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전집읽기] 반시대적 고찰2 :: 9~10장 발제
오라클
/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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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 고찰2 > 5장 :: 어느 시대가 역사를 포식할 때 위험해지고 삶에 적대적이 되는 5가지 측면
①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내면과 외면의 대립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격이 약해진다. (5장)
②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시대는 다른 시대보다 정의를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다. (6장)
③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민족의 본능은 손상되었고, 개인도 성숙을 방해받는다. (7장)
④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유해한 믿음(이 시대는 늦둥이이며 아류라는)을 심어준다. (8장)
⑤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시대는 아이러니라는 위험한 분위기에 빠지고, 견유주의라는 더 위험한 분위기에 젖는다.(9장)
······>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대는 점점 교활하고 이기적인 실천으로 굳어가고, 그로 인해 생명력은 파괴된다.
9. 하르트만 :: 철학적 패러디의 작가, 세계과정에 인격을 헌신
< 역사적 과잉 ······> 아이러니, 견유주의 >
역사의 과잉 ······> 아이러니, 견유주의 > ① (아이러니) 우리시대는 현대인의 자부심과 역설(황혼처럼 역사화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식, 청년시절의 희망과 힘을 미래에 구출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동시에 자리잡고 있다. ②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은 견유주의로 빠지고 역사의 진행(세계발전 전체)을 견유주의 규약에 따라 정당화하고 있다. 지금 있는 대로 될 수밖에 없었고, 인간은 현재 사람들의 모습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될 수밖에 없었다’에 누구도 반항해서는 안된다. 역설 속에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견유주의의 쾌감으로 도망친다.
‘세계과정에 인격을 헌신’에 대하여 > ① (현대인의 역사인식) 시대에 맞게 아무 걱정없이 사는 현대인의 방식을 하르트만은 ‘세계과정에 인격을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라 불렀다. 세계과정의 상속자인 현대인은 생성-수수께끼의 의미와 해답이며 인식의 나무에 열린 열매로 표현된다. 이 상징물은 현대인이 맨 마지막에 왔을 지언정 모든 시대의 장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② (니체의 비판) 역사의 고찰이 이렇게 비약한 적은 없었다. 지금 인간의 역사는 동물과 식물의 역사의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완성된 자연’에 대하여 > ① (현대인의 역사인식) 현대인은 세계과정의 피라미드 위에 우뚝 서서, 인식의 쐐기돌을 얹으면서 자연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목표에 이르렀다. 우리가 목표이며 우리가 완성된 자연이다.” ② (니체의 비판) 19C의 오만한 유럽인이여, 그대는 제 정신이 아니구나! 너의 지식은 자연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자연을 죽인다. 지자(인식)로서의 너의 높이를 능력자(삶)로서의 너의 낮음에 재어보아라.
< 하르트만 & 니체의 역사감각1 >
하르트만 :: 헤겔의 철학적 패러디 > ① (헤겔의 철학적 패러디) 헤겔은 “정신이 강하게 밀치고 나갈 때, 우리 철학자들도 거기에 있다”고 우리를 가르쳤다. 하르트만은 무의식적 아이러니의 철학을 썼다. ② (시대의 해골화, 인류의 과거) 그에게 생성에 대해 계몽되지 않은 사람(내적으로 깨끗이 비워지지 않은 사람)은 과거의 존재가 될 사람이다. 그는 세계과정을 위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정해진 과제를 무의식적 영감으로 묘사했다. 하르트만의 세계사 패러디보다 역사적 교양의 과잉에 효과적인 약이 어디에 있겠는가? ③ (시대의 해골화, 인류의 장년) 무의식적 아이러니로부터 하르트만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은, 우리 시대는 현재의 모습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의 해골화라는 현상은 하르트만에게서 동력인으로서 뒤에서뿐만 아니라, 목적인으로서 앞에서부터도 정당화된다. 하르트만은 인류가 곧 도달할 나이를 ‘장년’이라 부르며 이 시기를 행복한 상태라고 묘사한다. ④ (역사적 교양, 현대의 과정 광신자) 역사적 교양을 받은 자, 생성의 흐름에서 헤엄치다가 익사한 현대의 과정 광신자가 무슨 할 일이 또 남아있는가? 그는 살아온 대로 계속 살아오고, 이제까지 좋아했던 것을 좋아하고, 미워했던 것을 미워하며, 읽어왔던 신문을 계속 읽는 일밖에 없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죄밖에 없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사는 죄. 무의식적 패러디 작가는 모든 개개인들에게 ‘세계과정의 목적이 세계구원을 위해 세계과정에 인격을 완전히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니체 :: 역사인식, 역사감각 > ① (대중: 역사 주체 & 개인: 삶의 주체) 그러나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세계과정이나 인류-역사의 모든 구조를 포기하는 시대가 올 것이며, 우리가 대중(역사 주체)을 관찰하지 않고 생성의 거친 강물 위에서 다리가 되는 개인(삶의 주체)을 관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 개인들은 하나의 과정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간적-동시적으로 산다. ② (인류의 목적 – 위대한 자의 표본) 거인(위버멘쉬)이 시간의 황량한 틈을 통해 다른 거인을 부르고, 그들의 발밑에서 난쟁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정신의 대화를 지속한다. 역사의 과제는 위대한 자(위버멘쉬)가 산출할 수 있는 동기와 힘을 부여한다. 인류의 목적은 종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표본들 속에 있다.
< 하르트만 & 니체의 역사감각2 >
하르트만 ::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경멸 > “세계과정이 과거에 무한히 지속되었다고 하는 것은 발전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 마찬가지로 세계과정이 미래에 무한히 지속될 거라고 인정할 수 없다. 이 두 생각은 하나의 목표에 이르는 발전이라는 개념을 폐기할 것이고, ······ 논리적인 것이 비논리적인 것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세계과정의 시간적인 종말=최후의 심판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니체의 비판 :: 실험을 위한 시간 > 어느 누구도 과거와 미래를 너처럼 구토가 날 정도로 경멸하지 않았다. 당신의 서술이 옳다면 내일부터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신문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멋진 실험을 위한 시간은 우리에게 부족하지 않다. 하르트만의 역사적 감각의 방종에 대해, 존재와 삶을 손상시키면서 과도하게 과정을 즐기는 것에 대해, 풍자적 악의를 총동원해야 한다. ‘인류’가 무엇 때문에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지만, 너 ‘개인’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는 스스로 물어보라. 너 스스로 하나의 목표, 하나의 목적 ‘그것 때문에’를 설정함으로써 너의 현존재의 의미를 차후에 정당화하려고 하라. 단지 그로 인해서만 몰락하라. 위대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위대한 혼을 아끼지 않고 몰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 하르트만 & 니체의 대중관 >
니체의 대중 :: 획일적 > ① (대중의 가치) 대중은 3측면에서만 주목할 가치가 있다. 첫째 나쁜 종이 위에 낡은 건판으로 제작된 위인의 희미한 복사로서, 둘째 위대한 인물에 대한 저항으로서, 셋째 위대한 인물의 도구로서 가치가 있다. ② (대중과 통계학) 그 외의 측면에서 대중은 악마와 통계학이 데려가버려라! 통계학은 역사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얼마나 비천하고 구역질 날 정도로 획일적인지 증명했다. 중력이나 어리석음, 흉내내기, 사랑과 굶주림의 효과를 법칙이라 불러야 하는가?
하르트만의 대중 :: 거대한 충동 > 거대한 대중의 충동을 역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위대한 인물을 범람하는 수면 위에서 눈에 띄는 조그만 거품으로 간주하는 역사 서술방식이 존중받고 있다. 대중이 위대한 질서를 만들어내며, 거기서 우리가 소위 ‘위대하다’고 표현하는 ‘역사적 권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가장 고귀한 것은 대중에게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 위대함은 성공에 좌우되어선 안된다. 데모스테네스는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위대했다.
< 하르트만_인류의 장년기 & 니체_젊은이의 왕국 >
하르트만 :: 인류의 장년기 > 하르트만은 현재를 ‘인류의 장년기’라 부르고, 장년기 뒤에 노년기를 예언하는데, 우리 시대의 노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다. 저 교활하고 역사적 교양을 갖춘 이기주의의 장년에 상응하는 것은, 더러운 욕망을 가지고 품위 없이 삶에 매달리는 노년이다.
니체 :: 젊은이의 왕국 > 우리는 이 둘에 대항하여 우리 젊은이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 현재는 역사적 감각의 과잉에 고통을 당하는데, 사람들이 바로 이런 과잉을 의도적으로 장려하고 고무하고 이용한다. 사람들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 과잉을 이용하여 이기주의의 장년적 성숙에 기들이려고 함으로써,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적의를 분쇄하려 한다. 사람들은 역사의 우세를 통해 역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불, 오기, 자기망각, 사랑이라는 젊은이들의 강한 본능의 뿌리를 제거하고 정의감의 열기를 가라앉히며, 서서히 성숙하려는 욕망을 빨리 끝내고 빨리 쓸모있고 생산적이 되려는 반대욕망으로 억압하려 하며, 감각의 정직성을 회의로 병들게 한다. 역사는 젊은이의 가장 아름다운 특권을 속여서 빼앗을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과잉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이것이 지금 그토록 냉소적으로 요구되는 ‘세계과정에 대한 인격의 완전한 헌신’의 의미이다. 하르트만 식의 ‘장년과 노년’의 목표가 세계구원을 아닐 것이다. 세계가 이 장년과 노인들로부터 구원된다면, 세계가 지금보다 더 구원된다. 그렇게 되면 젊은이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 에우아르트 폰 하르트만 (E. v. Hartmann)
《무의식의 철학》으로 유명한 독일의 형이상학적 철학자. 그는 자기체계의 중심을 인간 무의식이라는 단일한 현상에 두었으며, 이 무의식은 3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정正] ‘무의식’ 단계라 부른 첫 번째 단계는 이성과 의지,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가 모든 존재의 바탕에 깔려 있는 절대적 정신원리로서 결합되어 있다.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이상과 의지는 분리되고, 맹목적 충동인 의지는 무의식의 우울경력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반反] ‘우주적’ 단계라 부른 두 번째 단계는 의식적 생활이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의식적 생활 속에서 행복과 같은 이성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쓰기 시작하며, 인류는 현재 이 단계에 서 있다. 이 단계에서는 비합리적 의지와 합리적 정신의 힘들이 서로 다툰다. 인간의 비참과 문명은 계속 전진하다가 마침내 비참과 쇠퇴가 극에 달하게 될 것이다.
[합合] 그때 비로소 세 번째 단계, 즉 의지가 저지되고 이성이 지배하는 헤겔적 승리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개별 인간은 이제 자살의 유혹과 모든 다른 형태의 이기심을 이성적 사유로 극복해야 한다. 인류는 점진적 사회발전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견유주의 & 냉소주의 :: 요약
* 어원 : 고대 그리스의 키니코스(Cynics) 학파에서 유래. 키니시즘(Cynicism 견유주의, 냉소주의)
* 일반적 정의 : 사회적 관습, 전통을 부정하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활할 것을 주장하는 사상
* 고대의 견유주의 : 개같은 선비. 말하는 대로 살기, 더 나아가서는 살아온 대로 말하기. 말과 삶의 일치
* 현대의 냉소주의 : 이성의 한계=계몽주의의 한계로부터 나온 냉소주의
※ 고대의 견유주의
견유주의 :: 철학 운동 > ① 통상적 의미의 철학학파가 아니라, 철학의 특별한 유형이다. ② 견유주의는 학파가 아니다. 학교는 물론이고 회합도 없다. ③ 견유주의는 저술이 없다. 저작 대신 일화를 남겼다. 이론서의 학습을 통한 전수방식(위계가 생기고, 정통과 이단이 생긴다)이 아니라, 삶을 통한 전수방식(행위, 몸짓, 태도, 삶의 스타일)을 택했다.
견유주의 :: 의식과 존재의 화해 > ① 견유주의는 의식과 존재의 화해. ② 견유주의의 분열 = 이론에 대한 냉소적 태도(조롱과 냉소. 풍자적 방향) + 실천에 대한 진지한 태도(과도한 진지함, 실존주의적 방향)
견유주의 :: 진실말하기=파레지아 > “견유주의적 실천은 진실말하기, 두려움없는 진실말하기, 무제한적이고 용감한 진실말하기, 용감함과 과감함이 참기 힘든 오만함으로까지 치닫는 진실말하기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 살아가는 방식과 진실말하기의 본질적 결합 ······ 견유주의는 삶의 양식과 진실말하기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결합된 철학의 형식이다.” 푸코.
견유주의 :: 스타일의 기능 > 견유주의는 ‘말과 삶의 일치’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견유주의자의 스타일은 3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① 수단적 기능 (애착 없는 삶의 수단이자, 그런 삶의 가능조건으로 기능한다) ② 축소의 기능 (불필요한 의무들을 최대한 축소한다) ③ 진실과 관련된 검증의 역할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견유주의 :: 발가벗음 > 3가지 기능은 ‘발가벗음, 누드’로 통합된다. ① 발가벗은 삶이란 삶의 모든 것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것(성교 등). 무엇이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하는 것. 발가벗음은 사람들이 갈구하는 것에 대한 애착없음을 보여준다. ② 발가벗음은 자연이나 본성에 기초하지 않은 쓸모없는 의례·허식, 무의미한 의무들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③ 발가벗음은 진실의 드러남이다. ∎결국 견유주의자에게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몸이고 삶이다. 몸이 말하고 삶이 말하는 것. 그들의 진실말하기는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 드러내기’이다. “그것은 실존형태를 몸짓으로, 신체로, 옷입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방식으로, 진리 자체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만든다.” 푸코.
※ 현대의 냉소주의
견유주의 & 냉소주의 > 견유주의자들에 대한 현대연구서는 고대 견유주의와 현대 냉소주의를 구별하고(깊은 단절이 있음을 전제), 고대 견유주의에는 긍정적 가치를, 현대 냉소주의에는 부정적 가치를 부여한다.
슬러터다이크의 <냉소적 이성비판> “우리는 계몽되었고 무감각해졌다. 철학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임종의 순간을 맞고도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해 죽지도 못하고 있다.” 지나치게 계몽된 현대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현대의 냉소주의는 앎에 대한 무감각을 본질로 하는 ‘철학의 죽음’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초래한 진리에 대한 냉소. “(진리에 대한 냉소) 인간의 몸을 구석구석 밝히겠다는 근대 계몽주의는 사진기술과 결합해서 포르노그라피를 만들어내고 결국 몸의 신비를 파괴해서 사랑의 무의미함을 산출한다. ······ 성해방은 사랑없는 섹스를 만연시키지만,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믿지 않는 섹스 냉소주의에 감염된다. ······ 이제 현대인들은 오늘의 학습이 내일의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 우리는 계몽된 사람들이지만 똑똑하면서도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갈 뿐이다. (계몽의 역설) 어떻게 이성적 인간이 노예적 인간으로 귀결되는지, 어떻게 도구적 이성의 발전이 파시즘을 낳는지.”
10. 역사의 과잉에 대처하는 :: 비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
역사의 위험 ······ 허약한 인격성 > ① (허약한 인격성) 역사의 위험을 추적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역사의 과잉의 결과로 근대인들에게 몰려왔던 고통의 흔적(인간성의 미성숙, 냉소주의, 회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근대적 성격은 허약한 인격성을 드러낸다. ② (젊은이들의 역사교육) 젊은이들은 근대인의 역사를 통한 청년교육에 저항해야 하며, 인간은 무엇보다 사는 방법을 배우고 오로지 삶에 봉사하기 위해 역사를 사용해야 한다. 이 저항을 이해하려면 젊어야 하며, 우리의 현재 젊은이들의 조로현상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서 원래 무엇에 저항하는지를 알려면 아무리 젊어도 지나치지 않다.
독일의 청년교육 :: 자연에 반하며, 청년의 본능을 파괴 > 독일의 청년교육은 잘못되고 비생산적인 문화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들이 배우는 교양은 교양에 관한 피상적인 지식에 불과한데, 문화는 오로지 삶으로부터 성장하여 활짝 핀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청년교육의 목표는 자유로운 교양인이 아니라 학문적 인간으로, 삶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하여 삶으로부터 떨어져있다. 이러한 교육이 자연에 반하는 것임을 청년은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이 본능은 인위적으로 강압적으로 교육에 의해 파괴된다.
독일 청년교육 :: 교양에 대한 지식 & 삶에 대한 지식 > 우리는 교육에 의해 강압적으로 파괴되는 청년의 본능을 보호하기 위해 우선 교육(조작)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 사람들은 현재 우리가 처한 극도로 고통스러운 현실에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독일청년을 무감각한 ‘교양인’으로 길러내는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독일 교육의 규약은 “젊은이는 교양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야 하지, 삶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양에 관한 지식=역사적 지식은 젊은이를 휘젓는다. 젊은이의 머리는 엄청난 수의 개념들로 가득 차는데, 이 개념들은 삶을 직접적으로 관찰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시대와 미족들에 대한 간접적 지식에서 추출된 것들이다. 스스로 체험하고 자기 체험들이 서로 연관되어 생동적인 체계가 자기 내면에서 자라나는 것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망은 마비되었다.
필요 허구에 필요 진리를 대적 > 근대의 독일인은 그들의 교육의-문화의 연구진리를 믿는다. 필요 허구(교육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 필요 진리(교육으로 인해 문화가 없다는 것)를 대적시켰을 경우, 이 믿음도 무너질 것이다. 여기서 필요 진리란 독일인이 교육으로 인해 문화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 우리의 첫 세대는 자신과 대항하여 낡은 첫 본성과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습관과 본성을 얻도록 스스로를 교육해야 한다.
니체와 데카르트 :: 사고하는 존재 & 살아있는 존재 > ① (존재에 대한 인식의 차이)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니체. “나는 살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② 생명은 없지만 활동적인 개념단어-공장으로서, 나는 자신에 관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살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꽉 차서 푸른 ‘삶’이 아니라 공허한 ‘존재’가 내게 허용되었다. 나의 원래감각은, 내가 사고하는 존재임을 보증하지, 내가 살아있는 존재임을 보증하지 않으며, 나는 동물이 아니라 기껏해야 사유자임을 보증할 뿐이다.
역사적 과잉(장년, 노년)에 대처 :: 비역사적인 것-초역사적인 것(청년) > ① (역사의 과잉, 삶의 조형력의 상실) 현재 삶은 역사 병, 즉 역사의 과잉에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우리는 삶의 조형력을 상실해버렸다. ② (비역사적인 것, 초역사적인 것) 이 질병을 치유할 힘은 청춘(비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비역사적인 것’이란 잊을 수 있고(망각) 제한된 지평 안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기술과 힘을 말하며, ‘초역사적’인 것은 생성으로부터 현존재에 영원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 즉 예술과 종교로 돌릴 수 있는 권력을 뜻한다. 이 시대의 학문적 고찰은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것-영원한 것을 보지 않고 생성된 것-역사적인 것만을 보기 때문이다. ③ (역사 병을 막는 해독제) 삶이 인식을 지배해야 하는가, 인식이 삶을 지배해야 하는가? 삶을 파괴하는 인식은 자신도 같이 파괴한다. 인식은 삶을 전제로 한다. 삶의 위생학이 학문 바로 옆에 자리 잡는다. 비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 너무 무성해져 삶을 뒤덮는 것=역사 병을 막는 자연적인 해독제다. ④ (청춘의 사명) 그러므로 청춘의 사명은 ‘건강’과 ‘교양’의 현재가 가진 개념들을 뒤흔들어 잡종의 개념-괴물에 대한 증오와 조롱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들의 내면에 있는 활동하고 투쟁하며 제거하고 분열하는 힘과 점차 고양되는 삶의 감정을 매시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교양 & 독일의 교양 > ① (그리스의 교양 & 독일의 교양) 그리스인들도 몇 세기 동안 현재의 우리처럼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의 ‘교양’은 셈족과 바빌론, 리디아, 이집트의 형식과 개념들이 뒤섞인 카오스였다. 이는 지금 ‘독일의 교양’과 종교가 모든 외국들과 전 시대들이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는 카오스와 비슷하다. ② (그리스의 카오스 & 독일의 카오스) 하지만 그리스인은 델포이의 가르침에 따라(너 자신을 알라),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고 거짓-욕구를 사멸시킴으로써 차차 카오스를 조직하는 법을 배웠다. 이처럼 독일인도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함으로써 자신 안의 카오스를 조직해야 한다. 문화를 가장하고 은폐하는 삶의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내면도 외면도 없고 가식도 관습도 없는 개선된 새로운 자연으로서 문화라는 개념, 삶과 사유와 외관과 의욕의 일치로서의 문화 개념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진실이 지금 존경받는 교양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도 있고, 장식문화 전체의 몰락을 가져올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