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전집읽기] 반시대적 고찰3 :: 4~5장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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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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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 고찰3 :: 4장
- 당시 독일인의 일반적인 시대인식 : 세상 어느 조그만 구석인 독일의 순진한 사람들은 새 독일 제국의 설립은 모든 “염세주의” 철학에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고 이는 감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 니체의 비판 : <이는 철학의 진지함이 신문의 진지함과 얼마나 거리가 먼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런 인간들은 철학적 지조뿐만 아니라 종교적 지조의 마지막 잔재까지 상실했으며, 그 모든 것 대신 낙천주의가 아니라 저널리즘, 즉 그 시대와 일간지의 정신과 비정신을 구입했다.> 정치적 사건으로 현존재의 문제가 움직였거나 심지어 해결되었다고 믿는 철학은 모두 농담철학이나 사이비 철학이다. 세계가 존재한 이래 자주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그런데 한 번의 정치적 혁신으로 어떻게 인간을 단번에 만족하는 지구 주민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 여기서 우리는 최근 곳곳에서 설파된 학설, 즉 국가는 인류의 최고 목표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 임무라는 학설의 영향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학설에서 나는 영웅주의로의 후퇴가 아니라 어리석음으로의 후퇴를 인식한다.
나는 여기서 그들의 목적이 국가의 안녕을 넘어서는 남성들, 즉 철학자들을 다룬다. 그것도 국가의 안녕과는 상당히 무관한 세계, 즉 문화의 세계와 관련하여.
- 철학자는 우리 시대의 문화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물론 국가와 만족하는 철학 교수들과는 아주 다르게 본다.
학문은 절도도 없이 맹목적인 자유방임 속에 수행되어, 확고하게 믿어왔던 모든 것을 분해하고 해체한다. 교양 계급과 국가는 대단히 천박한 화폐경제에 마음을 빼앗겼다. 세상이 이렇게 세속적이었던 적이 없었고, 사랑과 선의가 빈약했던 적은 없었다. 학자 계층은 이 모든 세속화의 혼란 한가운데에서 등대도 피난처도 될 수 없다. 그들 자신이 매일매일 더 불안해하고, 생각도 사랑도 점점 잃어간다. 예술과 학문을 포함해 모든 것이 도래할 야만에 이바지하고 있다. 교양인은 교양의 가장 큰 원수로 변질되었다.
교양인은 일반적인 병이 없다고 거짓말해서 의사를 방해하는 환자처럼, 일부러 즐거운 척 행복한 척 위선을 부린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황량하고 너무 폐쇄적이고 무미건조하고 희망이 없어서, 이제 그 안에는 기쁨이, 생각 없이 시끄럽기만 한 기쁨이 울리고 있다.
- 현대적 삶의 그림에서 약한 선과 둔탁한 색채만을 강조하는 것이 너무 편파적이라고 해도, 다른 면 역시 그보다 더 유쾌하지 않고 단지 더 불안스러울 뿐이다. 분명 거기에는 힘이, 엄청한 힘이 있지만, 그 힘은 거칠고 원천적이며 너무나 잔혹하다. 지난 세기부터 우리는 시끄러운 지각변동에 대비해왔다. 이 심각한 현대적 성향을 파괴하거나 폭발시키려고, 이른바 국민국가의 구성력으로 그에 대처하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국민국가도 일반적인 불안과 위협을 증대시킬 뿐이다.
우리는 원자의 시대에, 원자적 혼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중세에는 교회가 적대적인 힘들을 어느 정도 통합하고 있었고, 이 힘들은 교회가 행사하는 강한 압력으로 인해 서로 동화되기도 했다. 그 끈이 찢어지고 압력이 약해지자, 하나는 다른 것에 대항하여 일어선다. 이렇게 종교 개혁 때부터 분리는 점점 더 확대된다.
이제 지구 위의 거의 모든 것은 가장 거칠고 악한 힘들에 의해, 즉 영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와 군사적 폭력 지배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폭력 지배자들의 손에 놓인 국가는 영리주의자들의 이기주의처럼 자기 힘으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저 모든 적대적 힘들을 하나로 묶고 압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국가가 바라는 바는, 사람들이 교회에 그렇게 했듯이 자신을 우상처럼 숭배해주는 것이다.
2. 우리 시대가 이렇게 위험에 처해 있는데, 어느 누가 나서서 인간성을 지키는, 즉 수많은 종족들이 오랫동안 수집해 모아둔 신성불가침의 사원보물을 지키는 파수꾼과 기사로 헌신하겠는가? 모든 사람이 이기적인 벌레와 개 같은 두려움을 내면에 느끼면서 저 인간상으로부터 떨어져 동물적인 것으로, 심지어 경직된 기계로 전락할 때 어느 누가 인간상을 수립하겠는가?
우리의 근대가 차례로 정립한 세 가지 인간상이 있다. 루소의 인간, 괴테의 인간, 쇼펜하우어의 인간이다.
1) 루소의 인간상
루소의 인간상이 가장 큰 불을 지녔고 분명 가장 대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인간상으로부터 힘이 분출되어 격렬한 혁명을 재촉했고 여전히 재촉하고 있다. 모든 사회주의적 진동과 지진에는 항상 루소의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2) 괴테의 인간상
괴테의 인간상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높은 품격의 명상가적인 천성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대중의 오해를 받는다.
괴테의 인간은 루소의 인간만큼 위협적인 힘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루소의 인간이 몸을 내던진 저 위험한 흥분을 교정하고 진정시키는 자다. 그의 파우스트는, 삶에 대한 갈망, 그 불만과 동경, 마음속 악마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있어, 루소적 인간의 가장 대담한 최고의 모사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항상 괴로운 삶 내내 탐욕스러운 반항아와 해방자로 살아간다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틀렸다. 여기서 괴테의 인간은 루소의 인간을 피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폭력적인 것을, 비약을 – 다시 말해 모든 행위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해방자 파우스트는 단지 세계 여행자가 될 뿐이다.
괴테의 인간은 높은 품격의 명상가이다. 그가 이 지상에서 굶어 죽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가 이제까지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는 위대한 모든 것과 사유할 만한 것들을 먹이고 수집하고, 탐욕에서 탐욕으로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활동적인 인간이 아니다. 괴테의 인간은 유지하고 견디는 힘이다.
3) 쇼펜하우어의 인간상
쇼펜하우어의 인간상은 가장 활동적인 사람을 관찰자로 요구한다. 그들만이 상처받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명상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지치게 하고, 대중은 겁을 주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적 인간은 진실성의 고통을 스스로 지며, 이 고통은 그가 자기 의지를 죽이고 자기 본질의 완전한 변혁과 전도를 준비하도록 도움을 준다.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다.
인간이 자신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단지 존재로부터, 다르게 존재하지 않고 그렇게 존재하는 데로부터 불멸한 것에서 풀 수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얼마나 깊이 생성과, 존재와 깊은 관계에 있는지를 검증하기 시작한다. - 생성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사물에서 허구적인 모든 것을 밝혀내라는 엄청난 과제가 그의 영혼 앞에서 솟아오른다. 그도 모든 것을 인식하고 싶지만, 괴테적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즉 자신을 지키고 사물의 다양함을 즐기기 위해 고상한 유약함에 몸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가 바치는 첫 제물인 것이다. 영웅적 인간은 자신의 행복과 불행, 자신의 미덕과 악덕 그리고 사물을 자신의 척도에 따라 측량하는 것 자체를 경멸한다. 그는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사물 속에서 이 절망적인 바닥까지 보려고 한다. 그의 힘은 자기 망각에 있다.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영웅적 삶의 이력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또는 어떤 문제에서건 만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너무나 힘들게 싸우고 마침내 승리하는 사람이지만, 제대로 또는 전혀 보상받지 못한다. - 중략 – 그의 의지는 노고와 노동, 실패와 세상의 배은망덕으로 인해 전 생애 내내 고행을 강요당하고 열반 속에서 소멸된다.”
반시대적 고찰3 :: 5장
1. 나는 쇼펜하우어를 나의 경험에 따라 교육자로 서술할 것을 약속했고, 따라서 내가 불완전한 표현으로 쇼펜하우어의 내면에서 또 그의 주변에서 마치 그의 플라톤적 이데아로서 지배하는 저 이상적 인간을 묘사하려 한다면, 그것으로는 아직 그 약속을 이행했다고는 할 수 없다. 가장 어려운 점이 아직 남아 있다. 즉 이 이상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일단의 새로운 의무를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우리가 규칙적인 활동을 통해 저 과도한 목표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간단히 말한다면, 저 이상이 교육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남아 있다.
- ‘저 말할 수 없이 높은 목표가 우리를 위로 끌어올리면서 교육하도록 그것을 가까이 옮겨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강한 천성의 사람이건 약한 천성의 사람이건 모두 실패할 수 있다는 이의제기에 대해 나는 우리의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경험에 따르면 단지 한 가지 점은 분명하게 보고 알고 있다는 것 정도만 덧붙이고 싶다. 즉 저 이상적인 그림으로부터 성취할 수 있는 의무의 사슬이 너와 나에게 매달려 있고 우리 중 몇 사람은 이미 이 사슬을 느끼고 있다는 것 말이다. 내가 저 일련의 의무들을 요약할 때 사용하는 공식을 아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으려면, 다음의 예비고찰이 필요하다.
- 깊이 있는 인간은 항상 동물들에 대해 동정을 느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삶에 고통 받지만 고통의 가시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자신의 현존재를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다시 말해 저 밑바닥에서 높이 솟아올라 무의미한 고통을 바라보려는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좀더 의식적으로 동물이 맹목적 충동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을 원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일생 대부분을 그렇게 보낸다. 대체로 우리는 동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가 동물이다. 무의미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이다.
우리가 이를 파악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구름이 산산이 흩어지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모든 자연과 함께 인간이 되고자, 즉 우리 위에 높이 서 있는 어떤 것이 되고자 몰아붙이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모두가 기억과 내면화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있다는 것을 보편적 삶의 동작과 소리로 추측한다. 그 모든 어지러운 불안과 초조에, 또 우리 삶의 꿈 같은 상태에, 깨어나는 것을 무서워하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깨어날 순간이 다가올수록 더 활기차고 더 불안하게 꿈꾸는 이런 상태에 깜짝 놀란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느낀다. 깊은 자성의 순간을 오래 견디기에 우리는 너무 약하다는 것을 또 온 자연이 몰려와 구원하려는 그 인간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 우리를 들어 올려야 한다 – 우리를 들어 올리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이 저 진실한 인간들,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사람들, 철학자들, 예술가들과 성자들이다. 그들이 나타나면, 또 그들이 나타남으로써, 결코 도약하지 않는 자연이 단 한 번 도약한다. 그것도 기쁨의 도약을. 자연이 이제 처음으로 목표에 도달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연이 이제 변용된 표정으로 말하는 것, 그것은 현존재에 관한 위대한 계몽이다. 죽을 운명의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소망은 열린 귀로 언제나 이 계몽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영혼이 헛된 동경으로 죽어가지 않도록 결국 영혼을 뒤집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일련의 새로운 의무를 발견할 것이다.
2. 규칙적인 자기 활동을 통해 스스로 쇼펜하우어적 인간의 위대한 이상과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 점만은 확실하다. 이 새로운 의무는 고립된 자의 의무가 아니다. 우리는 이 의무와 함께 강력한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
이 공동체는 외적 형식이나 법칙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상에 의해 단합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문화의 근본 사상인데, 그것도 문화가 우리 각자에게 단지 하나의 과제를 부여하는 한 그러하다. 이때 그 근본 사상이란, 우리의 안과 바깥에서 철학자, 예술가와 성자의 탄생을 장려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의 완성을 도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철학자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형이상학적 목표를 위해 예술가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 스스로 계몽되기 위해서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은 혼란스러운 생성 중에 한 번도 분명하게 보지 못했던 것을 순수하고 완성된 형상으로 마주하게 된다 – 그 목표란 결국 자연의 자기 인식이다.
그리고 자연은 마지막으로 성자를 필요로 하는데, 그에게서 자아는 완전히 융합되어 그의 고통스러운 삶은 전혀 또는 거의 개인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내면에 깊은 동감, 동정과 일체감으로 느껴진다. 자연이 필요로 하는 성자에게서는 생성의 유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저 변화의 기적이 나타난다. 즉 저 궁극적인 최고의 인간화가 일어나는데, 모든 자연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이 인간화를 추구하고 지향한다. 우리 모두는 철학자와 예술가와 혈연관계인 것처럼 성자와도 혈연관계에 있다. 그 번득이는 빛 속에서 우리가 더 이상 “나”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가장 밝고 사랑스러운 불꽃 같은 순간이 있다. 이 순간에 현세적인 것으로 변하는 어떤 것이 우리 존재의 피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깊이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키는 다리를 갈망하고 있다.
- 문화는 쇼펜하우어적 인간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원한다. 우리가 그 인간의 적을 알고 제거함으로써 이 인간이 항상 새로이 나타나도록 준비하고 장려하기를 – 간략하게 말해 우리 스스로 그런 쇼펜하우어적 인간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함으로써 우리 실존의 최고 실현의 기회를 우리에게서 빼앗는 모든 것들에 대적하여 지치지 않고 투쟁하기를 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