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주의 선언] 발제문_6장 코뮨주의와 타자 +1
윤도현
/ 2016-10-24
/ 조회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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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선언 > 6장 코뮨주의와 타자
1. 타자와 공동체
공동체라고 번역하는 ‘코뮨(commune)’의 어원학적 기원은 ‘선물(munis)’을 ‘나눔(com)’ 또는 그 나눔을 통해 ‘함께함(com)’이다. 선물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무엇인가?
선물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등가성의 원칙(화폐가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시민사회(시장주의적 교환에 입각)와는 다르게 상호 보답의 의무를 상대방에게 부과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인 증여의 과정을 통해 구성되고 유지된다. (예. 포틀래치)
코뮨주의(선물 공동체)에서 타자란? 구성원들은 공통성의 생산에 함께 참여할 때 오직 그때만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드러날 수 있는 본래적인 차이 자체로 공동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구성원에게 특정한 자격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타자들이 공통의 활동을 실행함으로써 공통적 관계가 창출되는 것 --> ‘개인’으로 동질화될 수 없는 타자들의 집합체, 관계 속 타자이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타자란? 인식 불가능하고 결정 불가능한 존재로 인식하며, 이는 본질적 규정으로 우리는 타자와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다고 본다.
--> 삶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타자 그 자체 혹은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다. 구체적 현실에서 내가 만나는 타자들은 어떤 특정한 관계 속에서 규정된 이들이며 그들과 맺는 공통적 관계를 우리는 공동체라 부르며, 타자와 공동체는 삶의 창조에 함께 참여하는 다양한 성분들 그 과정들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2. 얼굴의 윤리
레비나스의 얼굴의 윤리학 : 타자를 사유할 때 가장 쉬운 출발점이지만 가장 험준하고 돌파할 수 없는 불가능성으로 버티고 선 사유로 타자는 존재 너머에, 실존의 가시적인 현전을 초월해서만 만날 수 있는 신의 얼굴과 다르지 않다.
타자의 외부성을 만나려면 우리는 먼저 나의 자리 즉, 자기성(ipseitas)의 확립을 완수 해야 한다. 자기 내적 관계로서 내부성, 즉 주체의 자리는 타자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기 위한 우선적인 전제이다.
레비나스의 논의를 따른다면, 주체로서 나는 타자를 만날 수 없다. 타자가 나에게 이미 알려지고 앎의 대상이 되었다면, 그는 이제 더는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는 나와 손 잡을 수 없는 초월 너머에 존재한다.
타자의 얼굴은 우리가 마주해야 하지만 볼 수는 없는 그 무엇이다. 타자는 나와 손잡을 수 없는 초월 너머에 존재한다. 내가 주체인 것은 그런 타자를 두고 고백과 참회 속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다. 무언가를 함께 하기 위해 만날 수 없다면 나-주체와 타자는 아무런 실질적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며 공통적 관계는 더욱 불가능한 말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그치고 만다.
--> 삶의 윤리란, 서로를 갈라놓는 분리의 격자 속에 던져진 가상의 이념이 아니라, 함께 생성하는 관계를 가르키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3. 타자에서 타자 ‘들’로
현대 타자론은 전체주의의 경험, 특히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에서 촉발되었고, 따라서 타자로서 개별자를 전체와 대비해 규정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서’ 규정하고자 했다. 타자는 어떤 매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지향성 너머의 지향성이며, 앎으로 환원되지 않은 ‘다름’ 자체이다.
일요일의 예배가 일주일간의 잘못을 탕감해 줄 것이라는 ‘약자의 도덕’은 니체의 말대로 당장의 위로와 평온을 선사하는 ‘무력함의 공동체’를 낳을 수는 있어도, 새로운 공동의 삶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능력의 공동체’를 낳을 수는 없다.
오직 공통적인 것의 창조와 변이 능력만이 공동체의 복수성 혹은 복수적 공동체를 입증할 수 있다. 문제는 실체로서 타자, 실체로서 공동체가 몇 개인가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맺을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는 관계가 얼마나 다양한가, 특정관계로 환원되거나 고착되지 않는 새로운 구성 능력이 확보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4. 코뮨주의와 에티카
환대의 윤리는 초월적인 절대의 법과 내재적인 현실의 법들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지렛대 역할을 함으로 실현된다. 우리는 이념과 현실을 동시에 살고 있다. 환대의 법이 현실의 법들을 조건 짓고 다시 그 법들이 초월적 법을 실현하는 형이상학적 관계가 실재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뮨주의 공동체(사회)의 반대항은 개인(타자)이 아니라 정확히 근대적 시민사회이다. 환대 역시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선물과 현상학적인 차이는 없다. 현실 속의 관계가 구성되고 변화하며 지속하는 과정은 언제나 조건적인 게 당연하다. 타자‘들’과 맺는 관계의 구체적 양상들이야말로 공동체의, 코뮨의 조건이다.
타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채 의식을 갖고 속죄하는 것(겸허함이란 말로 포장된)은 코뮨의 삶이 아니다. ‘좋은’ 관계를 구성하고 지속하는 것이 코뮨적인 ‘함께 함’이요, ‘윤리’이자 ‘삶’이 된다면, 우리는 그런 것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코뮨적인 ‘공통성’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에 관해 다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5. 사건의 윤리 혹은 사건의 공동체
삶은 대개 주체의 관점에서 관찰된다. 그러나 주체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가 자기 삶의 완전한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책임은 주체가 타자와 맺는 관계이자 응답능력이다. 책임은 타자의 목소리에 대한 나-주체의 관심이자 반응을 의미하는데 미적 완결체로서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란 전적으로 타자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그 가능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동이란 그 행동이 이루어지는 환경 – 시간적이고 공간적 조건, 환경, 함께 있는 타자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공통성의 구성 결과인 것이다. ‘함께함’의 과정은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그들을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공통적인 것, 공동체는 주체와 타자가 지향하고 마땅히 건설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모두 함께 변화하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로써 주체와 타자를 갈라놓는 고질적인 이분법이 의미를 상실한다. 그들은 공통성의 창안과 구성에 참여하는 서로 다른 성분들이며, 그들을 함께 묶어주는 것은 동일성의 이데아가 아니라 협-조라는 공통 리듬의 감각, 그것의 ‘사건’이다.
사건 속에 객관적인 관찰자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그는 지금-여기 생성되고 있는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다. 설령 그가 의식적으로 공동체를 거부한다 해도 그의 행동, 존재 자체는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함께함’이 ‘좋은’것일 때, 즉 새로운 생성과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될 때 그런 공통성을 우리는 코뮨이라 부를 수 있다. 지금-여기 지속되고 있으며 미래로 이어지는 사건에 참여하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도덕 철학이 아닌 행동학으로서 코뮨주의의 에티카카 아닐까? ‘책임’이라는 명목으로 서로를 결박하고 구속하는 심판의 연대가 아닌, 책임 없는 공동체 혹은 공동체라는 사건.
6. 어떻게 삶을 함께 구성할 것인가?
행동은 리듬의 구성이다. 축구경기를 할 때 구성원이 자기 포지션만 고수한다면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없다. 반대로 자기 역할을 제쳐두고 남의 포지션에서 뛰려고 한다면 역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 혹은 저기라는 어느 위치가 아니라 누구라도 거기에 뛰어들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어지는 경기의 흐름이며 공의 연결, 지속이 아닐까?
결국 코뮨이란 사건을 통애 ‘너’도 변하고 ‘나’도 변하는, 모두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과정의 이름이 아닐까?
--> 코뮨주의의 에티카는 그 리듬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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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6장 코뮨주의와 타자>는 '타자'와 함께 어떻게 공동체를 구성할 것인가? 하는 주제이지요.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철학'은 불가능성으로 정의되는 존재입니다.
먼저 레비나스에 따르면, 주체로서 나는 타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타자가 나에게 이미 알려지고 앎의 대상이 되었다면, 그는 이제 더는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한편 '얼굴의 윤리'로 특징되는 레비나스의 타자는 면대면의 2자적 관계에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타자와 나는 함께 할 수 없는 삶, 곧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말합니다.
또한, 얼굴의 윤리에서 나는 '타자의 고통'에 대하여 '참회하는 주체'로서 만나게 되며,
따라서 타자와 나는 부정으로 정의되는 - 아무것도 생성할 수 없는 '불모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타자와 함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을까요?
타자와 함께 구성하는 공동체란, 타자와 함께 삶을 구성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공동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공동의 신체적 리듬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지요.
타자와 공동의 신체적 리듬을 만드는 이 과정-이 사태를 바흐친은 '사건'이라고 말했지요.
사건을 낳는 특이한 집합체로서 크로노토프(시간-공간의 집합체로서 시공간)라는 개념도 흥미로왔습니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는 타자와 공동의 신체를 리듬을 만드는 '사건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