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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파울 첼란 후기 9/9 금 +8
반디 / 2016-09-10 / 조회 4,86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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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파울 첼란의 시 몇 편을 읽었습니다. 오라클, 케테르, 희음, 무긍, 토라진, 소소 그리고 반디가 참석했습니다.  세미나 시작 전에 이번 <詩의 공백> 첫 세미나를 마무리하게 될 오픈세미나에 대한 이야기, 다음 세미나에서 읽을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금요일에다가 추석 밑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도 많고, 또 사고 차량도 있어 제가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늦게 도착한 점 사과드립니다.  

 

 파울첼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먼저 우리가 다루게 될 시인의 약력을 살펴보았습니다.

파울 첼란은 1920.11.23.일 부코비나의 수도 체르노비츠의 유대인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어요. 독문학을 애독한 교양인이었던 어머니로부터 ‘올바른 표준 독일어’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첼란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헤브라이어 공부를 시킬 만큼 열렬한 시오니스트였다고 합니다.


첼란은 언어에 타고난 감각을 지녔던 것인지 독일어, 헤브라이어, 이디시어,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에 정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어인 독일어 이외의 언어로 시를 쓰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답니다.

 

2차 대전 발발 후, 양친은 남 부트강 유역의 강제수용소로 이송 후 그곳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수용소로의 이송은 면했으나 타바레슈티라는 마을에서 도로공사 등의 강제노동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때는 수첩과 종이쪽지에 시를 써서 애인 루트라쿠나에게 보냈고, 1944년 소련군의 재점령으로 무사히 종전을 맞고 난 후 첼란은 부쿠레슈티로 옮겨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루마니아 잡지 <아고라>에 부모님이 주신 성 얀첼(Ancel)의 철자를 재배열한 첼란(Celan)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여 시 3편을 게재했답니다.

 

1948년 파리에 정착하였고,  52년 프랑스 귀족가문 출신의 판화가 지젤 드레스트랑주와 결혼한 후에야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59년 사범학교에 취직했으나 생활은 안정되지 않았고 신경증 징후를 보이기 시작, 62년 첫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70년 4월 20일(추정일) 센 강에 투신하기까지 대여섯 차례의 입원을 반복하고 두 차례 자살을 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시집으로  『유골항아리에서 나온 모래』 『양귀비와 기억』 『문턱에서 문턱으로』, 『언어창살』,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 『숨결돌림』, 『실낱태양들』, 『빛의 강박』 등이 있고 유고시집으로 『눈 파트』, 『시간의 뜨락』이 있습니다. 이 시집들이 모두 번역되지는 않은 듯 하고 각 시집의 대표작들을 모은 시선집 『죽음의 푸가』가 있습니다. 


시는 전영애 번역본인 첼란의 시선집 『죽음의 푸가』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고 대표작으로 할 만한 시로 모두 6편을 골랐으나 시간 관계상 다 다루지를 못하고 네 편만을 다루었습니다.

 

 

찬미가

 

아무도 흙으로 진흙으로 우리를 다시 빚처 주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의 티끌에 혼을 불어넣어 주지않는다
아무도.


찬양하세, 그 누구도 아닌 이.
당신을 위하여
우리가 꽃피려 하노니,
당신을 바라보며.


우리가 하나의 무(無)
였고, 무이며, 언제까지이고
무일지니, 꽃피며,
무의―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여라



암술대, 혼(魂)처럼 밝고
꽃실, 하늘처럼 황폐하고
그 화관(花冠) 붉어라
가시
너머, 오 너머로
우리가 노래 불렀던 그 자색(姿色)의 말로.


절대자에 대한 찬양인가, 인간 존재에 대한 찬미인가에 대해 의견이 갈리었으나 절대자라기보다는 ‘장미’로 형상화된 존재 자체에 대한 찬미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마지막 행의 ‘말로’라는 단어가 末路인가 언어를 나타내는 말(장음으로 발음)인가에 대해서도 후자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시를 쓴 것 같다, 시가 능동적이고 역동적이다라는 감상들이 오갔습니다. 마지막 행이 거느리는 서술어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붉어라’를 골랐지만 그것은 형용사이므로 술어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찬양하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찬미라고 읽고 보니 문득 인간의 몸을 빌어 이 세계에 온 나의 존재가 돋을새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첼란 역시 암울했던 시대의 희생양이었으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은 거부할 수 없었던 걸까요?  첼란의 말대로 자색(여자의 고운 얼굴이나 모습)의 언어로 존재 자체를 찬양해야겠습니다.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 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시선집의 표제작이기도 하고 시인의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유튜브에 동영상이 있어서  시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다음 링크를 따라가 보세요. 

https://youtu.be/gVwLqEHDCQE?list=FLUJdZA33D6LEfCTMgRkKVHw


‘죽음의 푸가’는 제목에서 보이듯이 푸가라는 음악 형식을 차용한 시입니다. 원래 이 시의 제목은 ‘죽음의 탱고’였다고 합니다. 탱고를 추고 가르치던 제 경험으로 보자면 제목을 바꾸기를 참 잘한 것 같아요. 탱고라고 했다면 그 형식을 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푸가만큼 보편성을 얻지도 못했을 것 같아요.  푸가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주제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음악 형식으로 이 시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반복은 차이를 내포하며 변주되고 있습니다.
 
후렴구는 반복함으로써 주제를 살려주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반복할수록 그 차이에 집중하게 된다고 들뢰즈를 인용해 철학적 해석을 해주신 분은 오라클님이었습니다. 그동안 번역시를 읽으면서 운율이나 형식은 감히 욕심을 낼 수조차 없었는데 첼란의 시를 통해 또  이런 해석에 힘입어 시에서의 형식의 중요성과 형식이 주는 힘을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시는 내용상 마신다, 판다는 동사의 주체인 ‘우리’와 쓴다, 논다 등의 주체인 ‘그’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집단(수용소의 유대인)과 개인(독일인)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단순한 대립이 푸가라는 형식을 빌어 그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번역시의 특성상 메시지를 해독 하는데 집중했었는데 이 시를 통해 비로소 메시지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까지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돌.
내가 따라갔던 공중의 돌.
돌처럼 멀어 버린 너의 눈.


우리는
손이었다.
어둠을 남김없이 퍼냈다. 찾았다
여름을 타고 올라온 단어.
꽃.


꽃 ― 맹인의 단어.
너의 눈과 나의 눈이
물을 마련한다.


성장(成長).
마음의 벽이 한 꺼풀 한 꺼풀
떨어져 내린다.


이런 단어 하나 더, 그러면 종추(種錐)
트인 곳에서 흔들린다.


첼란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꽃’이었습니다. ‘찬미가’에서는 은유로서의 ‘장미’가 등장하는데요. 이 시에서는 특정한 이름을 갖지 않은 ‘꽃’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어둠을 남김없이 퍼내’고 찾아 낸 ‘여름을 타고 올라온 단어’이며 ‘맹인의 단어’이고 ‘너의 눈과 나의 눈이 물을 마련’하여 키운 ‘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어렵게 키워내야 할 ‘꽃’은 과연 무엇일까요?


‘돌처럼 멀어 버린 너의 눈’ 이나 ‘맹인’ 등의 단어들은 장님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무언가에 반해버려 눈 먼 상태를 뜻하기도 하는 듯해요. ‘성장(成長)./마음의 벽이 한 꺼풀 한 꺼풀/떨어져 내린다.’ 성장은 꽃이 피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런데 꽃이 한 잎 한 잎  잎을 더해 갈수록 우리의 마음의 벽은 한 꺼풀씩 떨어져 내린다는 표현은 정말 멋졌습니다.  

 

 

언어창살

 

창살 사이의 안구(眼球)


섬모충 눈꺼풀이
위로 노 저어 가
시선 하나를 틔워준다


유영하는 아이리스, 꿈 없이 우울하게,
심회색(心灰色) 하늘이 가깝구나.


갸름한 쇠 등잔 속, 비스듬히,
천천히 타는 희미한 관솔 등화(燈火)
빛 감각에서
너는 영혼을 알아본다.


(내가 너 같았으면. 네가 나 같았으면.
우리 한 무역풍 아래
서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낯선 이들인 우리.)


타일들. 그 위에
바싹 붙어 있다, 두 개의
심회색 물줄기
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

 

이 시의 독일어 제목인 Sprachgitter는 원래 중세 수도원 면회실의 창살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이에 두고 수도자와 면회자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시는 그것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격자창을 사이에 두고 차가운 금속성의 타일 위에 바싹 붙어 섰지만 두 개의 입안에 침묵만 가득한 모습을 떠올리면 소통과 단절이라는 언어의 두 가지 기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어를 모어로 사용했지만 유대인으로서의 첼란은 언제나 언어창살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눈동자’로 번역할 수도 있었을 것을 ‘안구’로, ‘심회색’의 ‘심’이 深이 아니라 心이라 점 등을 살펴보면서 번역자의 고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시간은 부족했습니다. 번역시의 한계를 여전히 절감했지만 무긍님께서 즉흥적으로 찾아낸 영어번역본을 참조하여 그 한계를 좁히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어요. 참여하신 분들의 지적 호기심과 아카데믹한 분위기 덕분에 후기로 갈수록 거의 침묵에 가까워져 간다는 첼란의 시에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몇 편에 불과하지만요. 저는 개인적으로 번역자의 노고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독일어를 모어로 사용했지만 유대인으로서의 첼란은 언제나 언어창살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독일어로 소설을 썼던 유태인 카프카는 많은 점에서 첼란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국어를 낯설게 하기, 모국어를 더듬거리게 하기! 
어쩌면 이들은 국가를 갖지 못한=않은 이방인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시읽기 공부를 뽀쪽하게 만드는 반디의 감각에서 배웁니다. ^_^

반디님의 댓글

반디 댓글의 댓글

모국어를 절름거리게하는 디아스포라의 시에서 언어의 한계와 소중함을 생각해보게 되요. 단순한 감상을 넘어 철학적 사유와 연계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세미나 흐름과 요지를 잘 담아주셨네요.
파울 첼란의 사진을 보여주고 특히 시를 파란색으로 다지인한 것, 후기를 읽는 이로하여금 편리함과 고마움을 느끼게 합니다.
.
잘 읽고 소감 한 마디 ~~ 올립니다.

반디님의 댓글

반디 댓글의 댓글

언제나 장점을 보시려는 케테르님..행복한 명절 보내세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넵 ~~ 반디님도 조은 명절 되세요 **

희음님의 댓글

희음

첼란의 사진과 육성 영상까지, 놓치지 않고 올려주시는 이 센스!
시 안의 논리와 목소리를 첨예하게 따라가고 파고들면서 읽는, 그야말로 '읽어내는' 우리의 공부가 좋습니다.
그런데 이번 첼란의 '꽃'이라는 시 앞에서, 마음껏 길을 잃어가며 함께 헤매였던 우리의 시간도 의외로 좋더군요.
그런 시간을 촘촘하게 살려내 주신 반디 님께 감사합니다. 손수 만들어 오신 고구마맛탕도 행복해하며 먹었습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희음님, 참 수고 많으셔요 시공백 세미나가 이렇게 풍성하게 진행되어 엄청 기쁨다 좋은 명절 되시길 ~~~~

반디님의 댓글

반디 댓글의 댓글

혼자서는 읽기 쉽지않았던 시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덕분입니다. 만월의 정기 한아름 받으시고 건강 건필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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