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10월 14일 발제 & 7일 후기 +2
유택
/ 2016-10-10
/ 조회 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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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Foucault & Daniel Defert
<정신의학의 권력 11강 발제> 10월14일
의학과 정신의학에서의 진단 문제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의학적 고비가 사라지게 된 원인, 그것은 병리해부학의 출현이었다. 병변이 기질적으로 지정되고 감별진단이 가능하게 되는 이런 조건 아래서 병에 고유한 진실을 산출하는 시련으로서의 고비는 이제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이에 비해 정신의학에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첫째, 정신의학에서의 문제가 실은 감별진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결정 혹은 절대진단(‘이것은 광기인가 아닌가?’)이 중요하다는 것. 둘째, 정신의학은 신체가 부재하는 의학이다. 고로 고비 청산이 불가능했다.
정신의학적 질병분류학에서의 신체의 위치 : 전신성 마비 모델 (여기가 좀 이해가 잘 안되네요..)
전신성 마비에는 광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마비와 치매의 착종만이 존재할 뿐이다.
의학과 정신의학에서 고비 개념이 처한 운명
정신의학의 문제는 (일반 의학과 달리 ‘절대진단’과 ‘신체의 부재’로 인해 고비 청산이 불가능하여) 바로 절대진단의 요청에 답할 수 있는 어떤 시련 내지 일련의 시련을 구성하고 설정하는 것이다. 즉 현실성 혹은 비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련, 광기라고 상정되는 것을 현실의 영역에 편입시키거나 비현실로서 가치를 박탈하기 위한 시련을 구성하고 설정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현실성의 시련) 정신의학적 시련은 한편으로는 감금의 요청을 병으로서 구성하는 시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감금의 결정을 내리는 권력을 갖는 자를 의사로서 기능시키는 시련인 것이다.
정신의학에서 현실성의 시련과 그 형태들 :
병을 현실화하는 시련이 정신과 의사에게 의사로서의 지위를 확립시키고, 행정적 요청을 징후로서 기능시킬 때 이용되는 세 개의 기술이 있다. 병을 현실화하기 위한 세가지 도구 : ①심문 ②마약 ③최면
1). 심문과 고백, 임상 제시의 의례, ‘병리적 유전’과 퇴행에 관한 주석
①정신의학적 심문은 유전을 지정하는 체계를 통해 하나의 신체를 구축하고 신체를 갖고 있지 않았던 하나의 병에 신체를 부여한다. ②그런 병을 중심으로, 또 그런 병을 병으로서 포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신의학적 심문은 비정상의 한 영역을 구성한다. ③정신의학적 심문은 하나의 요청에 입각해 여러 징후를 만들어낸다. ④정신의학적 심문은 고백 속에서, 혹은 중핵적 징후의 현실화 속에서 나타나고 현동화되는 병리적 중심을 따로 떼어내 그 윤곽을 묘사하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심문은 기질적 의학에서의 감별진단 활동을 특징짓는 요소들을 19세기 정신의학 안에서 정확하게 재구성하기 위한 일정한 방식이다. 심문은 먼저 하나의 행위가 광기로서 현실화되고, 다음으로 광기가 병으로서 현실화되며, 마지막으로 광인의 관리인이 의사로서 현실화되는 수준이다.
2). 마약, 모로 드 투르와 하시시, 광기와 꿈
마약의 사용, 마약의 효과와 정신질환 징후의 동일시는, 모르 드 투르에 의하면, 광기를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사에게 부여한다. 거기서 가능해지는 것은 한편으로는 인위적 재현이다. 광기의 모든 징후가 전개될 수 있는 유일한 ‘토대’ 같은 것이 하시시를 통해 발견될 수 있게 된다. 이 병의 중심, 병리해부학자들이 운 좋게도 신체의 한 지점에서 파악하고 고정시킬 수 있었던 그 병의 중심이 하시시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얻어지게 된다. 요컨대 정신과 의사가 결여하고 있었던 그 신체, 그 명증성의 지반, 실험을 통한 검증을 위한 그 심급을 정신과 의사는 자신의 경험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된다. 정신과 의사의 의한 이해라는 형태를 취하는 광기의 완전히 새로운 포착법이 기초된다. 본원적 ‘토대’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꿈이다. 정상적인 개인 안에서 발견할 수 있고, 바로 광기의 이해가능성의 원리 역할을 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꿈, 바로 이것이 하시시의 경험을 통해 열리는 것이다. (푸코의 지적처럼 꿈과 광기 산출의 메커니즘이 유사하다는 생각은 17세기에 발전한다-주석) 따라서 마약이란 각성 속으로 주입된 꿈이며, 소위 꿈에 의해 중독된 각성이다. 그것은 광기의 실현 그 자체이다.
3). 자기요법과 최면
18세기 말의 자기요법은 결국 고전적인 고비에서 의사의 임무였던 것을 환자 자신에게 맡기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고전적인 고비에서 의사는 병이 어떤 것인지를 예견하고, 병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를 간파하며, 고비 도중에 병을 조정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정통파 메스머리즘 신봉자가 실천하는 자기요법의 내부에서 [문제는] 환자 자신을 자신의 병의 본성이나 절차가 어떤 것인 것,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되는지를 실제로 인식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만드는 것이 된다. 최면에 걸린 그 순간부터 주체가 놓이는 상태로서의 최면상태는 의사에게 환자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렇게 수용된 최면속에서 정신의학적 실천이 그때까지 결여하고 있는 환자의 신체가 규정된다. 최면은 정신과 의사가 실제로 환자의 신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심문보다도 훨씬 더 완벽도가 높고 훨씬 더 진전된 새로운 방식이다. 정신의학의 권력을 병리해부학을 통해서는 광기가 기능하는 방식과 그 메커니즘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래로 그 권력으로부터 빠져나갔던 환자의 신체에 드디어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경학적 신체’의 발견
단순히 기관과 조직으로 이뤄진 신체가 아니라 기능, 수행 능력, 행동양식으로 이뤄진 신체, 즉 신경학적 신체가 발견된다. 바로 이 순간에 심문(책418에는 ‘의학’이라고 되어 있는데 틀린거죠?), 최면, 마약의 기술에 의해 발견된지 얼마 안 되는 이 새로운 신체를 작동시킴으로써 드디어 광기의 메커니즘을 감별적 인식체계, 요컨대 본질적으로 병리해부학 내지 병리생리학에 기초한 의학 안으로 편입시키려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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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의 권력> 10월 7일 후기
Michel Foucault & Edmund White
푸코가 말하길 진실의 계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요. 무려(ㅋㅋㅋ) 22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사건으로서의 진실(발생되는 진실, 산출되는 진실)과 근래 들어 생겨난 논증(확증적인, 발견되는, 항상적인 진실)으로서의 진실. 그런데 뭐 칼로 무 자르듯 어디까지가 이런 계보고 어디까지가 저런 계보다 라고 말하긴 그렇지 않을까요? 사건으로서의 진실 쳬계가 주류였을 22세기(우와~~ㅎㅎ) 동안의 시절에도, 발견으로서의 진실쳬계 또한 자그나마하게 공존하지 않았을까요? 항상 대답을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반반이다’으로 했을 때 틀릴 가능성이 적으니까. ㅋ 지난 세미나 시간 막판에 이 두 진실 계보에 필 받고, 거기에 ‘주체’까지 얹어져서 완전 열띤 토론의 장이 되었는데요. 시간이 부족해서 걷는이님은 중간에 퇴근? 하셨고 나머지도 아쉽게 세미나를 끝냈죠. 소리는 이런 열띤 세미나 처음인거 같다고 했고! ㅎ 그만큼 아라차의 공이 커요. ^^ 지금 생각해봐도 아직 잘 정리가 안 되지만 (당시 삼월은 그 자리에 없어서 내가 믄 소리 하는지 갸우뚱 할 듯 ㅋㅋ) 저의 결론은… 콜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의 마지막 <진실의 용기>까지 다 읽고 다시 생각해보자 입니다. 아라차의 <진실/주체/까뜨린 X>에 대한 생각은 제겐 여전히 좀 허무(시니컬)하게 느껴지네요. 그래서 아마도 세미나 시간에 동조하지 못하고 계속 안티를 걸었던 것 같고. ㅎㅎㅎ 여튼 전 푸코의 마지막 저작까지 가 볼 작정이랍니다.
지지난주에 수유N 토요인문학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에 관한 수업 시간에 봤던 푸코와 푸코의 연인 ‘다니엘 드페르’의 단란했던 사진이 인상 깊었어요. 푸코의 연인 관계는 허벌난! open relationship 이었을까 어땠을까 하는 가쉽성 궁금증도 일고.. 또 어떤 사진에는 에드문트 화이트(Edmund White 미국 유명 게이 작가)의 허리를 꼭 감싸안고 황홀(?)해하는 미소에 깜놀하기도 하며…ㅎ [에드문트 화이트가 2014년에 쓴 푸코와의 친구시절(1981)을 회상하며 쓴 글] https://foucaultnews.com/2014/03/09/edmund-white-foucault/ 푸코의 강의록 <비정상인들> <정신의학의 권력> 2권을 이제 겨우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상태임) 다 읽고서 지금 문득 드는 생각은… 어마어마한, 푸코의 정신줄 놓게 만드는, 이 미로와 같은 생각들을 따라가며 지금 헉헉대는 나는 ‘고비’/‘시련’의 한가운데에 있구나 하는 하는 생각. ㅎㅎㅎ 그래도 그 다음책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뒤적이는 욕심을 보면 고비이고 시련이기는 하나 그것마저 황홀하고 고맙기도 하다는… ^^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아직 책 읽을 엄두도 못 내고, 내일 세미나 준비에 허덕이고 있는데
벌써 세미나 발제가 올라옵니다. ㅎㅎ
지난번에는 몹시 당황하여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으나,
이번에는 조금 평정심을 찾으려고 해봅니다.
그나저나 제가 없는 지난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요?
사건으로서의 진실과 주체의 문제는 아직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아라차님 글에 댓글로 대충 정리해놓은 게 있는데,
그 내용처럼 나중에 푸코 후기 저작의 큰 줄기를 이루는 핵심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해가 안 가셔도 크게 상관은 없을 듯 합니다.
그러니 금요일에 책 다 읽고(저 말임당 ㅠㅠ) 무사히 만나요~~
라차님의 댓글
라차
헐 벌써 발제를... 전 오늘 시작하는디요ㅠㅠ
이번엔 카트린느A가 발제할 듯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