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세미나 11] 9월 30일(전이) 후기 +2
희음
/ 2016-10-06
/ 조회 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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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늦었네요. 선우 님께서 발 빠르게 '분석가의 현존' 부분에 대한 핵심이 될 만한 내용을 텍스트를 기반으로 정리해서 올리셨군요. 저는 그럼 저의 의견 위주로 후기를 써 보겠습니다. 물론 이 또한 텍스트가 그 중심입니다.
라캉은 우선 기존의 정신분석학자들과 에고심리학자들이 바라보던 전이 개념에 대한 시선, 즉 그것의 비현실성, 비합리성에 대한 의심과 비판으로부터 전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전이를 단지 비현실적인 것, 투사에 불과하고 착각에 불과하고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면서, 합리적인 자아의 편에 서서 그렇게 뭔가 잘못 된 것들과 맞서 싸우도록 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라캉은 그것이 정말 착각인가? 그 속에 욕망의 진실이 있지는 않나? 그렇게 잘못 된 것들 안에 진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환자의 '건강한' 자아가 분석가와 연대하여 전이된 내용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할 때, 라캉은 왜 문지기에게만 말을 걸고 있느냐고, '미녀가 덧문 뒤에서 그 덧문이 다시 열리기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의식의 담화는 닫힘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바깥에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이란 것이 설령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오로지 진리에 호소하며 진리를 촉구한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이 말은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진리 자체가 가리키는 내용으로부터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진리를 향해 치달아가려고 하느냐라는 윤리적 내용을 통해 판가름된다는 말일 테지요. 전이 개념에도 이것이 대입될 수 있습니다. 전이라는 것이, 뭔가 이상하게 비틀려 있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현실의 내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이란 과거의 무의식적 내용물이 현재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라캉의 문장으로는 '전이는 무의식의 현실을 현행화하는 것이다'라고 옮길 수 있겠습니다. 표상들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표상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도, 전이를 진리 아닌 것, 현실에서 쫓아내버려야 할 것, 비합리적인 군더더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분석가의 현존을 라캉이 그토록 강조한 것 또한 이러한 전이의 내용, 전이라는 또 다른 현실과 관련 지어 생각할 수 있을 듯합니다. 기억해 낼 수 없는 것 앞에서, 환자는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이 떠올랐다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당신의 숨 소리, 당신의 체취를 기억해 냈다고. 환자는 그렇게 분석가의 육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육체, 그 생생함이 다름 아닌 분석가의 현존 아닐까요. 환자의 대상 A의 자리에 바로 그것이 놓이는 것일 테고요. 라캉은 분석가에게 바로 그것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전이 속으로 기꺼이 함께 들라고 말합니다. 반복되는 것이 무의식의 구조라면, 환자의 무의식이 현행화된 그것의 동일한 라인 위에, 그 구조 안에 분석가는 이미 놓여 있는 것이라고, 놓여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수 샘께서 분석가의 현존을 신 혹은 아버지의 위상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고 했는데, 제가 읽어낸 그것은 이와는 조금 다른 입장이죠. 그 위상이라는 것을 분석가의 욕망으로는 치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석가 아브라함이 완벽한 어머니가 되고 싶어했고 페렌치가 아버지이면서 아들이고 싶어했고 뉜베르크가 삶과 죽음의 재량권을 쥐고 있는 자처럼 행동한 예를 보더라도요. 그런데 이를 '분석가의 현존'과는 다른 층위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이 과정에 뛰어 든, 혹은 처음부터 그 안에 있었던 분석가의 현존을 라캉이 강조한 것은, 오히려 그 재현된 내용이 어떤 것이든 무의식이 추구하는 진리의 방향과 나란해지고자 하는, 환자의 무의식이라는 현실의 땅에 환자와 함께 맨발로 내려서고자 하는 윤리적 차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라캉은 분석가의 현존을 찌꺼기라는 말로도 빗대는데요. 이 단어, caputortuum은 죽음의 머리, 해골로써, 연금술사들이 증류를 하여 영혼이 날아가고 난 뒤에 남는 찌꺼기라는 뜻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전이란 '무의식이 닫히는 순간'이자 '전이를 있는 그대로, 즉 하나의 매듭으로 다뤄야 한다'는 라캉의 말과 연결지어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기억들이 미끄러지고 입을 다물게 되는 순간, 시니피앙의 연쇄를 잘라먹게 되는 순간, 전이라는 픽션(무의식의 현행화)은 하나의 '매듭'으로 드러나고, 또 그것은 분석가의 현존('찌꺼기')을 배제하고서는 현행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그 '찌꺼기'란 전이의 수단이며 목적이며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말로 읽히기도 합니다.
헥헥, 이 정도로 그 날의 후기를 마감하고자 합니다. 후기 쓰는 작업, 참 괴롭고 지난하지만 나름 유익하다는 생각을 맞닥뜨릴 때마다 하게 됩니다. 내용 중 더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꽤 있을 텐데, 댓글 논의든 오프라인 논의든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잘읽었어요 희음님.
이렇게 한번 읽어서는 논의는 어렵겠어요. 아시잖아요ㅋㅋ
희음님의 댓글
희음
지난 시간 다룬 내용에 대한 논의는커녕, 충동 부분 얘기하기에도 벅찬 시간이었죠.
하지만 나름의 벅차오름의 시간! 공백과 영혼의 장으로 은근슬쩍 잠입해 보았던 '소소한 왕건이'의 시간!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