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정신의학의 권력] 10월 7일 후기 +5
라차
/ 2016-10-07
/ 조회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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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으로서의 진실과 사건으로서의 진실 - 생각정리
우리가 사건으로의 진실로서 회복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어쨌거나 학습된 썸씽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사건으로서의 진실, 즉 산출되는 진실을 대면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산출되는 주체는 늘 새로운 어떤 것일 텐데)
주체를 왜 그토록 확신할까?
주체의 해석학에서
주체 = I 는 아닐텐데...
그리고 주체가 어떻게 하나냐고.
왜 하나라는 베이스를 깔아놓는 걸까?
나는 카트린느 X이자 Y이자 Z일 뿐
영원히 카트린느는 될 수 없다.
세상이 나에게 카트린느를 강요하지만
그런 세상의 의지는 영원히 성취될 수 없을 것.
인간으로, 지금 이 시대에, 이런 사회에 태어난 한계를 고려해야 하지 않나?
우리는 어차피 부분적 진실만을 알 수 있는 양태이지 않은가?
사건이후에 그 사건의 진실을 붙들고 평생을 사는 것은 또 하나의 논증으로서의 진실세계를 구축하는 것 아닐까?
사건을 만나서 주체를 회복하거나 새로운 주체를 만나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일상일 뿐이다.
늘 불안한, 토대없는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
양태의 숙명이니까
우리는 용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거 아닐까?
Walking
댓글목록
라차님의 댓글
라차
집에 가다가 생각 정리가 필요할 거 같아서.. 적어봤어여.
유택님께 보냈더니.. 이런 게 후기래요.
세미나 후반에 기운 너무 뺏어서 죄송한 마음;;
다들 굿밤이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
이번 세미나에서 부재했던 삼월의 자리가 큰 것으로 판명됨. ㅎ
삼월이가 있었으면 뭔가 한마디 했을거 같은디..
여튼 마지막 <주체의 해석학>과 <진실의 용기>까지
지치지 말고 끝까지 읽어보자고요~ *^^*
삼월님의 댓글
삼월
기억을 더듬어 작년 이맘때 쯤 읽었던 <주체의 해석학>을 떠올려보면,
푸코는 주체가 진실에 어떻게 다가가는가, 혹은 진실을 어떻게 획득하는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름과 나이, 성별, 직업 같은 정체성들은 사회 속의 구분이나 역할일 뿐 나의 진실은 아닙니다.
천 조각들을 기워 만든 옷 같은 것일 뿐이지요.
까트린느 X는 이 옷을 벗어던지고, 그것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었다는 진실에 도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체가 진실에 다가가거나, 진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가가 따릅니다.
그 대가는 주체의 변형입니다.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주체를 변형시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소수성의 자각, 혐오나 폭력의 경험, 거대한 권력메커니즘 안에서 경험하는 희생,
그리고 포식자 혹은 권력메커니즘을 유지하게 하는 자로서의 자각 같은 것을
저는 그런 사건이나 진실이라고 봅니다.
구체적으로는 밀양 송전탑 사건 피해 주민들, 세월호의 희생자 가족들, 성소수자들의 문제 제기,
여성혐오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활동들에서 주체의 변형과 진실을 봅니다.
이렇게 진실을 직시하고 변형된 주체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까트린느 X가 과거의 자신을 3인칭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아라차님 말대로 용자가 되는 길 뿐.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이죠.
용기가 없으면, 개돼지 소리를 들어도 그저 허탈하게 고개만 끄덕이다가 잊어버리겠지요.
희음님의 댓글
희음
라차 님과 삼월 님 말씀을 듣다 보니, 푸코의 주체는 들뢰즈가 말하는 그것과도 통하는구나 싶어요. 주체와 관련하여 처음부터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고 그것은 우연한 하나가 우연한 또 다른 하나의 무엇과 접속하면서 나아가는 방향의 끝에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던.
물론 들뢰즈보다는 푸코의 이론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삼월 님께서 이리도 피부에 와 닿는 현재적인 예시들로 잘 풀어주신 덕분이겠지만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정신의학권력>이 475페이지 6주에 끝나잖아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314페이지 6주로 반장님이 잡았는데 너무 길지 않나요? 5주로 줄이고 빨리 그 다음책으로 넘어가고프네요. 이번주 금요일날 이야기해봐요 그럼 총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