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진리와 방법> 10/19 세미나 발제문
삼월
/ 2016-10-19
/ 조회 1,441
첨부파일
- 천재미학과 체험개념.hwp 다운 5
관련링크
본문
1부 예술경험에서 발굴하는 진리 문제
Ⅰ 미적 차원의 초월
1 정신과학에서 인문주의 전통이 지니는 의미
1) 방법의 문제
2) 인문주의의 주요 개념들
① 교양 ② 공통감각 ③ 판단력 ④ 취미
2 칸트의 비판을 통한 미학의 주관화
1) 칸트의 취미론과 천재론
① 취미의 선험적 특징 ② 자유미와 부속미에 관한 이론 ③ 미의 이상에 관한 이론
④ 자연과 예술에 있어서 미에 대한 관심 ⑤ 취미와 천재의 관계
2) 천재 미학과 체험 개념
① 천재 개념의 부각
칸트의 후계자들은 칸트가 주장한 자연미의 우위나 천재 개념을 수용하면서 예술의 입장을 좀 더 부각시켰다. 예술의 입장에서 칸트의 취미 개념은 보다 포괄적 개념이 되고, 취미는 가치 절하되었다. 칸트의 견해에 의하면 취미는 예술작품의 평가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예술미에 관하여 평가할 때 고려되어야 할 가능성은 천재성이다. 취미의 올바른 평가능력 역시 천재성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아름다운 예술에서 취미의 입장은 저절로 천재의 입장으로 이행한다. 이해의 천재성은 창조의 천재성에 부응한다.
예술에서 취미의 입장은 부차적이며, 취미의 선별력은 천재적 예술작품의 독창성과 비교할 때 균일화의 기능을 가진다. 취미는 기이하고 엄청난 것을 피하는 표층에 대한 감각이며, 예술 창작물의 독창성에 관여하지 않는다. 천재 개념을 통한 취미에 대한 반론은 10세기에도 있었다. 레싱이 프랑스혁명기의 고전주의에 반기를 들 때, 그리고 괴테의 낭만주의 시대에도 취미는 천재와 대척점에 놓여 배척되고, 손상되었다. 칸트가 취미 개념을 놓지 않는 이유는 미의 선험적 의도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예술철학의 특수한 문제들로 이행하면서 스스로 취미의 입장을 넘어선다. 이때 칸트가 언급하는 것은 취미의 완성이다. 취미의 규범적 성격은 취미의 형성과 완전성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칸트에 의하면 완성된 취미는 일정한 불변의 형식을 취한다.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이 논의는 취미의 상대주의를 종식시키고 취미의 절대주의에 대한 포석을 놓으려는 칸트의 의도를 담고 있다. 결국 칸트가 완성된 취미의 이념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천재 개념의 좀 더 풍부한 정의이다. 따라서 완성된 취미 이념을 자연미의 영역에 적용해서는 곤란하다.
결국에는 자연과 예술 모두에서 완성된 취미 개념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연의 미에는 완전성의 정도에 의한 서열을 둘 수 없고, 예술은 아름다움의 고유한 원리를 스스로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취미의 가변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취미 개념의 왜곡이다. 취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의 가변성과 모든 인간적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증거이다. 예술의 선험적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칸트의 천재 개념을 보편적 미의 원리로 이용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시대의 불변성에 대한 요구도 취미보다는 천재 개념이 더 잘 충족시킨다. 이때 취미를 예술의 천재성에 대한 확실한 감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술은 천재의 솜씨’라고 한 칸트의 명제가 미학 일반의 선험적 기본 명제가 된다. 그리고 미학은 예술의 철학으로서만 가능하다.
독일 관념론은 선험적 구상력에 관한 칸트의 이론을 미학에서 조금 다르게 재구성하였다. 예술의 입장, 즉 무의식적인 천재적 창조의 입장은 포괄적인 것이 되고, 정신의 산물로 이해되는 자연을 포괄하게 되었다. 이런 이해는 미학의 기반에 변화를 가져왔다. 자연미 개념의 가치가 떨어졌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도덕적 관심은 밀려났다. 자연미는 이제 미학의 체계 안에서 자립적 계기가 되지 못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시대의 영향을 받는 예술적 취미에 종속되고, 헤겔의 미학은 철저히 예술의 입장에 서 있게 된다. 이제 인간은 예술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고, 정신이 정신을 만나게 된다.
철학과 마찬가지로 근대 미학도 사변적 관념론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중엽 이에 대한 비판이 칸트의 부활을 요구했지만, '칸트의 복귀‘는 실제의 복귀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술과 천재 개념이 미학의 중심에 서게 되고, 자연미와 취미 개념은 더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칸트가 예술가에 한정했던 천재 개념은 19세기에 이르면 더 보편적인 가치 개념이 되고, 창조성 개념과 하나가 되어 신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무의식적 생산이라는 낭만주의적·관념론적 개념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다. 칸트의 의도는 미적 판단을 생의 감정의 주관적 경험독립성, 즉 인식 일반에 대한 능력의 조화 위에 두고 개념의 척도에서 독립된 미학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이 의도는 19세기의 비합리주의와 천재 숭배에 부합했다. ‘생의 감정의 고양’이라는 칸트의 이론은 ‘천재’ 개념이 포괄적인 생의 개념으로 발전되는 것을 촉진했다.
② ‘체험’이라는 낱말의 역사에 관하여
독일어 'Erlebnis'(체험)라는 말은 1870년대에 와서 통용된 조어이다. 헤겔의 편지에서 이 말이 처음 발견되었고, 1870년대에는 전기문학 등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괴테(1749 ~ 1832) 시대 많이 사용되었던 ‘erleben(체험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erleben이라는 단어에는 현실적인 것이 포착되는 직접성의 어조가 있다. 우리가 안다고 믿지만 체험을 통한 확증이 결여된 것이며, 추론이나 상상한 것들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체험된 것은 항상 자기가 체험한 것이다. 전기문학에서 'Erlebnis'(체험)가 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로 체험의 의미를 따져볼 수 있다. 19세기 전기의 본질은 생애를 통해 작품을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전기는 체험을 하나의 생산적 연관성으로 인식한다. 무언가 체험되었다는 것은 그 체험이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제 체험은 예술의 표현에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다.
체험이라는 낱말에 처음으로 개념적 기능을 부여한 사람은 딜타이였다. 그러나 체험의 개념과 작용하는 동기들이 딜타이에게는 적절한 방식으로 분리될 수 있다. 딜타이에게는 ‘체험’이라는 단어의 고정된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Erlebnis'(체험)라는 개념은 분명 계몽 시대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루소로부터 출발하여 생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체험의 신성화를 통한, 냉철한 합리주의와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저항은 낭만주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③ 체험의 개념
딜타이의 체험개념은 범신론적 계기와 실증주의적 계기, 즉 체험과 체험의 결과라는 두 계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딜타이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과학의 연구 과제를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기, 인식론 그 자체의 동기이다. 역사적 의식이 전승에 대해 취하는 새로운 거리는 체험의 개념에 인식론적 기능을 부여한다. 19세기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이 경험과 연구에 대해 지녔던 열정을 그대로 모방한다. 이는 19세기 정신과학이 역사적 세계에 대해 느꼈던 이질성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과거의 정신적 창조물이 된 예술과 역사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며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동기이다.
딜타이는 이 동기를 소여라고 표현하면서, 이 소여의 독특한 성격을 ‘체험’개념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다. 소여는 내재적 의식화를 통해 규정되며, 역사적 세계의 인식을 인식론적으로 정당화시킨다. 역사적 대상의 해석이 소급하는 일차적 소여는 의미의 통일체다. 체험 안에서 의식 내의 소여는 궁극적 통일체로 환원될 수 있다. 체험의 통일체는 그 자체로 의미의 통일체다. 결국 소여의 통일성이란 체험의 통일성이다. 체험 개념을 통해 생의 개념이 정신과학의 인식론에 등장한다. 생의 개념이 고려되는 지점은 목적론에 있다. 딜타이에게 생은 생산성 그 자체다. 의미에 대한 모든 이해란 ‘생의 객관화를, 이것이 유래하게 된 정신적 생동성으로 다시 옮기는 작업’이다. 따라서 체험 개념은 객관적인 것에 대한 모든 인식의 인식론적 기반이 된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체험 개념은 통속적 의미의 체험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후설에게 체험은 실재적 체험이 아니라 지향적 관계이다. 딜타이와 후설, 생철학과 현상학 모두에서 체험 개념은 순전히 인식론적 개념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체험 개념은 개념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목적론적 의미로 사용된다. 체험이라고 불리거나 인정되는 것들은, 그 자체의 의미를 통해 의미 전체의 통일체와 결합되어 있다. 체험은 회상 속에서 구성된다. 한 사람이 어떤 경험을 지속적 내용으로 소유하는 것이 바로 체험이다. 또 체험은 개념에 대한 생의 대립 또한 포함한다. 체험이 가진 직접성은 모든 사념 작용에서 벗어난다. 체험된 것은 자기의 통일체에 속하며, 생 전체와 바꾸거나 대체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자서전 혹은 전기적 반성에서 체험된 것의 의미가 규정된다면, 이 반성은 생의 운동 전체 속에 용해되어 끊임없이 생의 운동을 동반한다. ‘심원한 인간에게는 모든 체험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니체의 말에서 체험의 존재방식을 알 수 있다. 체험이란 빨리 망각되지 않으며, 긴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원칙적으로 경험된 내용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강조하여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각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생과 체험의 관계에서 비판적 방법에 의한 심리학 이념이 나타난다. 사유 심리학 개념을 기초한 나토르프와 베르그송이 기존 심리학을 비판하면서, 의식과 시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야기했다. 베르그송은 ‘지속’개념을 통해 심리의 절대적 연속성을 설명하면서, 이것이 살아있는 것의 존재방식이라고 규정했다.
생과 체험의 관계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가 아니다. 체험의 통일성은 생의 전체, 즉 생의 총체성과 직접 관계가 있다. 짐멜은 이런 측면에서 생의 개념을 ‘생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생의 자기 초월)로 분석했다. 순간적 체험에서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은 체험이 대상을 통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넘어선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모든 개개의 체험은 ‘무한한 생의 한 계기’이다. 여기서 짐멜이 눈여겨보는 점은 객체가 상과 표상일 뿐 아니라 생의 과정 자체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또 모든 체험은 어느 정도 모험의 특성을 지닌다. 모험은 사물의 일상적 진행을 중단시키지만, 그 중단의 연관성에 의미심장하게 관여한다. 생 전체를 넓고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는 데에 모험의 매력이 있다. 동시에 모험은 예외적인 것이며, 일상으로의 복귀와 떨어질 수 없다. 때문에 모험은 성숙을 위한 시련처럼 시험으로 통과된다. 사실 모든 체험에는 모험적 요소가 있다. 개개의 체험은 생의 연속성에서 돌출하며, 동시에 생 전체에 관계된다. 체험 자체는 생의 전체 안에 있고 동시에 전체는 체험 안에 현전한다.
체험 일반의 구조와 미의 존재양식은 유사하다. 미적 체험은 다른 체험들과 나란히 있는 일종의 체험이면서 본질적 양식을 대표한다. 예술작품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 세계이듯이 미적 체험 역시 체험으로서 모든 현실과의 관계에서 독립되어 있다. 예술작품은 체험하는 사람들을 일거에 그의 삶의 연관성과 분리함과 동시에 그를 자신의 삶 전체로 되돌려 연관시킨다. 예술체험의 대상은 특유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의 의미 전체를 대표하는 일종의 충만한 의미이다. 미적 체험은 전체를 직접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에 어떤 무한한 전체의 경험을 내포한다. 이때 예술작품은 생의 상징적 표현의 완성으로 이해되며, 예술작품 자체가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 특별히 취급된다. 이런 이유로 미학에서 체험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