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전집읽기]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아포리즘 1-4 발제 +5
가이아
/ 2016-10-21
/ 조회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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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하나의 사건이 위대함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점이 서로 일치해야 한다. - 사건을 실행한 이들의 위대한 감각과 사건을 체험한 이들의 위대한 감각. 무관심해진 사건들에 대해 역사는 거의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사건이 다가오는 것을 목도하는 이들은 사건을 체험하는 이들이 과연 그 사건을 적절하게 평가할 것인지 하는 근심을 갖게 된다.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자는 그 증여의 의미를 만족시키는 수취인을 발견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위대한 사람의 행위가 짧고 둔감하고 아무 결실을 얻지 못할 경우 그의 행위는 위대함을 얻지 못하게 되는데, 그에게는 자신의 행위가 지금 정말로 필연적이었다는 심오한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충분히 예리하게 목표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고 시점을 충분히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고 선택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바이로이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과연 시의적절하고 필연적인가에 대해서 우려와 의심이 제기되고 있다. 바그너에게 깊은 신뢰심을 지닌 우리는 우리가 그야말로 자기 행위의 위대함과 그것을 체험하는 이들의 위대한 감각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1872년 5월 22일의 기념사에서 바그너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고, 또한 그러한 믿음은 시대 전체에 해당되지 않으며 더욱이 현재 모습의 독일 국민 전체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이로이트의 축제를 거행하는 이들 모두는 시대에 적합치 않은 인간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들은 동시대와는 다른 곳에 자신의 고향을 두고 있는 것이며, 다른 장소에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고 정당화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결실인 ‘교양인’이 바그너가 행하고 생각한 것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패러디뿐 이며 바이로이트의 행사는 익살스러운 신문 기자의 아주 평이한 등불을 통해서만 조명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이로이트의 사건 같은 행사에 대해서는 그 어떤 사전 예고나 진행 과정, 매개 과정도 없었고, 바그너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목표나 목표에 다가가는 길을 전혀 몰랐다, 바이로이트의 행사는 예술 영역에서의 최초의 세계 일주인 것이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일 뿐 아니라 예술 자체가 발견된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의 모든 근대 예술은 위축된 예술로, 뒷전으로 물러나도 좋은 예술로 비쳤으며 또는 사치스러운 예술로 여겨지며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그너의 새로운 예술은 단지 예술에만 몰락이 다가오고 있음을 바라보는 예언자가 아니다. 패러디의 웃음이 갑작스럽게 멈추는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현재 교양에 그 경고의 손이 섬뜩하게 느껴지게 될 게 틀림없다. ‘침묵하고 순결하라!’라는 경고의 소리를 듣는 자만이 바이로이트의 행사를 바라볼 수 있는 위대한 안목이 주어지고 오로지 그러한 안목 속에서만 그 행사의 위대한 미래가 놓여 있다.
2.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의 경우 그의 생활은 성격의 모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성과 그의 가장 독창적인 능력의 모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서사적 시인의 생활은 서사적인 면을 극작가의 생활은 극적으로) 바그너 내부를 지배하고 있는 열정이 그 자체 의식이 되고 그의 본성을 포괄하는 순간부터 그의 성장 과정에서의 극적인 것은 결코 부인될 수 없다. 그러므로 손으로 더듬거나 방황하는 상태, 철없는 수많은 상태가 제거되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길을 걷고 변화하는 가운데에도 자신의 계획들을 무모하게 내던지는 가운데에도 거기에는 오로지 하나의 내면적 법칙성, 하나의 의지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계획들에 대한 설명이 매우 기이하게 들릴지라도 모든 계획들은 바로 그 하나의 의지에서 설명될 수 있다.
바그너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은 아직 드라마틱 하지 않은 시기이지만 미래에 대한 예시로서 이해할 수 있는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특성들의 병존이다. 그 특성들은 희망보다는 오히려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다. 불안하고 자극적인 정신, 온갖 사물을 포착함에 있어서 신경질적으로 초초함을 보이는 특성, 거의 병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긴장 상태에 열정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특성, 아주 평온한 마음의 순간에서 강압적이고 소란스러운 상태로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특성 등등. 엄격하고 세습적인, 가정적인 예술 훈련은 결코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정신적 윤리적 장년기가 시작되자마자 그의 인생극도 시작된다. 그의 본성은 무서울 정도로 단순화되었고 두 개의 충동 혹은 영역은 서로 분리되고 말았고 밑바닥에서는 권력을 갈망하는 강렬한 의지가 급류를 이루며 뒤집고 있었다. 아주 순수하고 자유로운 힘만이 그러한 의지에 선한 것과 자비로운 것으로의 길을 제시할 수 있었다. 만약 편협한 정신과 결합되었더라면 그러한 의지는 폭군 같은 무절제한 욕망에 의해 불행을 자초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비롭고 달콤한 마음으로 한없이 사랑스럽게 격려해주는 정신이 바그너의 앞에 내려와 그를 날개로 위로하듯 감싸주었고 그에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한 예술가가 창작해내는 인물은 예술가 자신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확실히 마음속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려낸 일련의 인물들은 어쨌든 예술가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 리엔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젠타, 탄호이저와 엘리자베트, 로엔그린과 엘자, 트리스탄과 마르케, 한스 작스, 보탄과 브륀힐데—이 모든 인물들에게는 바로 윤리적인 고귀함과 위대함이 결합된 지하수 같은 것이 흐르고 있으며 그 물은 더욱 순수하고 더욱 정화된 채로 흐른다. 신화뿐만 아니라 음악도 그렇다. <니벨룽엔의 반지>에서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윤리적인 음악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 바그너가 어떻게 생성하게 되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는 어둡고 불안하게 시작하여 질풍처럼 만족을 찾아 다녔으며 힘과 도취적인 만족을 추구하다가 종종 역겨움을 느끼면서 도망쳤고, 또한 그가 자신에게서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려고 망각, 부정, 체념을 갈구했음을 느끼게 된다. 바그너에게는 자신의 내부에서 체험하고 종교적 비밀인 양 경외시하고 있었던 아주 독자적인 근원적 경험이 있는데 그는 그 경험을 정절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수백 명이나 되는 인물에게 부여했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을 끊임 없이 선사하고자 했다. 즉 자기 본질의 한 차원은 다른 차원에 정절을 지닌다는 점, 자유롭고 몰아적인 사랑에서 정절이 유지된다는 점, 그리고 창조적이고 순진한 밝은 차원은 어둡고 무절제한 폭력적인 차원에 정절을 지킨다는 점, 이것이 그의 경험과 인식이었다.
3.
근대 속에 내던져진 모든 참된 예술가의 인생행로는 위험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바그너는 다양한 방법으로 명예와 권력에 도달할 수 있고 여러 번 평온과 만족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질식을 야기하는 악취의 형태로만 제공된다. 그의 위험은 그런 것에 유혹되거나 그러한 유혹을 거절하는 데에 있다. 쾌락과 명성을 얻기 위한 여러 종류의 근대적 방식에 대항하는 역겨움에,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방식에 의한 모든 이기적 안락에 대항하는 분노에 그의 위험이 놓여 있다 그래서 바그너는 도시를 옮겨 다녔고 동료를 바꾸었고 나라를 이동했다. 한편으로는 그의 욕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을 채우려는 그의 일반적인 어설픈 능력 혹은 그럼에도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무능력, 이 두 개의 대립에 의해 그는 마치 가시에 찔리는 것 같은 괴로움을 당했으며 끊임없는 결핍에 의해 자극 받았고 갑자기 그 결핍이 진정될 경우 엉뚱한 상상에 몰입하곤 했다. 극작가인 그가 발견해낸 수단과 탈출구는 더욱 날카로웠고 독창적이었다. 그는 그러한 수단들은 번갯불처럼 재빠르게 손에 넣었고 신속하게 그것들을 사용했다. 바그너의 삶을 아주 가까이서 애정 없이 볼 경우 그의 삶은 상당히 많은 점이 코미디, 그것도 하나의 기이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코미디의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러한 행동 가운데에서 원래 학습 민족인 독일인에게도 완전히 이상하다고 여겨질 만한 학습 기질이 발견된다. 처음엔 초보자였던 바그너는 음악과 연극 등 다방면에서 거장이 되었고 모든 기술적 사전 조건에서 발명하는 자가 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확장하는 자가 되었다. 단순한 연극의 혁신자, 진실한 인간 사회에서 예술의 위치를 발견해낸 자, 과거의 인생관을 시적으로 설명해낸 자, 철학자, 역사가, 미학자이자 비평가, 언어의 거장, 훌륭한 고대 형상에 대한 반지를 처음으로 돌려서 그 위에다 지신의 정신적 룬 문자를 새겨 넣은 신화학자이자 신화 시인…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그는 엄청난 양의 지식을 모으고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이 모든 것들이 그의 행동에의 의지를 결코 억누르지 않았으며, 개별적이고 아주 매력적인 것도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괴테와 비교해보면 그가 얼마나 비범한 지 알 수 있다. )
창조적 예술가, 투쟁적 예술가로서 그는 결코 학습과 교양 때문에 자신의 인생 행로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창조적인 힘이 그를 엄습하자 역사는 그의 손안에서 경쾌한 가락으로 변했다, 사랑과 일종의 조심스러운 경건함으로, 그러나 창작자의 고귀함으로 그 어떤 것을 형성하고 창작해내는 그리스인의 태도로 역사를 다루었는데 그에 따라 그는 개개 사건 속에 시대 전체의 전형적인 것을 집어넣어서 창작해냈고 그럼으로써 역사가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서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로엔그린>에서는 기사 문화의 중세가 육체와 영혼을 가진 하나의 형상으로 전환, <마이스터징어>는 독일적 본질에 관해… 즉 혁명이 아니라 언제나 개혁을 원하는 독일적 본질.
역사와 철학에 전념함으로써 그는 무기와 갑옷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모든 위대한 투사, 모든 위대한 고뇌자, 사색자의 무덤에서 불어오는 기분 좋은 숨결을 느꼈다. 역사에는 하나의 과제가 부여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데 즉 거칠게 숨을 쉬며 힘들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근대인으로 하여금 한번 숨을 고르게 하고 한 순간 짐을 벗어 던진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하는 과제 말이다. 오직 역사는 아주 진지하고 엄격한 의미에서 강력한 혼에서 나와야 하며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달리 더 이상 낙천주의적으로 씌어선 안 된다. (지금까지는 모든 변혁적이고 혁신적인 것에 거슬리는 아편으로서의 역할) 모든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란 사물이 어느 정도까지 불변적인 성질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며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경우 가차 없이 용감한 마음으로 변화 가능하다고 인식된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 돌진해 나가는 것이다. 대단한 실천력을 지닌 영웅다운 모습을 띠는 곳에서 바그너는 대체로 철학자다. 그리고 바로 철학자로서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채 다양한 철학 체계의 불 속을 헤쳐나갔을 뿐만 아니라 지식과 박식함의 증기 속도 거뜬히 지나갔다. 그는 한 차원 높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었다.
4.
그리스인들 이래로 문화의 발전사는 아주 짧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두 가지 과제는 세계를 그리스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그리스적인 것을 오리엔탈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역사의 진행 과정을 규정지었던 것은 바로 그 두 인자 간의 상호 충돌의 리드미컬한 놀이다. 우리의 현재 세계의 형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역사를 알고 있는 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친숙한 어떤 얼굴의 특징을 다시금 발견한 듯한 기분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 상당히 오리엔탈화된 이 세계는 다시 그리스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방식에 대항하는 일련의 계열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끌어 당기고 묶고 아주 멀리 놓여져 있는 실을 당기고 바람에 찢겨지는 것으로부터 천을 보호할 수 있는 매우 강한 힘을 지닌 자들이다.
나는 바그너에게서 그런 힘을 느끼는데 그는 개별화되어 있고 연약해진, 버려져 있는 것을 모두 묶어 서로 연결하고 있다. 그는 예술 종교 다양한 민족사를 지배하고 있지만 단순히 편찬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된 것을 합성해내고 동시에 영혼을 불어넣는 자. 즉 세계를 단순하게 조형해내는 자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에게 극장 개혁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한 개혁이 성공한다고 전제할 경우 저 더욱 고귀하고 드높은 과제를 위해서는 무엇이 행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제 그와 함께 근대인이 변화되고 개혁될지도 모를 일이다. 관습, 국가, 교육, 소통 등 여러 부문을 새롭게 하지 않은 채 극장 예술의 최고 순수한 영향력을 이끌어내는 일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 하다. 우리의 극장 제도가 얼마나 천박하고 얼마나 기이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를 단숨에 확신하기 위해선 단 하나의 수단(그리스 극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현재 모습처럼 인간은 그러한 예술에 만족해하며 자기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그리고 인간들은 결코 다르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이지 다르게 존재한 적이 있었고 그리고 현재에도 지금까지의 예술 제도들에 만족해하지 않는 인간들이 있다. 바로 이 점을 바이로이트의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대들은 준비성을 갖춘 성스러운 관객을 발견할 것이다. 이들은 더욱 지속적이고 고귀한 욕망을 향해 자신을 강화해 나가기 위하여 자기 행복의 절정에서도 자신의 모든 존재를 응집시켰다고 느끼는 감동적인 사람들이다. 그 결과 여기서 그대들은 예술가들의 가장 헌신적인 희생, 최상의 연극, 승리를 거든 모든 예술 활동의 총괄이라 할 수 있는 승리로 가득 찬 예술 작품의 창조자를 발견할 것이다. 바이로이트는 우리에게 있어서 투쟁의 날 아침에 행하는 성스러운 예식을 뜻한다. 바이로이트의 저 비극적 예술 작품의 형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개인의 투쟁, 즉 언뜻 보기에 정복하기 어려운 필연성으로서 개인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것(권력, 법칙, 전통, 계약, 그리고 사물의 모든 질서)에 대항하는 개인의 투쟁인 것이다. 개인이 정의와 사랑을 위한 싸움에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성숙하게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 이상으로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개개인이 갖는 엄청난 고난들, 모든 인간들이 지식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궁극적 통찰이란 불확실하다는 것, 능력이란 불평등하다는 것, 바로 이 모든 것들로 인해 개개인은 예술을 필요로 하게 된다. 주위의 모든 것이 괴로워하고 서로 괴로움을 끼치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인간사의 진행이 폭력, 기만, 부정으로 규정되는 한 사람들은 결코 윤리적으로 될 수 없다. 모든 인류가 지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오랫동안 서로 싸우지 않는 한 그리고 개인을 매우 현명한 방식을 통해 생활과 지식으로 인도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결코 현명해질 수 없다. 만약 자신의 투쟁, 노력, 몰락 가운데에서 그 어떤 숭고하고 의미심장한 것을 인식할 수 없다면 그리고 만약 위대한 정열의 리듬과 이 정열의 희생에 대한 쾌락을 갖는 것을 비극에서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이 그러한 엄청난 불만의 감정을 견디면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예술이란 바로 휴식을 취하는 자의 활동과도 같다. 마치 그 누구도 잠 없이 지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에서 괴로워하는 자는 그러한 가상 없이 지낼 수 없는 것이다.
개개인은 그 어떤 초개인적인 것에 헌신해야만 하며 비극은 그 점을 원한다. 죽음과 시간은 개체에게 무시무시한 불안감을 불러 일으키며 개개인은 그러한 불안감을 배워서 잊어야 한다. 어떻게 해서 비극적 사상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가에 대한 앎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기쁨은 없을 것이다.
댓글목록
청안님의 댓글
청안한동안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그너를 사랑했던 니체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발제 감사합니다.
무긍님의 댓글
무긍이해하는 소통이 사랑임을 댓글에서 새삼 느낍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바그너를 사랑하고, 바그너와 결별했던 니체의 여정이 그의 철학에 반영되었지요.
예술가는 자신의 사랑과 이별을 그의 예술작품으로 표현하지만,
철학자로서 니체는 그의 철학을 통해 표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백조님의 댓글
백조
가이아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유려하게 흐르던 발제시간!
가이아님의 생물학적 의미의 목소리는 물론 또 자신만의 생각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가이아님의 목소리도 모두 좋았습니다.^_^
무긍님의 댓글
무긍저 대신 꼼꼼하고 훌륭하신 발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