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전집읽기] 반시대적 고찰Ⅱ 4장~6장 :: 발제 +1
이응
/ 2016-08-23
/ 조회 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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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23 / 반시대적 고찰Ⅱ 4장~6장 / 이응
4.
역사가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역사가 삶을 사멸할지라도 진리는 널리 퍼지게 하라는 대담한 표어로,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 인간을 향해 돌진해 온다. 낯선 것과 연관성 없는 것이 몰려들고, 천성은 최대한 이 낯선 손님들을 분류하고 정리해보려 노력하지만, 이 손님들은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스스로 파멸하지 않으려면 그들을 제압하고 압도해야 한다.
이것을 제압할 만한 방법이 남아 있다면, 가능한 가볍게 받아들이고 다시 재빨리 내던져버리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실제 사물들을 진지하지 않게 생각하는 습관이 생겨나고, “약한 인격”이 생겨난다. 결국 사람들은 외면적인 것 속에서 더 경솔하고 더 안이해지며, 내용과 형식의 간격에 대한 무감각으로까지 확대한다. 단지 기억이 항상 새롭게 자극 받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들을 기억의 상자 속에 신중히 진열하면 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결국 엄청난 양의 지식 돌멩이를 몸에 달고 다니는데,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 안에서 덜컹거린다. 외면과 일치하지 않는 내면,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외면의 덜컹거림. 배고프지도 않은데, 욕망을 거슬러 과도하게 포식한 지식은 이제 더이상 변혁적인 동기로 작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여기에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이것을 그들의 고유한 “내면성”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경솔함과 안이함, 무감각한 <야만>과 반대되는 것으로 <한 민족의 문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일체이다. <한 민족의 문화>는 정신과 삶의 통일을 추구하고 장려하며, 진정한 교양을 위해 현대적 교양을 파괴하는데 동참한다. 또 역사로 인해 손상된 한 민족의 건강을, 본능을, 진실성을 되찾기 위해 깊이 생각하려 한다.
독일인은 프랑스 학파를 떠났다. 그렇게 해서 좀더 독일적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습의 학파에서 도망쳐 그는 자신이 하고싶은대로 했고, 가고싶은대로 갔지만, 실제로는 그가 과거에 모방했던 것을 이제 엉터리로, 반은 건망증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모방했을 뿐이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단지 방종, 안락함, 가능한 적은 자기 극복을 선택한 것이다.
독일인의 내면은 허약한 채로 있다. 가시적 행위는 총체적 행위나 자기 현시가 아니라, 전체인 것처럼 보이려는 허약하고 미숙한 시도에 불과하다. 어느날 갑자기 내면성이 사라지고 외면만이, 저 거만하게 서투르고 비굴하게 나태한 외면만이 독일인의 특징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우리 모두는 역사때문에 타락했다. 독일인은 추상적으로 감각하려 한다. 위조되고 채색되고 덧칠되어 통일적 내면성을 더이상 확신하지 못하는 민족, 분열된 민족에게서 위대한 생산적 정신이 더이상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위대한 정신은 저 높은 통일성이 다시 복원되어야 하고, 내면과 외면 간의 갈라진 틈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5.
- 어느 시대가 역사를 포식할 때 위험해지고 삶에 적대적이 되는 다섯가지 측면 -
<1>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내면과 외면의 대립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격이 약해진다.
<2>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시대는 어떤 다른 시대보다 정의를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다.
<3>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민족의 본능은 손상되었고, 개인도 전체 못지 않게 성숙을 방해받는다.
<4>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유해한 믿음, 즉 늦둥이이며 아류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5>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시대는 아이러니라는 위험한 분위기에 빠지고, 더 위험한 견유주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1>약해진 인격
현대인은 유랑하면서 즐기는 관람자가 되었으며, 큰 전쟁이나 대혁명조차 한순간이라도 변화시킬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전쟁은 가장 최신의 자극제로, 역사에 굶주린 자들의 피곤한 미각에 제공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어야만 하는 곳에서 순간적으로 계산하고 파악하려는 사람은 지각있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어도, 그는 아이조차 보고 들을 수 있는 몇가지를 보고 듣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본능을 잃었고 파괴했으며, 그렇게 개인은 소심하고 불안해져 더이상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내면 속으로, 지식의 쓰레기더미 속으로, 삶이 되지 않는 교훈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인격을 내보이려 하지 않고, 교양인/학자/시인/정치가의 가면을 쓴다.
우리는 기만당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호통을 쳐야 한다. 가면이 보이면 “서라, 누구냐!” 라고 외치며 가면을 목덜미에서 벗겨야 한다. 온통 비겁하게 자신을 감춘 보편적 인간들뿐이다. 개인은 내면으로 후퇴했다.
보편적 교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시대에 진실한 나신의 철학은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품위없는 상태에 처해있는가! 이처럼 강요당한 획일성의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감히 철학의 법칙을 스스로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글쓰고, 말하고, 가르치지만, 행위에서는, 삶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교양이 원하는 바다. 우리는 자문한다. 그것이 인간인가, 아니면 혹시 사유 기계, 글쓰는 기계, 말하는 기계인가?
강한 인격만이 역사를 감당할 수 있으며, 약한 인격은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더이상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내가 여기서 어떻게 느껴야 할지”에 대해 역사에게 조언을 구하는 자는 두려움에서 서서히 배우로 변신하여 여러 역할을 연기하는데, 다 부적절하고 천박하다.
역사가 단지 아름답게 “객관적”으로 보존된다면, 스스로는 결코 역사를 만들 수 없는 자들에 의해 보존된다면, 너희가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상관이 없는 사람은 철저하게 “역사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는 점, 그들은 (남성도 여성도 양성도 아닌) 단지 중성일 뿐이며, 단지 영원히-객관적인 것이다. 영원히 주체가 없는, 객관성으로 사라진다면, 어떤 것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6.
<2> 정의를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
현대인은 역사적 “객관성” 때문에 다른 시대의 사람보다 더 정당하다고 말할 권리가 있는가? 혹시 정의가 이 결과의 원인인 것 같은 인상을 주려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현대인의 미덕에 관한 편견, 너무나 득의만만하기 때문에 해로운 편견으로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은 아닌가?
재판의 권한을 가진 정의로운 자의 손은 떨리지 않는다. 그는 가차없이 자기 자신에게 추를 쌓아 올린다. 그가 차가운 인식의 마귀라면 그는 주변에 냉혹한 분위기를 퍼트릴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솔한 회의에서 엄격한 확신과 너그러운 온화함으로 정의라는 미덕으로 날아오르려 한다는 것은, 그도 처음에는 불쌍한 인간에 불과했지만 이제 저 마귀와 비슷해진다는 것. 그리고 매순간 자신의 존재를 속죄하고 이 불가능한 미덕에 비극적으로 병들어간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그를 인간 종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표본으로, 정상 위에 높이 세운다.
대가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면, 현대인이 주장하는 최고의 권리, 높고 순수한 정의에 대한 권리 주장이 친절한 면이라고는 전혀 없고 매력적인 흥분도 모르며 딱딱하고 무서울 뿐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정의의 미덕에 비교하면, 관용의 미덕은 한단계 낮은 곳에 위치한다. 관용의 미덕은 한때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을 인정하고 올바른 위치에 두고 적당히 호의적으로 미화하는데, 과거를 딱딱한
억양이나 증오의 표현 없이 이야기하면, 경험이 미숙한 자가 그것을 정의의 미덕으로 해석할 것이라고 영리하게 가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매우 불쾌한 역사가들이 남아있는데, 이들은 근면하고 엄격하며 성실하지만 생각의 폭이 좁다. 저 순진한 역사가들은 과거의 견해와 행위를 현재의 일반적 잣대로 재는 것을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반면 통속적인 규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주관적”이라고 부른다. 역사가가 어떤 사건의 동기와 결과를 너무나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고찰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의 주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게 될 때, 이 역사가의 상태를 우리는 객관성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신화다. 객관성과 정의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개별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수백만의 방향들이 서로 교차하고 촉진하고 방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에게 우연의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의 결정적이고 포괄적인 필연성을 증명하기가 불가능해진다.(그릴파르처)” 그런데 역사가는 사물에 대한 저 “객관적인” 관점의 결과로서 필연성을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명제에서 우리는 더이상 수수께끼같은 진리가 아니라 다 알려진 거짓을 감지한다.
나는 역사가 보편적인 사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지 않기를 바란다. 역사의 가치는 평범한 주제, 즉 일상의 선율을 재치있게 편곡하고 고양시키고 포괄적인 상징으로 만들어서 전체 세계를 예감하게 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위대한 예술적 능력, 창조적 비약, 실증적 자료들 속으로의 즐거운 몰입이 필요하다.
흘러간 시대와 세대들의 재판관이 될 권리를 가진 시대와 세대는 없다. 누가 너희에게 판결하라고 강요하는가? 단지 너희는 늦게 세상에 왔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식탁에 앉는 손님은 당연히 말석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상석을 얻으려 하는가? 미래를 건설하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 너희가 앞을 내다보고 위대한 목표를 설정한다면, 현재를 황폐하게 만들고, 성장과 성숙을 방해하는 분석충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 내면에 미래와 일치하는 이미지를 구축하라. 너희가 고안하고 발명할 것은 충분히 많다.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를 가르쳐달라고 역사에게 묻지 말아라. 그 대신 역사 속으로 들어가 직접 산다면, 너희는 역사로부터 최상의 명령(현대 교육의 마력에서 벗어나라는 명령)을 얻을 것이다. 너희가 영웅을 믿듯이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그렇게 영웅적인 것에 익숙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제 이 시대의 시끄러운 사이비 교양은 영원히 잠잠해질 것이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지난 시간은 니체의 역사비평이 예술의 경지에 이른 듯 보였습니다.
이응의 발제도 감동적이었구요^^ 감동적인 몇구절을 다시 음미해 봅니다.
- 역사가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역사가 삶을 사멸할지라도 진리는 널리 퍼지게 하라는 대담한 표어로,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 인간을 향해 돌진해 온다.
-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글쓰고, 말하고, 가르치지만, 행위에서는, 삶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 강한 인격만이 역사를 감당할 수 있으며, 약한 인격은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 미래를 건설하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
- 영원히 주체가 없는 객관성으로 사라진다면, 어떤 것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