 책을 펼치고 또 덮는다.

산산조각 난 파도가 바위로부터 튀어 오른다!

날아오르라, 눈부신 책장(冊張)들아!

깨트려라, 파도여! 통쾌한 물보라로 깨트려,

삼각돛들 모이 쪼던 그 조용한 지붕!

 

  이 시는 무척이나 유명한 발레리의 시입니다. 발레리에 대해서 잘 몰랐던 저도 살면서 한 번쯤 들어봤던 “바람이 일어난다!...살아야겠다!”라는 구절이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무척이나 긴 시이고, 모든 부분을 불어로 확인할 자신도 없어서 가장 맘에 드는 구절이자 유명하기도 한 이 구절의 불어만 찾아갔습니다.

  “바람이 일어난다!...살아야겠다!(Le vent se levé!...Il faut tenter de vivere!)”에서 일반적으로 바람이 분다는 말은 ‘il fait du vent’라고 씁니다. 상태를 서술하는 말이죠. 그러나 발레리는 ‘se lever’라는 동사를 추가하여 동작을 서술하는 말로 썼습니다. 즉, ‘바람이 분다(상태)’가 아니라 ‘바람이 일어난다’라는 동작을 강조한 것이지요. 또한 그 뒤의 “살아야겠다!(Il faut tenter de vivere!)”라는 구절 또한 작가의 의도가 명백하게 들어나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쓰는 살아야 한다라는 구절은 불어로 ‘Il faut vivere’로 씁니다. 그런데 굳이 타동사인 ‘tenter’를 추가합니다. 이 타동사의 의미는 “시도[기도]하다,해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사인데, 이것을 추가하여 굳이 안 쓰는 문장을 만든 것은 단순히 살아지는 상태가 아닌, 살아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삶, 과거의 영광, Idea에 갇힌 불멸의 삶이 아닌, 지금 여기의 ‘현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화자의 의지적인 표현은 시 곳곳에서 포착됩니다. “앙상한 불멸”의 삶이 아닌, “해골이 텅 비어 미소가 영원”한 삶을 “깨뜨”리고, 새로운 바람을 “마셔”대며 유한하지만 강렬한 현재의 삶을 살자고 화자는 시의 말미에 가며 강력하게 말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적인 삶, 현재를 살아가라는 위버맨쉬의 정신도 느껴지는 부분들이었고, 메멘토 모리의 흔적도 보이는 시였습니다.

 

 중간의 “간지럼 타는 아가씨들의 새된 신음소리~”로 시작하는 연은 번역이 별로였던 부분으로 판명났습니다. 이 부분이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도 굉장히 안 맞고, 여혐적이라 무척 거슬리는 부분이었는데 김현의 번역본을 보고 이 연은 단순히 여체와 섹스 찬양이 아닌 생명력을 표현한 아름다운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번역이 여혐...ㅡㅡ)

 

 

 네 번째 시는 <사라진 포도주>입니다. 개인적으로 <석류>와 함께 무척 맘에 들었던 시였습니다.

 

사라진 포도주

 

나는, 언젠가, 대양을 향해

(어느 하늘 아래인지는 모르겠으나)

던졌다, 허공에 봉헌하듯,

소중한 포도주 아주 조금...

 

누가 너를 버리고 싶었겠느냐, 오, 술이여?

혹시 내가 점쟁이 말을 따랐나?

어쩌면 내 심장 뜻에 따라,

피를 생각하며, 포도주를 쏟았나?

 

그 낯설지 않은 투명함이

살짝 홍조로 번지다가

다시 찾아드는 순수한 바다...

 

포도주가 사라지자, 파도가 취하더라!...

나는 보았다, 혹독한 대기로 솟구치는

지극히 심오한 형상들을...

 

 이 시는 김현 번역본에서는 제목이 <잃어버린 술>이기도 했습니다. 1연에서의 “소중한 포도주”에 대한 해석이 다양했습니다. 희음님은 이 소중한 포도주가 ‘자살이나 존재의 버림, 고뇌이다’라는 해석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라캉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여성과 달리 자기 복제를 할 수 없는 남성 화자가 자기 복제의 열망을 위해(대를 잇기 위해, 씨를 남기기 위해), 자신의 피 혹은 정액(소중한 포도주)을 제의로 바치고, 자신의 명예든, 위대한 작품이든, 권력이든 간에 아기와는 다른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기위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3연 또한 남성적 오르가즘적 구조를 그린 연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반디님은 이 시가 연애시가 될 수도 있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이 시의 4연은 김현 번역본이 훨씬 좋았습니다. “술을 잃어버리고, 물결은 취했다!/ 나는 보았다, 쓰디쓴 바람속에서/ 가장 오묘한 모습이 튀어오르는 것을” 희음 님은 이 시가 존재의 버림과 고뇌, 창작의 고통이라는 키워드로 이해한다면 4연은 자기위안의 연이 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시는 <별로 희망 없는 소망>이었습니다. 이 시는 폴 발레리가 사망한 뒤 한참 후인 2008년에 세상에 나오게 된 시입니다. 발레리의 7년 간의 연인 이었던 32차이 나는 잔 로비통에게 차이고 나서 쓴 시들이라고 합니다.

 

별로 희망 없는 소망

 

내 마음에 각인된 당신 형상 희미해지면

오, 밤새도록 나는 지독히도 갈망하리라,

나른한 몸, 순박한 영혼이 멈춘 시간 속을 헤매는

당신, 어서 잠들어 내 꿈꾸기를.

내 품에 안기는 행복한 꿈이라 생각하겠지.

그런데 생각만이 아니라, 정말로 끌어안을 거야.

한숨을 내쉬면서, 진짜 품 안에 나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당신은 내게 바짝 매달릴 거야.

눈먼 당신 욕망은 두 번이나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겠지.

그러고 나면 당신에게 떠오르는 말들이 있어, 나는

잠에 취한 당신 입술로 중얼중얼 따라할 테고.

퍼져 나가는 물결처럼 영원할 것 같은

그런 고요하고 살짝 변조된 행복에 젖어,

그윽한 당신 눈꺼풀 위로 떨어지는 내 눈물방울,

사랑의 꿈 한창인 당신 잠을 깨울지도 몰라.

그러면 우린 어둠 속에서, 날 밝도록, 하나 되어 있겠지...

 

  이 시는 무척이나 애달픈 시였습니다. 폴 발레리가 젊은 연인에게 차이고 한 달만에 죽었다는 사실이 자꾸 떠오르기도 했고, 시 자체가 주는 사랑을 잃은 사람의 심경변화가 잘 나타 슬프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여혐낭낭해서 발제하진 않았던 <절망한 사내>도 함께 읽었습니다. 우리는 노년의 폴레리가 어린 소년처럼 절망했다가, 욕했다가, 다시 체념했다고 화도 내고 슬퍼도 하게 만드는 이 에너지를 불러일으킨 잔 로비통이란 사람이 더 궁금해했습니다.

 

 폴 발레리에 대해 무지했던 제가 이번 시 세미나 발제를 계기로 공부도 하게되고, 시도 읽고 생각하면서 다양한 것을 느꼈습니다. 외국어로 쓰인 시 이해의 어려움도 마주하기도 했고, 여혐 충만한 시들을 마주하는 불쾌함도 있었고, 그것을 상쇄 할만큼 기막힌 은유와 표현들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해변의 묘지>의 상징들과 은유 하나하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함께 이 시들을 읽고 얘기 할 수 있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댓글목록

소리님의 댓글

소리

요 몇일동안 감기 때문에 약에 취한 후기를...쓰게 되었습니다. 감안하고 봐주세요! 다들 감기 조심요~!

희음님의 댓글

희음 댓글의 댓글

아고 감기로 힘드신 와중에 이렇게 험난한 작업을 완수해 내셨군요. 후기 어찌 쓸지 걱정이라시더니 대충만 중요하게 이야기 된 부분을 다 짚어주신 듯해요. 감사드립니다. 얼른 쾌차하시기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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