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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공백] 송승언 시 후기 9/23 +6
케테르 / 2016-09-25 / 조회 5,480 

본문

송승언의 ‘철과 오크’

 

 

1. 시인 송승언


1986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젊은 시인이다. 201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펴낸 시집으로는 ‘철과 오크’가 있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최근에 등단한 시인으므로 그의 시 시계를 종합하여 평가할만한 자료가 풍부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대시, 헤체시 혹은 자유시라고 일컬어지는 시의 흐름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리더인 희음님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여 오라클님이 진행을 하였습니다.)

 


2. 세미나 내용

 

 


담장을 넘지 못하고


그러나, 매 순간 나를 관통하는 빛
 
창이 열리면 의자에 앉았다 빛 닿은 자리마다 얼룩이었다
담장 너머 이웃집은 근사한 요새 같았다
 
이웃집의 창은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웃집의 내부는 환할까 알 수 없었다 내 방은 빛에 갇혀 깜깜하다
 
어제는 교회 가는 날 그것도 모르고 방에 있었지 오늘 교회에 가면 내일 좋은 곳으로 간다고 했다 좋은 곳은 이웃집보다 근사할까 알 수 없었고
 
좋은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좋은 곳을 상상하지 못했다
빛의 문제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이웃집의 커튼이 공중으로 간다
의자에 앉으면 창이 열리고
 
열린 창으로 보이는 건 열린 창 너머의 열린 창 열린 창으로 보이는 이웃집의 이웃집
이웃집의 이웃집 앞에 일어선 담장이 이웃집 안으로 그늘을 구부린다
 
풍향계가 끊임없이 돌아가고

 

 

[발제, 여는 말]

창을 통해 보이는 담장 너머 이웃집과 창문의 닫힘과 열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이웃집의 내부와 천국을 상징하는 듯이 보이는 ‘좋은 곳’을 연결시키고 있다.
전반적으로 시를 죽 읽으면 무엇을 말하는지 선명하게 묘사된 시이다.


 [대화내용]
​- 창을 통해 보게 되는 담장 너머의 창문과 그 창문 안의 미지의 풍경에 대한 궁금함, 그리고 관통하는 빛을 언급하는 것을 보아, 이 시는 결국은 소통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 이 시가 시로서의 가치를 지니는가? 할 정도로 예민한 질문을 던진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에서 1) 의미 전달이 분명하거나, 2) 운율이 살아있거나, 3)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거나, 4) 정서가 풍부하거나, 5) 예술성이나 문학성이 탁월하거나 등의 요소를 찾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시적 함축이 있는 운문이라기보다 어떤 설명이나 나열에 가까워보인다는 것입니다.

- 전통적인 시는 누가 봐도 가슴에 와 닿는데(서정시)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들은 무슨 말인지 파악하기 힘든 이미지들이 가득한 것 같다는 지적도 있었구요,

- 시란 독자들을 생각하고 공감이 되록 해야 하는데, 현대 자유시(해체시)들이 독자에 대한 생각없이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고 쓰는 듯 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시의 특이함과 생소함을 다들 느낀 것입니다.

- 이에 대해, 이 시는 사실적이고 설명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고 이렇게 시를 쓴다면 나도 시를 쓸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 저는 예술적인 요소, 즉 윤율이나 의미, 시적 함축 등 전통적인 시적 특징이 결여되어 있거나 무시하고 쓰고 있지만 일단 공인된 시인이자 시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 시 속에서 시인의 실존, 요즘 젊은 세대의 실존이 느껴진다.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나이가 젊을수록 상대적으로 송승은 시에 대한 호감이 좋은 듯 하였습니다. 저 역시 제 아들 또래와 가까워서 시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감성적 교감이 좀처럼 ~~ ㅎㅎ)

 

- 어떤 분은 요즘 젊은 소설가들이 소설을 쓸 때 사랑과 연애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감정이 없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이웃과의 소통, 공동체적인 교감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는 어릴 때부터 도시화된 환경 속에서 공동체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닫혀지고 메마르고 차갑고 교감이 없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시에서도 그러한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담장 너머로 이웃집을 바라보고, 그 안을 바라보기를 바라면서도 결국 ‘담장을 넘지 못하고’ 단절되어 버린 오늘날 우리 시대의  단절과 고독을 담고 있는 시로 보인다. 시인과 젊은 세대의 실존을 드러내면서도, 긍정적으로 본다면 도시화되어 단절되고 파편화된 우리네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보아도 될 듯 하다.(사견)

 
 


여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거나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마른 입술을 통해 겨울이 왔다 나는 장롱을 뒤져 목을 묶는 생물을 찾았다
 
그것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습관을 버렸다 네가 온 벤치 하나 네가 오지 않은 벤치 하나 발목 잘린 벤치 하나 온통 하나뿐인 공원에서 왜 우리는 여전히 둘일까
 
네 입을 벌렸다 그것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쓸모가 없었고 살아 있었다 내가 온 벤치에 너는 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둘일까 목이 막혔다 개별적인 나무에서 개별적인 꽃이 피었다
 
얼어붙은 호수에서 너를 찾았다 너는 없고 너의 표정만 갈라지고 있었다 목이 막혔다
 
얼음 깨지는 소리, 벤치로 왔다 나는 땀을 흘렸다
 
 

[발제, 여는 말]
시의 배경은 겨울 공원의 풍경이다. 아마 너와 함께 앉은 벤치에 홀로 앉아 공원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나(시인)의 시선과 경험을 담고 있는 시이다.
그 핵심은 ‘너가 없다’이며, ‘우리는 여전히 둘일까’라는 반복적인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하나와 둘의 극적인 대조가 이 시를 구성하는 기둥이 되고 있으며, 고독의 이미지, 이별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대화내용]
- 시의 제목은 ‘여름’인데 시 속의 풍경은 ‘겨울’이므로, 왜 제목과 내용이 엇갈릴까?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하는 토론부터 시작하였습니다.

- 배경은 겨울이 분명한 듯이 보이고, ‘여름’을 제목으로 하여 시인의 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너무 의도적으로 제목을 엇갈리게 하여 독자들을 조롱하는 듯 하다는 극언도 있었으며 ^^, 저는 이 시인의 마음이 여름이다, 나는 그녀를 여전히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싶었습니다(발언은 못함).

 

- 1연의 ‘목을 묶는 생물’이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해 온갖 특이하고 재미있는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목을 묶는 생물’은 1) 부재하는 ‘너’로 이해하는 분도 있었고, 2)  넥타이나 자살을 하는 도구인 줄 같은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었고, 목도리(그녀에게 선물받은?) 같은 것으로 추론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여튼 목을 묶는 생물은 죽음 메타포이며,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면에서 사람일 수도 있고, 실제 힘으로 작용하는 사물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들을 주섬주섬 나누었지요.

- ‘너는 없고’, 네가 오지 않은, 온통 하나뿐인 공원, 개별적인 나무, 개별적인 꽃, 벤치 하나 등등에서 고독, 홀로있음의 상태를, 마른 입술, 목이 막혔다(2번) 등에서 시인의 정서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고들 말하였습니다.

- 이별의 정서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소감이 있었습니다.

- ‘발목 잘린 벤치’는 일종의 시적 장치로서 벤치란 다리가 4개인데, 너가 부재하여 기울어져있고, 비뚤어져있고, 내가 무너지고 있는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시 역시, 앞선 시와 마찬기지로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고,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특이한 시로 보입니다.

 
 
철과 오크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숲을 통과하고 있고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수십 명의 나무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아이들이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 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며 농담을 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 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잎이 풍경을 가리며 무성해지고 있고
 
 
[발제, 여는 말]

숲의 장면이다. 제목 ‘철과 오크’는 본문에 등장하는 도끼(철)와 나무(오크)로 이해하면 쉽게 연결이 된다.

불 - 그림자 - 어둠 - 더 어두운 곳으로 흘러가는 이미지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흐름이다.


[대화내용]

- 제목 이야기부터 했습니다.  오크가 반지의 제왕이나 로마의 신화에서 어떤 괴물성을 지닌 존재(죽음의 신)을 의미하므로 오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르게 읽을 여지도 있다는 신선한 견해도 있었습니다.
- 숲과 지나가는 아이들, 도끼질 하는 나뭇꾼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 저는 이 시가 그의 대표적인 시일 뿐 아니라 작품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송승언의 시에서 드물게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고, 철과 오크, 숲, 아이들, 불 등 이미지와 상징들이 비교적 선명하고, 시적 묘사가 뛰어난 면도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 유럽에서 숲은 악마의 소굴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이 시에서 그런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느꼈다는 소감도 있었습니다. 즉 무언가 괴물성과 원시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도끼질, 인간의 맛 등의 표현에서 묘하게 죽음 이미지를 발견할 수도 있었습니다.

- 3연에서 수십- 수백- 수천- 수만 - 영원으로 이어지는 점층법적인 전개가 한편 멋있어보이기도 하지만 다소 유치하다고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구요,

-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 표현은 멋있지만 의미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잘 포착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 시가 그려내는 이미지와 달리 의미나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이것이 송승원의 스타일이 아닐까?

 

 

지엽적인 삶


비닐하우스에는 빛이 가득하다 현기증이 난다
 
너는 거대한 사물에 물을 뿌리고 있다 그것이 뭐냐고 물었다
그것은 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꽃이 아니다
꽃은 색이 있고 향기가 있다 무더기로 살다가 무더기로 죽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하나이고 색이 없다 살지도 죽지도 않고 무한히 자라난다
 
요즘은 잘 사냐고 물었다 잘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요즘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했다
 
꽃이 아닌 그것은 비닐하우스를 채웠다 현기증이 난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곳에는 빛이 가득하다 몸을 잃을 만큼
 
물을 뿌렸다
물이 흩어진 곳에서 어둠이 번식한다
 
 
[발제, 여는 말]

비닐하우스 내의 풍경이다.
나와 너의 대화의 엇갈림이 이 시를 틀을 구성한다.
그 세가지 질문은, 1) 그것이 뭐냐, 2) 잘 사느냐, 3)그런데 너는 누구냐, 인데 모두 존재론적 질문이라는 공통적 특징이 있다.
이 시 전반을 통해 ‘어둠의 번식’이라는 정서가 드러난다.


[대화내용]

- 그 모호함과 자유로움과 특이한 언어적 수사에 있어서 이수명과 유사점이 있지만, 이 시는 매우 좋다는 소감을 말한 분이 있었습니다.

- 정작 시인 자신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자신의 시선과 생각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독자들인 우리들이 지나차게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 '현기증이 난다‘에서 시인의 부적응, 마음의 거부를 읽을 수 있습니다.

- 이 시 역시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실존과 경험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 비록 이 시가 위대한 시인들의 시처럼 시대를 넘어 세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보편성을 지니지 못할지라도,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이런 시를 읽으면 이건 바로 나의 이야기야, 라고 반응하면서 열광할 수 있는 정서가 담겨 있으므로 오늘날의 젊은세대에게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 4연이 시인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통찰이 있었습니다. 1) 잘 사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2) 아프지도 않고, 3) 슬프지도 않다. 이 셋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1) 무의미, 2) 무감각, 3) 무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 시인은 결국 인생이야기를 하고 있다, 1) 비닐하우스에 갇혀 있고, 2)꽃이면서도 꽃이 아닌, 3) 피어나지도 못하고 색도 없고 향도 없는, 4) 집단으로 길러지고 있는, 5) 비닐하우스 안에  빛이 가득하지만 태양의 빛이 아닌 인공적인 빛이 쪼이는 상태, 즉 비닐하우스에 갇혀 사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란 것이 이 시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하는 정리 발언도 있었습니다.


후기를 기록하면서 한마디 더 하고 싶습니다. 자본 비판, 문명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의 비닐하우스는 자본의 영역, 권력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비닐하우스의 빛은 자본의 빛이며,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꽃의 모양과 형상을 갖고 있지만 박제화된 꽃입니다. 향도 색도 없지요. 빛과 물이 뿌려집니다. 자본과 사회가 주는 자양분들이 주어질수록 어둠만이 번식합니다. ‘거대한 하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잘 드러냅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의 비극입니다.  시인이 이런 것을 짚어서 말하고자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비닐하우스와 꽃 메타포는 분명 오늘날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 실존을 잘 드러내는 측면도 있는 듯 합니다.
 

 

많은 손들을 잡고

 

 

몸을 잃어가며 장작이 빛난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거실의 음악은 언제까지 계속되는지 이곳에는 질문도 없고 답도 없다
 
간밤에 잃어버린 회문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눈이 내렸으며 믿음은 새로웠다 골목은 안으로 굽어 바람을 가두며,
 
눈은 눈과 겹치고 있다 첫눈이 겹칠 때는 눈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밤이 밤을 넘어서 지붕을 덮고 있고 눈을 밤을 덮고 있다 덮이는 건 없다 해도 좋았지만
 
악사들은 수백 년째 쉬지도 않고 밴조와 피들 따위를 연주 중이다 밤이 계속되니까 이제 우리는 연주의 슬픔도 지겨움도 다 잊고 이 음악에 고립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눈은 왜 자력을 얻나 이곳에서 우리는 몇백 명쯤 되는 것이지, 저벅이는 소리 들리지만 괜찮다 아무런 답도 없다
 
그림자 한 덩어리가 어둠의 외곽으로 뻗어 나갔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고 그것을 내밀었다 겹치는 그것들 너무 많은데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게 이상하다 눈이 자꾸 겹치는데 손등에 진 그늘의 열기는 식으려 하지 않는다 몸을 잃어가며,
 
거실은 무너지고 우리는 이 손들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며 밤이 오고 밤이 쌓이면 한밤을 함께 넘어서

 


[발제, 여는 말]

눈 내리는 밤의 풍경이다. 실내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 너와 손을 잡고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snow)와 우리의 보는 눈(eyes)의 언어적 대조와 연결이 돋보인다.
몸을 잃어가며 빛나는 장작과 몸을 잃어가며 식지 않는 그늘의 열기가 대조된다.
‘우리는 이 손들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며’는 송승언의 시에서 드물게 무언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묘사이다.


[대회내용]

- 몸을 잃어가며 장작이 빛난다, 이 음악에 고립되어 있다, 는 상당히 좋은 표현이라는 의견이 있었구요,

- 3연의 눈과 눈이 겹치고 있다에서 이 ‘눈’은 무엇이며, 8연에서 ‘눈이 자꾸 겹치는데’에서의 눈이 무슨 눈인가?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3연의 눈은 눈(snow)이라는 의견과 두 사람의 마주치는 눈(eyes)라는 의견으로 갈리었고, 8연의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으로 읽었습니다.

- 우리는 ‘나와 너’ 두 사람이라고 추정되는데, 우리는 이 손들을(복수형) 절대로 놓지 않으리라는 표현에서 이미지나 의미파악이 힘겨웠습니다.

 

- 6연이 논란이 많았고, 공감되지 않는 의견들이 이어졌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몇백 명 쯤되는 것이지 저벅이는 소리 들리지만 괜찮다 ~~”는 표현에서 유령 이미지나 다중 인격적 컨셉이 읽혀지고 다소 사이코적인 표현이라는 극단적 소감을 제가 발설했습니다. 이어지는 연에서 ‘그림자 한 덩어리'와도 연결되구요. 황인찬 시인이 편집증적 요소를 시 속에 도입을 하는 파격을 이루었는데, 송승언의 시에서도 유령이나 분열증적 컨셉을 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저의 지적이 있었지만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르는 채. 각자의 손에 각자의 팝콘과 콜라를 들고. 이제 어두운 실내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의자를 찾아서 두리번거리지. 각자의 연인에게 보호받으며. 동공을 크게 열고, 숨을 잠깐 멈추고.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본 적이 있는. 어둠 속에서 사건들은 빛나고. 얼굴의 그늘을 밝히고. 우리가 잊힌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팝콘 한 움큼 쥐려다 서로의 팝콘 통을 잘못 뒤적거리고. 손이 엇갈릴 수도 있겠지. 영화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는 채. 깊이 없는 어둠으로부터.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그때 너와 나는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보게 된다. 한 손에 빈 콜라 병을 들고서

 


[발제, 여는 말]
비교적 의미가 명료하게 다가오는 시이다.
황인찬의 ‘혼자서 본 영화’와 분위기가 겹친다.
황인찬은 나와 배우, 혼자서 본 영화인데 함께 본 영화인 듯이 대화하는 독백으로 시를 구성하였고, 이 시는 함께 영화를 보지만 결국 혼자서 나오는 너와 나, 그리고 텅빈 극장을 다룬다.

‘함께’-‘혼자’가 이 시의 포인트이다.
만남이 없는 만남, 만남이 아닌 만남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대화내용]

- 산문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 사실적인 시로 읽었습니다.

- 극장과 깊이 없는 어둠은 통한다, 극장은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진정한 만남(공통체)을 이루지 못하는 사회이다, 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 극장이라는 삶의 무대를 그리고 있는데, 시인은 현대사회를 매우 어둡게 보고 있고, 극장 속에서 만난 연인도? 함께(=혼자) 영화를 보고는 결국 혼자서 나와버리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 관계의 모호성이 드러난다, 관계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관계의 방식과 오늘날의 문화가 그대로 반영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앞선 다른 시들의 난해함에 비하면 이 시는 비교적 쉽고 명료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이 시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2시에 시작한 세미나가 벌써 5시를 넘겼습니다. 

 


3. 송승언의 시풍과 시작  (발제문의 일부를 여기 담습니다)

 

‘철과 오크’는 제3부로 구성되어 있고 총 55개의 시가 담겨 있다.

 

송승언의 시는 절제된 언어로 가득차 있고, 감정적인 고조나 노출이 절제 혹은 은폐된 차가운 공간과 낯선 이미지들로 가득해 보인다.

 

“송승언의 시는 텅빈 이미지를 낯설게 바라보는 ‘나의 눈’에서 시작된다. 감정적인 파고에 휩쓸리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나와 너 사이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대립과 엇갈림을 집요하게 주시한다. 그 균열의 한 가운데서 파생되는, 의미가 증발되어버린 창백한 공간과 어떤 적요한 사건들이 불러오는 느낌은 지극히 낯설고 초현실적이다. 그 느낌은 그대로 잠재된 주체의 기억을 깨우고, 오감과 이성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송승언은 지금 깨어 있는 잠 속에 있다. ‘물과 빛이 섞이는 감정’울 고요하게 응시하는 그는 새로운 의미의 원천이 되는 언어적 가능성을 발견해가는 중이다.”
   - ‘철과 오크’ 소개문에서 인용

 

이에 따르면 송승언의 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무감정 혹은 감정적 절제
2) 낯선 시선, 낯선 느낌 - 전통적 일상적 의미의 벗어남
3) 초현실적
4) 오감과 이성의 경계를 해체하는 자유로움(해체성)
5) 실험성 - 언어적 가능성 모색

 

강동호는 ‘철과 오크’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의 시에 대한 ‘그 무엇’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시가 투명한 감각의 운용을 중시하면서 그 감각의 끝에 찾아드는 어떤 해체의 경지를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의 형식으로 실행에 옮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의미로부터 해방된 이미지는 아무 것도 없다. 낯선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텅빈 이미지를 낯설게 바라보는 나의 눈이다,”


그의 시에는 개인적 경험에 대한 회고적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그 이미지들은 대체적으로 텅빈 이미지, 사진기에 담긴 어떤 풍경을 낯설고 뒤틀리게 배치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발제자로서 그의 시 전체를 살펴보면서 그의 낯선 시선과 소재의 별남과 시작법의 특이성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시에 ‘죽음’ 메타포가 매우 강하다, 죽음, 죽는다, 죽어서, 죽은 등등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표현이 담긴 시가 총 18개이며, 사형, 자살 암시, 목매담, 묘지, 해골, 얼굴에 단검, 나이프, 살 썩는 냄새, 유령, 가죽을 벗기다, 목을 묶는 생물, 겨누다, 도끼질, 인간의 맛 등등 죽음을 암시 혹은 비유하는 시어가 등장하는 시가 총 26개이다. 총 55개의 시 가운데 44개이다. 80%의 시에 죽음 모티브가 등장하는 것은 눈여겨볼만한 일이다. 이러한 죽음 모티브는 어둠, 그림자를 자주 언급하는 그의 정서와 연결된다.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시인 송승언의 얼굴과 시집 표지를 사진으로 함께 붙이니까 위 후기가 깨어지는 통에 세번째 사진을 포기하고 올렸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송승언과 요즘 시인들을 비교해 보면, 그의 시가 더 설명적이고 덜 압축적이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메타포나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시가 아니라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설명적이고 덜 압축적인 그의 표현형식이 그의 다른 시에도 일관적이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무엇을 의도하였다면 그 의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케테르는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오 ~~ 심오한 질문을 ~~ 젊은 시인들이 실험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하려는 것은 젊은 시인답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그리고 전통 서정시가 다루는 소재나 시적 형식과 방법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삶의 경험이 있는가?하는 차원에서 보면 도시에서 태어나 자연을 경험한 바가 적고 역사참여적 경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즉 시란 결국 자신의 삶의 이야기, 경험한 것, 본 것에서 나오기 마련인데, 송승언을 비롯한 젊은 시인들의 시는 전통적 가치나 방법론을 의식적으로 해체하고 도전하는 측면도 있겠지요.
설명식 혹은 자신의경험과 느낌을 특이한 방식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시를 전개하는 방법론은 아마도 현재 자유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산문시라는 형식도 있지만, 딱히 산문이라고만 할 수 없는 스타일로 보입니다. 은유 즉 특이한 메타포나 상징을 사용하기도 하지만은 주로 환유의 방법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딱 잘라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들의 시에 드러나는 아픔이나 고독이나 비명 같은것은 좀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목소리는 우리가 보는 세상과 사물은 다르다, 그렇게 노래하고 즐거워하고 밝은 빛으로 볼만한 구석이 어디있느냐? 하는 항변이나 함성같은 것으로 느껴지네요 ^^
답이 되지는 않겠지만 답신합니다 ^^

희음님의 댓글

희음

지난 시간 빠졌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더랬습니다. 바로 케테르 님의 후기죠! 아니나 다를까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충실한 후기,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없는데도 세미나를 지켜주시고 빛내주신 케테르 님, 오라클 님, 다른 회원님들께도 감사드리고요.
뒤늦게 두 분의 덧글에 대해 가지 하나 얹는다면, 송승언의 시야말로 다른 텍스트들과는 다른 시 텍스트를 대하는 독법, 낭송법, 혹은 향유법을 가지고 다가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송승언 애독자이자 전문가인 희음님이 빠져서 아쉬웠어요 ^^ 금주 금욜 뵙겠습니다 아자 ~~~~

무긍님의 댓글

무긍

케테르 선생님 그리고 희음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집에 와서도 계속 머리속에 남아 있는 건 뭔가 싶었습니다.
송승언 ,  시인입니다.  참으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내용적인 부분에서 ,  사유하는 방법과 , 지향하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소개해주신 희음님 그리고 발제하여 , 감동으로 이끄신 케테르님 , 두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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