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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후기_틀뢴, 해방촌 오거리, 우리실업자들 +12
이응 / 2016-11-16 / 조회 3,703 

본문

틀뢴, 해방촌 오거리, 우리실업자들

1

내가 『보르헤스』를 발견한 것은 ‘니체’와 ‘우리실업자들’을 접합시킨 덕분이었다. 『보르헤스』는 ‘틀뢴’이라는 행성의 ‘해방촌 오거리’ 안쪽에서 산란스럽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 책은 「픽션들」이라는 거짓 제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1941년, 조지라는 영국인이 ‘보르헤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조악한 유머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사건은 약 55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밤 ‘우리실업자들’에 모인 우리들은 『보르헤스』의 발제에 관해 긴 시간의 논쟁을 벌였었다. 보르헤스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흐트러뜨리고, 단지 몇 명의 독자들만을 웃길 수 있는 이야기를, 다양한 모순들을 체계화시켜 진실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청안은 ‘보르헤스의 유머집을 진지하게 읽거나,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말자’는 선언문을 11쪽에 걸쳐 낭독했고, 특히 <주의!>부분을 낭독할 때는 sol에서 si’로 톤을 높임으로써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에 하파타는 ‘그것은 유머집으로만 봐서는 곤란하고, “사기를 치려면 구체적으로 쳐야 한다”는 유익한 교훈이 담긴 <사기 기술론> 혹은 <사기 기술 사례집>으로 봐야한다’고 제안했다. '우리실업자들'의 교주를 맡고 있는 오라클은 이러한 모든 논의가 매우 유익하다고 화찬하며, 『보르헤스』와 같은 책에 대해 발제문을 작성하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보일 수 있는 생각을 시간을 들여 발제하는 것은, 다만 그것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일 뿐이니, 우리는 보다 그럴 듯하고, 보다 무능력하며, 보다 게으르게 <상상의 책 위에 씌어진 주석으로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가이아와 무긍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백조는 꽁지 깃을 위아래로 살짝 흔듦으로써 기쁨을 표현했다. 장재원은 스페인어로 발제문을 작성할 생각이었으나, 이런 논의를 듣고 보니 『보르헤스』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써보는 것이 더 ‘허망하고 매력적’인 일이라고 여겨져 생각을 바꿨다. 

2
2021년 11월, 『보르헤스』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쓰는데 성공한 장재원은 하파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하파타도 『보르헤스』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쓰는 일에 흥미를 느껴, 그만 『보르헤스(2021.9)』를 완성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으면서 다른 두 권의 『보르헤스』를 들고, 두 사람은 5년만에 ‘우리실업자들’을 찾았다. 그런데 ‘우리실업자들’에는 이미 오라클의 『보르헤스(2019.8)』와 청안의 『보르헤스(2018.5)』, 백조의 『보르헤스(2020.12)』와 가이아의 『보르헤스(2019.3)』, 무긍의 『보르헤스(2018.2)』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모여서 7권의 『보르헤스』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상의했다. 그 7권은 언어상으로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보르헤스』는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로웠다. 그들은 이 모든 『보르헤스』가 하나의 농담이고 꿈이며, 우연한 사고, 속임수, 궤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때마침 해방촌 오거리를 지나가던 이응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달려왔다. 이응은 상기된 얼굴로 ‘이 책을 가지고 나가서 “신나는 화톳불”로 만드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모두 매우 기뻐하며 남산에 올라가 신나는 화톳불 축제를 벌였다. 

<7권의 보르헤스와 신나는 화톳불 축제>는 그로부터 3년 후인 2024년 11월 18일 「브리태니커 실시간 백과사전」(한국, 2024)에 등재되었다. 유희로 시작한 그들의 놀이는 사상계와 예술계에 크나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일화가 번역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앙리 곤드레와 루이스 만드레는 우리실업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시인한 바 있다. 오늘날 <7권의 보르헤스와 신나는 화톳불 축제>는 포-포-포스트모더니즘적 실험으로 간주된다. 대부분의 평가에서 통념을 깨뜨리고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놀라운 상상력과 실험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는 「브리태니커 실시간 백과사전」에는 그들이 했던 실험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백과사전 927페이지 좌측 상단에는 “진리란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으며, 우리는 매번의 책이 우리의 기대를 배반해주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는 문구가 씌여 있고, 우측 하단에는 멤버에 대한 소개가 무려 98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나, 모두 비인칭 동사들과 형용사들로만 적혀있어 요약이 불가능했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틀뢴 행성에 대한 소개와 해방촌 오거리’에 대한 주석이 꼼꼼히 달려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우리실업자들’에 대한 소개는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우리실업자들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이는 ‘우리실험자들urisilhumjadul’이 백과사전 1914쪽에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우리실험자들urisilhumjadul

: 틀뢴 행성,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공부 공동체. ‘한 마디면 될 말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린 책들(니체나 스피노자, 들뢰즈 등)’을 읽는 괴이한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책의 내용을 단순히 답습하거나, 정답이 있는 공부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모든 공부를 ‘놀이화’ 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7권의 『보르헤스』와 화톳불 축제>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2016.11.15 

 

<참고> 

「픽션들」 1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알모따심에로의 접근>,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댓글목록

벌어야했어님의 댓글

벌어야했어

운드르... 사실 이 글에 대한 반응은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싶네. 다만 글이란 것이 의도적으로 불통을 목적으로 삼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글쓴이와 읽는 이 간의 소통을 전제로 하며, 현재 이 공간의 광장적 특성상 지금 남기는 이 댓글이 불특정 다수에게 읽힐 것임을 고려할 때 '운드르'  단 한 마디로 댓글을 마치기에는 다소 불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쩔 수 없이 글이 좀 길어질 듯 하니 미리 양해바라네.
 내가 즐겨 사용한 글의 생산법, 내겐 너무도 익숙한 방식으로 생산된 글을 보고 있으니 이 곳이 처음 와보는 곳임에도 전혀 낯설지가 않네. 이 글을 보기 전까지 이 곳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이응이 오랜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지기까지 하는군. 여기 이 댓글을 쓰고 있는 이 아르헨티나와 거기 한국은 공간적으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처럼 이응에게 가까움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중요한 건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이응의 후기'라는 사건으로 우리가 묶였다는 것이지.
 아마 이런 방식의 글 생산을 처음 시도해보는 것일 텐데 매우 잘 소화해냈어. 앞으로의 이응의 글도 기대해보겠네.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이만 줄이겠네. 그럼 이만. ㅋ

PS.
 - 현시대 한국의 댓글풍으로 댓글을 쓰기 위해 애를 써보았네만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탓에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네. 너그럽게 넘어가주길 ㅋ (글의 무거운 느낌을 덜어낼 때 이렇게 끝에 ㅋ를 붙이는 것이 맞던가?)
 - 내 이름의 한국어 표기가 '벌어야했어'가 맞나? 익숙지 않은 한국어에 이름도 제대로 못쓴 건 아닌지 모르겠네. ㅋ

이응님의 댓글

이응 댓글의 댓글

역시 농담을 좋아하시는군요ㅋ 보르헤스씨.
'벌어야했어'는 한국용 가명인가요? 풀네임은 '돈-벌어야-했어'인가ㅋㅋㅋ

ps.
언제 이정도로 한국어를 구사하시게 된거죠? ㅋㅋ
'ㅋ'은 용법은 워낙 다양해서 맥락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대략은 아래와 같은 용법으로 쓰이고 있어요

ㅋ : 비웃음 or 글의 무거움을 덜어낼 때
ㅋㅋ : 문장의 뒤를 꾸며주는 말
ㅋㅋㅋ : 할말 없음
ㅋㅋㅋㅋ : 여기서부터 웃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X웃김
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 : 웃긴데 본인 이야기

무긍님의 댓글

무긍 댓글의 댓글

멍청한 나는 이제야 비밀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응님의 계략이라니.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을 저의 우둔함의 탓일까요?
아니면 미리 책을 읽지 못한 게으름의 탓일까요? 좌우간 최고 최고 최고, 여기와서 처음이네요 이런 놀람은

무긍님의 댓글

무긍

좋은 후기, 감동이 있네요. 모든 부분에 사려깊게 마음을 써주신 모습이 느껴집니다.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완벽하지 않은 인간에게, 완벽한 언어를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죠.
소통하다 못한 안타까운 지점보다, 애초에 소통 원했던 마음을 챙겨주시니, 감동입니다.
우린 모두 다르지만, 때론 하나가 됩니다.
늘,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서로 다른 부분에서, 화내기 보다, 궁금해하는 모습  좋습니다.

이응님의 댓글

이응 댓글의 댓글

완벽하지 않아서 웃기고, 완벽하지 않아서 그런 빈틈이 사랑스럽고ㅋ  우리가 바로 '우주적 농담' 아니겠어요^^
저는 어제의 대화가 너무 좋았는걸요. 이런 토론이 가능하다는거 자체가 이미 열려있는 유연한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긍님의 댓글

무긍

참 질문 있습니다. 어디다 올려야 할지 몰라서, 우리 세미나 분들께서 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  보르헤스 작품을 읽고 있습니다. 픽션들 첫 작품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에서 두번째 페이지에서 "거울과 성교"하다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무긍님의 댓글

무긍

Mirrors and copulation are abominable, for they multiply the number of mankind.
이 문장 전에, 복도 끝에 잇는 거울이 우리를 쫓아 다니며 노리고 있었다 면서 그것들은 기괴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등장인물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문제의 번역이 나오는데, 제대로된 뜻은 거울들이 겹쳐진 곳에서는 어마무시한 일이 생긴다. 왜냐면 그러한 배치들은 수많은 인간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 부연설명하자면- 거울속에 비친 사람이 또 다른 거울에 또 비춰지고, 이렇게 해서 무한에 가까운 사람의 상들이 거울에 보이기 때문이다. - 이 현상을 밤에 보면 괴기스러운 것으로 생각한 것이고, 그 다음 페이지에 그러한 시각적 인지가 바로 환영이고 또다른 하나의 권위라는 설정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역자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서술 하였습니다.
미리 못 읽고 이렇게 뒷북쳐서 죄송합니다. 이기회를 빌어 보르헤스시간 만큼은 꼭 읽어오겠습니다. 맹세 !!!!

무긍님의 댓글

무긍 댓글의 댓글

일단 쓰고 나서 후회합니다. 행여 제가 잘못 볼 수도 있으니 언제나 지적해주시고 알려주십시요. 배우겠습니다.
언제나 경우의 수는 2가지, 확률은 제 각각이지만, 100%는 드무니까요.
그리고 아직도 많이 한쿡말 쓰기 너무 힘듭니다. 맞춤법, 그리고 내용등등 모자린거 너무 많습니다.
편안하게 알려주세요. 기분 나빠도 알려주세요 왜 나쁜지도. 고치겠습니다. 불편하신 분들께는 미안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이 정도면 무긍은 보통 수준의 글쓰기로 하고 있는데요. 특별히 더 나쁘거나 하지 않고!
이제 글의 내용만 충실해지면 되겠는데요~~^_^

무긍님의 댓글

무긍 댓글의 댓글

보통은 거부합니다^^ . 아닙니다. 평균만 되도 어딥니까? 열심히 할께요!!!
그리고 거울과 성교은 바로 이런 겁니다===> http://www.ranthollywood.com/wp-content/uploads/2015/03/mirror.jpg

무긍님의 댓글

무긍 댓글의 댓글

거울과 성교는Mirrors and copulation
댓글 비번을 제가 서두르다 잘못 쳤나봅니다. 수정이 안되어서 정정합니다

가이아님의 댓글

가이아

운드르...... is hardly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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