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백래시> 0714 세미나 발제문
소리
/ 2018-07-14
/ 조회 1,424
첨부파일
- 백래시 1장 발제문.docx 다운 22
관련링크
본문
1장 프롤로그: 그건 페미니즘 탓이야
이 책의 15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팔루디는 ‘아텔란테 이야기’를 한다. 황금 사과를 줍다가 달리기 경주에서 지고 자신의 자유를 잃게 된 아텔란타 이야기. 팔루디는 아텔란테의 모습이 흡사 20세기의 미국 여성들의 자화상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21세기의 미국도, 한국도, 전 세계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유인으로서의 독립을 유지하는 여성이 어떤 식으로 그 자리를 잃게 되는 위기에 있는지를, 그런 위험은 또 얼마나 교묘하고 많은지를 말이다.
우리는 20세기의 미국의 여성 운동들과 사회를 보며, 현재에도 유효한 백래시 현장의 한국 사회를 살펴볼 것이다. 물론 20세기의 미국의 모습이 21세기의 한국의 모습보다 진보적이고, 여성운동의 성과가 더 많아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팔루디가 분석한 여성의 얼굴을 한 백래시의 진짜 모습이다.
미디어와 망상들
미국의 많은 미디어 속에서 여성 운동은 승리했으며, 이것이 여성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더 이상의 성취가 필요 없을만큼 충분하다고 떠들어댄다. 여기에 여성들에게 집중된 가난과 결혼할 남자들이 없는 현상 등등의 여성들의 고통이 여성운동의 결과라고 지목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단순히 잡지나 신문만이 아니라 영화, 드라마, 모든 미디어를 통해 전달된다.
이에 팔루디는 묻는다. 여성운동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왜 성인 빈곤층의 2/3가 여성이며, 동일 노동을 해도 75%(한국은 63%)의 임금 밖에 받지 못하며, 대졸 여성은 고졸 남성에 비해 더 적게 돈을 버는 것인가? 여성들이 해냈다면, 여성들은 왜 아직도 전통적인 ‘여성의’ 일자리에서 주로 일하며, 4000 여 명의 기업 임원과 간부중에 여성은 19명 뿐인가? 출산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고 10년 전보다 임신중절이 어려워졌으며, 피임의 형태가 줄어들고, 새로운 피임법 연구는 사실상 중단이 되었는가? 가사 노동의 70%는 여성이 담당하며, 왜 주로 남편이나 애인의 폭력을 피해 도망친 여성들이 여성 노숙자가 되며, 이들의 수는 10년 전보다 더 증가하였는가?
경제, 몸, 교육, 안전, 가정에 대한 여성의 권리는 어느 곳에서도 이룬 것이 없고, 70~80년 대의 여성 운동의 정점이었던 때보다 90년대 2000년 대의 여성 인권은 더 낮아졌다. (전 세계적으로 1980년대 후반~2000년 시기의 여성 관련 통계는 하락세를 보이며, 이를 통해 여성 인권 침체기, 하락기로 표현될 수 있는 시기이다.)
여성의 지위 하락에 대한 증거는 1980년대부터 꾸준히 관찰되고 있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적은 여성 정치인은 더 줄어들었고, 가정폭력을 피해 쉼터로 오는 여성의 수는 101% 이상 증가했다. 피해여성의 1/3은 사적인 독립을 선언(이혼 서류를 내고 집 나옴으로써)한 직후 목숨을 잃었다. 1980년대 말에 여성들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토로했고, 실제로 여성운동의 성취의 결과를 남성들이 무력화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역습은 대체로 은밀하다. 이 역습은 대중문화라는 허울을 쓴 히틀러식의 거짓 선동으로 뻔뻔하게 진실을 거꾸로 세우고, 여성의 지위를 고양시킨 모든 조치들이 사실은 여성의 지위하락을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반격은 세련되면서도 진부하고, 얼핏 보기엔 ‘진보적’이지만 동시에 보란 듯이 후지다. 이 반격은 ‘과학연구’의 ‘새로운’발견들에 왕년의 싸구려 도덕주의를 버무린다. 이 반격은 영악하게 트렌드를 포착하는 대중 심리학자들의 번드르르한 선언과, 뉴라이트 설교사들의 광란의 수사들을 미디어의 입맛에 맞는 표현으로 탈바꿈시킨다.”
이들은 여성운동을 자신들의 프레임에 맞게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여성운동은 미국의 진정한 재앙이 되었다. 남자 품귀현상, 불임유행병 같은 것은 해방의 대가가 아니며,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망상들이다. 이러한 망상을 통해 여성들의 개인적 근심을 휘저어 놓고, 정치적 의지를 꺾는 역할을 해낸다.
반격
동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이 목표 달성에 가장 근접해 보일 때 반격은 이 노력을 무산시켰다. 1980년대 중반, 기록적으로 많은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목표를 지지하고 있는 그 때, 과반수의 여성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호명하고 있는 그 때에 미디어는 여성운동에 욕을 퍼붓는 젊은 ‘포스트페미니즘 세대’가 등장했다고 떠들어 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여성들이 낙태할 권리를 지지할 때 미국 대법원은 이를 재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이때에 반격, “반페미니즘적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 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터져 나왔다. 이는 여성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여성들을 멈춰 세우는 선제 공격이다.”
반격이 힘을 얻으면서 성공한 소수는 다수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소수의 성공한 여성들은 사회적 성공전략으로 자신들은 출세에 관심이 없음을 입증하려 했고, 여성운동과도 거리를 두려 했다. 반면 노동 계급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대의의 분열된 잔재들을 어떻게든 붙들려고 했다.
반격은 어떤 힘에 대한 반동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부진한 시기에 여성들이 대응의 역할을 맡는다. 지배 문화의 흐름에 반발하여 자기주장을 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하나의 흐름이 되면 저항은 이런 반전에 편승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때의 저항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며 벽과 댐을 짓는다. 그리고 이 저항은 역방향의 조류와 위험한 조류를 만들어낸다. 반격의 힘과 열정은 수면 아래서 부글거리기 대문에 대체로 대중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강간의 급증이나 여성을 대상으로 극단적인 폭력을 묘사하는 포르노의 증가, 황금시간대의 프로그램에서의 여성의 이미지의 퇴보, 페미니스트와 여성을 희화화하는 소재들의 급부상, 여성 폄하 단어(Bitch)의 대대적인 사용 등이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지휘관을 아래 두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반페미니즘적인 양상들을 퍼뜨리며 요원 역할을 하는 사람들 자신들조차도 그 역할을 의식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그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반격의 작동은 암호화, 내면화 되어 있고, 분산적이고 카멜레온처럼 변덕스럽다. 반격의 모든 표현들이 동일한 무게감이나 비중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인다. “바로 여성들을 아버지의 딸이나 싱싱하게 푸드덕거리는 낭만적이면서 적극적인 둥지 속의 새 같은 존재, 아니면 소극적인 사랑의 대상 같은 자기들이 ‘용납 가능한’ 역할로 다시 떠밀어 넣으려는 것이다.”
이 반격은 조직되지 않았으나 파괴력이 크다. 어쩌면 단일한 배후를 갖고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효과적인지도 모른다. 여성의 권리를 상대로 한 반격은 그것이 정치적인 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전혀 투쟁적이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성공을 거둔다. 그리하여 이러한 반격이 사적인 색채를 띄며 한 여성의 내부에 들어가 그녀의 관점을 바꾸고, 억압을 망상 정도라고 상상하게 될 때, 그녀 역시 자발적으로 이 반격에 동참하면서 반격은 가장 큰 위력을 갖게 된다.
반격은 자신의 틀에 맞지 않는 여성을 향해 불쌍하다고 떠들어대면서 여성을 자신의 거푸집에 끼우려 한다. 그리고 분할통치를 한다. 싱글/기혼, 직장여성/전업주부, 중산층/노동계급으로 분할해서 말이다. 이들의 규칙을 따르는 자에게는 포상을 그렇지 않은 여성들을 고립시키는 방법을 채택해서 말이다. 동시에 반격의 수식어들은 반격이 자행하는 모든 범죄에 페미니즘을 원인으로 돌린다.
이런 식으로 반격은 페미니즘에 우스꽝스러운 분칠을 해서 페미니스트들을 광대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사실 간단한 개념이다. 리베카 웨스트의 말처럼 말이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결심을 표현할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며, “다른 모든 것 이전에 나는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진술이다.
2018년 7월의 현재의 한국에도 많은 여성 운동이 가시화 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세계화 되는 사회에서 여권의 증진은 한국이라 해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미투운동과 계속되고 있는 임신중절 시위, 혜화역 시위 등. 한국에서도 페미니즘이 하나의 큰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에 맞춰 가부장제의 중심의 요새에서는 팔루디가 말한 ‘백래시’의 의미의 백래시를, 한국 맞춤의 한국형 백래시를 준비/시전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흐름에 그들은 한 수를 내주고, 가부장제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더 교묘해진 방법으로 페미니즘이라는 탈을 쓰고 여성들을 내세워 백래시를 시작할 것이다. 팔루디의 말처럼 여성들 스스로 차별이 존재하지 않다고 믿게 만들고, 더욱 교묘하게 여성에게 다가가 여성의 시선을 바꿔버릴 것이다. 이에 우리는 팔루디가 말하는 간단한 페미니즘의 정의를, 그 개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성도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