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세미나자료
  • 세미나자료
  • 세미나발제문, 세미나후기를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세미나자료

[역사] <민중의 세계사> 9/7 발제 (냉전시대)
삼월 / 2016-09-09 / 조회 1,626 

첨부파일

본문

9. 냉전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창설대회는 이 조직이 이전의 국제연맹과는 다를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국제연맹의 실패는 태생적 결함에서 비롯되었고,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른다는 점에서 국제연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대국들 간의 견제도 서로 상당했다. 처칠은 소련을 압박하고 있었고, 미국이 일본에 핵공격을 감행한 데에는 러시아에 그 파괴력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 강대국들 내부에서 변화의 필요성도 있었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복지확충과 산업국유화정책으로 급진주의자들을 달랬고, 미국에서는 강력한 파업들이 있었으며, 동유럽에 파견된 소련 점령군이 공산당의 대규모 관료조직화를 감독했다. 각국 지도자들에게는 통치 구조를 공고히 해 줄 보호막으로서 국제적 화합의 분위기가 필요했다. 실제로 동서유럽의 지도자들은 서로의 정책에서 덕을 보고 있었다.

강대국들 간의 싸움은 1946 ~ 47년에 공식적으로 불거졌다. 처칠이 먼저 러시아를 견제하며 ‘철의 정막’을 언급했다.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거래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은 마셜플랜을 통해 미국이 주도해서 유럽경제를 부흥시키겠다고 밝혔다. 동유럽에서 스탈린을 저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마셜플랜 발표 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원들이 정부에서 쫓겨났다. 스탈린 역시 동유럽에서 불만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비슷한 수단들을 동원했다. 공산당원이 아닌 장관들은 공직에서 쫓겨났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강제로 공산당에 통합되었다. 스탈린은 서방세계 지지자들 뿐 아니라 독립적인 공산당 정권의 출현도 두려워했다.

1948년 여름에 ‘냉전’시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독일에서 소련 점령 지구를 고립시키자, 소련이 서베를린의 물자수송을 봉쇄했다. 미국과 영국이 대규모 공수작전을 통해 서베를린에 물자를 이송했고, 이는 미국과 영국의 ‘자유 수호’ 선전 캠페인의 일부가 되었다. 이 캠페인이 서방세계에서 좌파활동가와 공산당원들을 탄압할 명분을 제공했다. 미국 노동조합에서 공산주의자 간부들에 대한 제거압력이 있었고, ‘충성서약’을 거부하는 공무원들이 해고당했다. 조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한 반미활동조사위원회로 인해 많은 영화감독과 작가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반공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사분오열되었고, 영국에서는 몇몇 노동조합이 공산당원의 간부직을 금지했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다. 세계에는 두 개의 커다란 블록이 형성되었고, 두 블록은 각각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하고 경제교류를 대폭 줄였다. 미국은 생산량의 20%, 소련은 40%까지 군비가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철의 장막’ 양쪽에서는 획일적 이념이 강요되면서 체제비판세력은 자연스럽게 다른 체제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가졌다. 냉전은 대체로 열전으로 발전하지 않았으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945년 분할선으로 수립된 한국 이남과 이북의 두 독재자들은 국토 통일로 정통성을 획득하고 싶어 했고, 북의 김일성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작전개시를 승인한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일본이 공산화될 것을 우려해 서둘러 전쟁에 참여했다. 트루먼에게는 군비 증액안 승인을 꺼리는 의회를 설득할 좋은 기회였다. 3년간 치러진 전쟁에서 한국 대중은 얻은 게 없었다. 최종 분단선은 전쟁이 시작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좌파들은 북한과 남한 어디에서나 탄압을 받았다. 남한은 1990년대까지 독재에 시달리며, 한국전쟁의 명분이었던 ‘민주주의’를 거의 누리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냉전의 집약판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양쪽의 지배계급들이 계몽의 언어를 앞세워 가능한 더 많은 지역을 차지하려 했고, 그런 행위의 정당성을 양쪽 모두 수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장 짧았던 황금시대

1970년대는 짧은 황금시대였다. 세계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최장기 호황을 누렸다. 노동자들은 부모 세대보다 잘 살게 되었고, 자식 세대의 생활이 나아질 거라 기대했다. 가전용품 등 소비재의 범주도 늘어나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질적으로 비약했으며, 근무일수가 줄어들고 휴가가 늘어났다. 노동자들은 자동차를 사기 위해 저축을 했고, 젊은 노동자들이 사상 처음으로 독자적 시장을 형성할 만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꿈과 불안정성이 불을 지핀 팝송과 패션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 속에서 1950년대 중반에 ‘청년 문화’가 탄생했다.

소비와 생활양식의 변화는 생산의 변화와 함께 했다. 세탁기, 냉장고, 진공청소기, 텔레비전, 자동차, 항공기가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대량생산 공장체제가 자리 잡았다. 공장의 조직방식과 직무관리, 급여체계, 경영기법은 공장형 모델을 통해 ‘포드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공장형 고용의 확산과 생활수준의 개선은 저항의 가능성도 제공했다. 호황기의 완전고용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이 문제에 신경을 썼다. 장기 호황기는 ‘복지국가’로의 변화도 이루었다. 자본이 노동계급의 저항가능성을 복지혜택으로 매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동의 건강상태와 교육의 개선은 노동력 재생산의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노동시간 단축에 직면한 자본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노동력 공급원을 찾아 나섰다. 대도시로 모인 각 대륙의 노동자들이 출신지별로 특색 있는 문화로 어우러지고, 한편에서는 인종차별의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장기호황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가전제품들은 가사부담을 줄여주어 시간제 유급노동을 가능하게 했고, 고용주들도 인력이 필요했으며, 여성들은 가전제품을 장만하기 위해 취직할 동기가 생겼다. 이제 여성들은 임금을 통해 독립적 지위를 얻었고, 대다수 여성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벗어나 산업계라는 공적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남성노동자 위주의 임금구조는 여성노동자를 저임금노동자로 만들었고,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들이 양육까지 떠맡는 이중의 부담은 계속되었다.

 

식민지 해방

1947년 8월 15일 인도에서 영국이 떠났고, 그 자리에는 무슬림과 힌두교도들 간의 갈등이 남았다. 제국의 관료들은 이전부터 국민회의를 견제하기 위해 무슬림연맹을 이용했다. 인도의 민족운동은 영국의 식민지 분열정책을 이겨내지 못했고, 국민회의 지도자와 후원 기업가들은 작은 영토라도 무슬림과 분리된 독립국가 수립을 원했다. 벵골과 펀자브가 반으로 갈렸고, 이 지역에는 무슬림과 힌두교도, 시크교도들이 뒤섞여 있었다. 한 쪽에는 무슬림이, 다른 쪽에는 우익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이 군림하면서 학살과 테러를 자행했다. 분할의 비극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두고 무력으로 대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카스트와 종교 갈등 등 인도 정당정치의 특색이 이때 나타났고,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군사대결에 예산을 허비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정치 불안정과 군사독재가 뒤따랐다. 1971년에는 동파키스탄이 분리해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군대는 1937년 일본의 중국 공격 후에 살아남은 인민해방군 병사들의 새로운 지지기반이 되었다. 점차 힘을 잃어가는 장제스 군대와 달리 인민해방군은 중간계급과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중국 기업가의 후원도 얻었다. 규율이 잘 잡힌 마오쩌둥의 군대는 미국과 소련의 원조를 받는 장제스 군대를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도망치도록 만들었다. 마오쩌둥의 승리는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 또 중국이 소련과 연합했다고 판단했지만, 그 연대는 오히려 한국전쟁의 미국 개입 등으로 인한 결과였고 오래가지도 않았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전반 중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들 - 방대한 국토, 일본군의 침공, 장제스 군대의 극심한 타락 - 이 마오쩌둥의 집권을 도왔고, 행정기구와 간부들은 교육받은 중간계급 출신 급진주의자들로 채워졌다.

 

제국의 마지막 저항

인도와 중국의 사례는 식민지들의 열망을 부추겼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서 봉기와 독립정부 건설 움직임이 있었다. 1930년대에 런던에서 만나 교류한 유학생들이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의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간계급 출신의 청년세대는 통일된 ‘아랍국가’ 수립을 꿈꿨다. 베트남, 마다가스카르, 알제리와 서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프랑스는 이런 움직임에 폭력으로 강경 대응했다. 비생산적 대응으로 대중의 적개심만 부추기는 상황이 되자 강대국들은 자신들에게 충실한 ‘독립국’ 정부의 수반으로 지역 세력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물자를 낭비하고 인명을 살상한 후에 프랑스도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아시아의 절반 이상과 아프리카 거의 전부를 통치하던 서유럽 강대국들이 퇴각했다. 세계 여러 지역이 여전히 몇몇 경제 선진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휘둘리고 있으므로 이 퇴각을 제국주의의 종말로 볼 수는 없다. 이를 증명하듯, 아메리카 대륙과 동남아시아, 중동에서는 참혹한 분쟁들이 뒤이어 나타났다.

 

석유와 피

석유는 피의 다른 이름이다. 막대한 석유를 보유한 중동은 20세기 하반기에 제국주의 최고의 전리품이었다. 영국은 아랍세력과 유대인 이주세력 모두에게 지원하는 이중정책으로 중동 지배권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양쪽에서 공격받는 결과를 자초했고, 1947년에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영국의 빈자리는 미국과 소련이 탐냈다. 이들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은 강력한 이주민 국가로 성장했고, 아랍에서는 민족주의 장교들이 연이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도 영국처럼 아랍과 이스라엘을 모두 지원하는 이중정책을 썼지만, 이스라엘에 막대한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미국은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 각 나라들의 내정과 쿠데타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중동에서 각 국가와 민족들 간 갈등을 부추겼다.

 

거울을 통해서

신생독립국 중 러시아식 경제조직에 매력을 느낀 나라가 많았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는 30년 동안 일본을 빼면,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고, 많은 식민지 독립국들이 경제 퇴보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러시아의 스탈린주의는 고립과 혁명의 남은 기운으로 성장했고, 동유럽의 스탈린주의는 위로부터 강제로 이식되었다. 스탈린주의는 탄압과 동시에 중간계급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실제로 도시화·산업화는 중간계급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스탈린의 정책은 국가가 기업의 규모를 키우고 외국기업과의 경쟁에서 보호막을 쳐주는 국가자본주의였다. 우리는 종종 이를 ‘사회주의’로 오해한다. 1941 ~ 1944년에는 ‘자유 시장’국가를 표방하는 미국에서도 국가가 경제활동을 통제했다. 특히 산업 발전을 지방에서 통제할 힘이 약할수록 국가자본주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많은 나라들이 이 정책을 참조했고, 초창기에는 국가자본주의가 효과적인 듯했다.

 

1956년으로 가는 길

스탈린 사후에 지도부는 분열되었고, 1956년 흐루시초프는 지도권 장악을 위해 스탈린의 비밀들을 폭로했다.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란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폴란드의 파업은 헝가리 혁명을 촉발시켰고, 러시아는 폭력으로 혁명을 탄압했다. 헝가리 혁명은 냉전시대 양 진영에서 모두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양 진영의 이데올로기 모두를 위협했다. 소련이 마르크스와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통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서방 제국주의가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를 막아줄 것이라는 주장이 틀렸음도 보여주었다. 극좌파였던 지식인들은 혼란과 비관에 빠졌다. 그러나 헝가리 혁명은 스탈린식 정권이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 진정한 혁명의 대변세력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쿠바 혁명

미국은 세계 곳곳에 위성국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위성국가들은 극도로 분열된 지배집단들이 협소한 지지기반으로 부정부패와 탄압에 의지하여 지배하였다. 이들은 미국의 원조와 군사 고문단에 크게 의존했고, 때문에 미국의 개입 의지에 의해 쉽게 흔들렸다. 그러나 쿠바에서 독재정권이 대중의 분노를 샀을 때 미국은 독재자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국과 쿠바의 자본가들은 카스트로 정부를 타도하려고 노력했으나, 쿠바 주민들의 결집으로 실패했다. 미국와 케네디는 카스트로를 증오하며, 러시아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다행히 핵무기들은 사용되지 않았다. 러시아 지도부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성립된 기존의 세계 분할 구도에 도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헝가리 혁명 때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의 영역을 지나치게 침범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를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전쟁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쉽게 봤지만, 이 전쟁은 한국전쟁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베트남 북측의 게릴라들은 정규군이 아니고 지배자들의 지휘체계도 제대로 존재하지 않아 누구도 그 싸움을 쉽게 중단시킬 수 없었다. 미국 내에서는 비용 때문에 자본의 항의를 받았고, 청년들이 전쟁의 공포와 징집에 반기를 들면서 미국 사회에는 균열이 일어났다.

 

중국 : 대약진에서 시장으로

마오쩌둥은 1958년 초고속 산업화를 겨냥한 ‘대약진’운동을 시작했다. 수백만의 산업노동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토지는 국유화되고, 곡물 산출량이 줄어들자 대기근이 발생했다. 대약진 운동은 대참사였다. 중국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을 밀어내고 더 절제된 산업화 노선으로 돌아갔다. 마오쩌둥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을 선포했다. 비판의 임무를 맡은 청년들이 전국을 돌면서 노동자들의 ‘자본주의적’ 근심거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혁명적 열의가 부족해 보이는 개인들을 질타했다. 청년‘홍위병’들의 비판대상은 ‘낡은 방식’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향력 없는 하급 인사들이이었다.

문화혁명은 광기의 분출이기도 했지만, 마오쩌둥이 이용한 대중의 좌절감은 매우 실질적이었다. 그 결과 일부 ‘홍위병’ 조직들은 마오쩌둥의 통제를 벗어나 인민대중의 삶과 직결되는 의문을 제기하거나 파업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군대를 개입해 이 운동을 잠재워야 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좌파들이 문화혁명에 열광했으나, 정작 마오쩌둥은 미국에 호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7년에 덩샤오핑은 러시아보다도 더 열렬히 시장정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방 언론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광기로만 설명하려 했다. 그들은 중국이 강제공업화라는 스탈린식 모델을 적용하기에는 국내자원이 부족하다는 점을 몰랐다. 합리적 해법을 찾지 못한 지배자들은 결국 비합리적 해법에 이끌렸던 것이다.

 

댓글목록

세미나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