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사상사론] 발제문
기픈옹달
/ 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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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치용과 명청 시기의 철학 / 중국의 지혜
이른바 ‘중국사상’의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 낡은 사상에서 어떻게 ‘근대’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펑유란이 <중국철학사>를 통해 전통사상에 ‘철학’이라는 시민권을 부여해주었지만 여전히 ‘중국철학’이란 2등 시민일 뿐이다. 리쩌허우는 ‘중국사상’이라는 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하나 그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현대신유가’라 불리는 연구를 비판한다. ‘현대신유가’가 각각 신유가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했다면 리쩌허우는 신유가의 한계성을 지적한다. 대신 그가 주목하는 것은 더 이른 시기, 공자의 사상이다.
그는 공자의 사상에서 이미 ‘내성’과 ‘외왕’의 두 대립관계가 포괄적으로 논의되었다고 본다. 다만 공자 시대에는 내성이 외왕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이야기되었다. 그러던 것이 맹자를 지나 송대 이후에는 내성이 훨씬 강하게 부상한다. 나아가 내성만을 중시하기에 이른다. 현실정치나 사회적 효용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오직 도덕에 대한 이야기만 남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북송이후 강화된 군권에 있다. 군권을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도덕적으로 군주의 마음을 바로 잡는. 正君心의 정치철학 이론이 등장한다. 도덕적 가치가 모든 것 위에 있는 상황. 리쩌허우는 이를 ‘준종교’, 일종의 ‘도덕적 신학’이라 부른다. 원시유학에서 도덕적 내용이 정치였다면, 송명이학에서는 정치의 실제 내용이 도덕에 종속되었다.
그렇다고 내왕의 도덕적 수양만 강조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학자들과는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진량과 섭적, 이지 등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이들은 내성만을 강조하는 이학자들의 협소함을 비판하였다. 리쩌허우가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것은 도덕에만 목메는 이학자들 때문에 ‘망국’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겪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맹자와 정/주와 육/왕을 잇는 전통 대신 순자, 동중서에서, 왕통, 진량, 섭적에 이르는 정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내면의 도덕적 자각 대신 현실의 환경을 변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이들이었다.
이들을 잇는 인물로 명말청초의 황종희가 있다. 그는 황제의 권력을 제한할 것을 요구하며 그 대신 재상과 학교(일종의 의회)를 제안한다. 그는 법에 주목하여 이학자들이 내면의 덕성을 이야기하던 것과 차이를 두었다. 이런 치법과 치인, 외왕과 내성, 경세치용과 존양수심, 政과 敎의 분리야 말로 근대와 고대의 경계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리쩌허우는 이들에서 근대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리쩌허우는 송명이학에서 근대적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그는 송명이학은 봉건적 체계라고 딱잘라 말한다. 그렇다고 이들과 다른 외왕/치법을 주장한 이들이 근대적 사유를 완벽하게 내놓은 것도 아니다. 근대란 단순히 사유의 변화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경제구조 및 사회체제의 변화와 함께 가는 것이라는 생각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글에서는 해외의 어떤 학자들이 중국의 지식이들은 개인주의적 ‘자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고, 아울러 이런 전통을 송명이학까지 거슬러올라가서 이학을 바로 계몽이고 자립이라는 관점으로 여기는 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반대한다. 이것과는 반대로 이학은 원래가 계몽이 아니라 어떤 준종교적인 도덕적 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사대부 지식인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봉건적•강상적•준종교적인 윤리적 체계에 복종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근대 사회가 가져온 직업의 분화와 경제적 자유를 통한 인격적 독립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오직 ‘배워서 우수하면 벼슬하는’ 중국식 정교합일적인 사회적 출로에서 한데 모여 있었기 때문에, 황권-관료체계의 정권구조에 반드시 기대야만 했으며 정권을 쟁취하고 힘을 얻어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싸워 이겨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이상화된 원시 씨족사회의 샤면을 전통으로 하여, 중국 지식인의 최고이상은 ‘제왕에 응하고(應帝王)’, ‘재상의 위치에서 임금을 돕고(作宰輔)’, ‘제왕의 스승이 되는(爲帝王師)’ 것이었다, (548쪽)
같은 맥락에서 리쩌허우는 고증학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후스가 고증학의 태도를 현대적 과학방법론으로 오해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왕부지(선산)에 주목한다. 그가 이전의 사상가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역사에 객관적 법칙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치통감의 사마광이나 주희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역사의식으로, 이제 사학(역사의식)이 경학(윤리적 교의)를 대신하여 주류가 된다. 장학성이 말한 ‘육경은 모두 역사’라는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중국의 ‘진보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중쯔전, 웨이위안에서 양치차오, 장타이옌에 이르기까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경세치용’이라는 관념의 영향 아래에서 사실과 역사, 경험을 중시하여 개혁과 변법, 혁명을 주장했다. 궁쯔전의 ‘존사尊史’나 웨이위안의 ‘사장師長’ 또는 양치차오의 ‘신사학新史學’, ‘장타이옌의 국수國粹’를 막론하고, 이것들은 중국의 이런 전통이 근대라는 특정한 조건에서 계승•발전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565쪽)
리쩌허우는 책 말미에서 자신의 연구방향에 대해 서술한다. 책 전체를 통해 보았듯 그는 중국 민족의 특징, 심리구조와 사유모델을 그
려보는데 관심이 있다. 그는 민족심, 민족적 지혜, 문화전통 등으로 이를 부르는데 그 토대가 되는 것은 공자이다. 비록 그가 ‘심리구조나 민족의 지혜를 막론하고 모두 다 일단 만들어지면 끝내 변하지 않으며 시공과 인과를 초월하는 그런 선험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은 여전히 기나긴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산물일 뿐이다’라고 말하나 그 변화가 구조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바뀌기나 할까?
그가 중국적 특징, 중국의 현실적 물질생활에 혈연적 관계를 놓는데 과연 이것은 얼마나 변화하였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계급사회에 진입하고 각종 경제•정치제도의 변천을 거쳤지만, 혈연적 종법의 유대를 특색으로 삼고 농업가정의 소생산을 기초로 하는 사회생활과 사회구조는 거의 변동되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 씨족전통의 낡은 풍속과 습관은 오랜 시간 보존되고 누적되어 매우 강력한 문화구조와 심리적인 역량이 된다.’
‘민족심’이라는 표현은 마치 근대국가 이전에 고유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사유하게 만든다. 과연 정말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의문이 들면서도 한편 그것을 고착화시키는 표현처럼 보여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습을 보며 과연 이 혈연적 유대에 근거한 가부장제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부장제는 전지구적 현상인가 아니면 ‘유교적 가부장제’ 혹은 ‘동양적 가부장제’ 아니면 ‘한국적 가부장제’라 부를 만한 ‘문화구조’가 있는 걸까?
리쩌허우는 끝에서 중국적 지혜의 특징을 심미적 정감으로 규정하며 이를 ‘낙감문화’라 이름붙인다. 이는 서양의 원죄의식-죄감문화와 대비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러한 분석이나 방향이 불편하다. 죄의식이 문제라 하여 어찌 즐거운 감정을 호출한단 말인가. 그는 공자와 장자 등을 이끌어 낙감문화를 설명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장자>에서 읽어내는 것은 비감悲感이며 이는 <논어>의 공자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서 초연함(哀樂不能入)이 목표겠으나 그 목표는 거꾸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為春 五百歲為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為春 八千歲為秋 而彭祖乃今以久特聞 眾人匹之 不亦悲乎 (소요유)
一受其成形 不亡以待盡 與物相刃相靡 其行盡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人謂之不死 奚益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人之生也 固若是芒乎 其我獨芒 而人亦有不芒者乎(제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