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공백] 이수명 의 시 후기 08 26 (금) +9
무긍
/ 2016-08-27
/ 조회 4,163
관련링크
본문
우선 시인과 시인의 최근 인터뷰를 올리고 , 시에대한 회원님들의 감상과 이야기 거리를 올리겠습니다.
시인 이수명
이수명(1965년 서울 ~ )은 대한민국의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다 .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작가세계》 겨울호에 <우리는 이제 충분히> 외 4편의 시로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2007년 김구용에 관한 연구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낯설고 난해한 시풍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전주의자 라거나 당대적 이라는 평도 있다. 2001년 박인환문학상, 2011년 현대시작품상, 2012년 노작문학상,2014년 이상시문학상 을 수상했다.
시인 이수명 “무엇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시인 이수명이 추구하는 시 세계를 설명해주신다면?
무엇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추구하고 어디로 가려는 것은 그럴 듯한 일일 수는 있는데, 글쎄요. 시는 그렇게 무엇을 명확하게 알고 움직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보다 시는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을 향한 서성임이랄 수 있어요. 다른 모든 것은 목표가 있고, 모르던 것을 알려고 하고, 알게 되어 지나 가고자 하는 정복에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시는 그러한 회로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무엇인가가 쓰여도 여전히 쓰이지 않은 것, 읽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 오지 않은 것에의 감지와 서성임이지요.
시는 그러한 미지의 것들을 지나치지 않고 그 앞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해요. 저는 제 시를 읽는 독자들이 무엇을 읽어내고 추구하려 하기보다는 그 서성임을 호흡하고 느끼고 각자의 방식대로 상상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각자의 방식이라면, 독자들의 새로운 해석도 환영하신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입니다. 시인은 시를 쓸 뿐이지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접하느냐는 독자들의 몫이죠. 저는 제 시가 독자나 평론가들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읽히고 흘러 다니는 것을 즐깁니다. 그래서 제가 쓴 시가 낯선 옷을 입고 다시 제게 올 때의 거리감이 좋습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시도 일정하지 않고 불확실한 산물이거든요. 그것은 계속 다르게 보이고 그래야 합니다.
시는 현실에 대한 것도, 비현실에 대한 것도, 꿈도 이상도 들려주지 않는다
시의 언어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냥 ‘보여주는’ 언어라고 생각해요.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입장을 갖는 것이죠. 시는 입장이 없습니다. 그냥 세계와의 접촉에서 나오는 파문 같은 것이에요. 사물과 세계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이어서, 그 경이로움이 주는 충격을 맞이하는 것이라 해도 되겠네요. 시는 그러한 충격이 빚는 감각의 무늬겠지요. ‘보여주는’ 언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에요.
“과거에 쓰여졌어도 결코 나이를 먹지 않으면 현대시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월이 지나,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이 시는 참 ‘현대시’다 싶은 시가 있으신지요?
모든 시대마다 나이를 먹지 않는 시들이 있어요. 1930년대 ‘이상’의 시가 그래요. 이상의 시는 늙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추종자들이 생겨나고 연구들이 쌓이는 거죠. 이상의 시처럼 어느 시대가 되었든 그 시대에 갇히지 않는 시들이 있어요. 시대의 감각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실은 시대에서 비롯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넘어, 역사를 넘어서, 일종의 극지로서 존재하는 시들이지요. 이것이 실로 ‘현대시’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문학사는 이러한 현대시들에 의해 주요한 흐름을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어요. 이상뿐 아니라 김수영, 김구용, 김종삼 등이 그랬구요.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탐험적인 현대시들이 계속 나타나서 시대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시간을 읽어낼 수 없는 이런 시들이야말로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첨단에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이를 가리키죠.
일상적인 어법이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시인이라는 평을 듣고 계시는데요. 특히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나무는 도끼를 삼켰다」)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 같아요.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보거나 말하기’에 관심이 많아요.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는 세 번째 시집 『붉은 담장의 커브』에 실려 있는 것인데, 나무가 도끼나 번개를 삼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나무는 더 이상 정적이고 무언가를 수용하기만 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더 크고 위험하고 험악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위치만 바뀐, 반사적인 우월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킨다는 동력이 사실은 도끼에 찍히거나 번개에 찔리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나무 안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대립적 방향, 또는 이상한 균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나무는 가만히 있는 듯 보이지만, 좀 더 넓은 모순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존재는 그 자체로 모순의 날카로운 결집 같은 것으로 보여요. 제가 이런 묘사들을 그동안 많이 했는데 최근에는 전복보다, 전복시키지 않으면서 전복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어요.
‘전복시키지 않으면서 전복하는 작업’은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전복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이미지처럼 예술가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 현실의 논리를 탈골 시키는 것을 말하겠지요. 표현주의에서의 불안의 표출이나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의 발로 같은 것들은 부정이나 파괴와 같은 과격한 에너지의 발산과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초기 시에서 이러한 전복과 비약을 자유의 일환으로 이해했어요. 자유는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우면서 부수고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죠. 이러한 발상은 지금도 제 작업의 중요한 근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그것이 너무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놀라운 것이어도 전복은 문학적 수사의 화려한 변주인 면이 있고, 시인이 일그러뜨리는 데 달려 있지요. 시인이 손을 많이 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도한 액션 못지않게 시인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듯 보이는 제 멋대로의 장면들이 더 전복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시인이 건드릴 수 없고 건드릴 필요조차 없는, 태연하게 움직이는 실상이 더 극적인 면이 있기도 하구요. 시인은 단지 이 장면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시인의 작품을 보겠습니다
또 하나의 탈출
정신적인 지향점 .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여정 동안 내적 외적 싸움을 통한 자아의 성찰 .
그리고 또 하나의 자아 성찰 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되는 시 였습니다.
시의 종반부에 나오는 내 안에서 나오는 짐승부분은 강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것이 시 감상의 또 다른 포인트 였습니다 .
그 방을
이 시는 전체적인 현실세상에 대한 이치이자 진리 를 이해하려는 시적 화자의 한계를 드러내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케테르님께서 끊임없이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방을 재려하는 화자의 시도를 시지프스 신화 를 예를 들면서 설명하셨습니다 . 불가능성에 대한 도전 모험을 이야기 하셨구요 . 좋은 관점 감사합니다
소소님께서 인간은 불안하기에 확실한 것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형식을 예로 드셨는데 , 비평가 황현산씨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과 이수명시인의 예술성을 유사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림을 아는 분들은 또다른 경지의 해석에 일치가 보여서 놀라웠습니다.
또 희롱님께서 청바지를 처음 찟어 입은 사람을 예를 들며 새로움을 시도하는 이수명 시인의 시적언어 교란에 대해 언급하셔서 이해를 도우셨습니다
화물차
이 시는 중요 상징어는 화물차 ,빈가방 ,이단, 오독 등입니다
“ 빈깡통이 요란하다 . 세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리를 질주하는 요란한 빈 화물차는 아무 텅빈 머리로 생각없이 용감히 사는 우리네 인간, 그러나 타자를 상징한 듯합니다.
빈가방은 역시 공부를 하여 뭔가를 담은 줄 아는 우리의 자아의 텅빈 머리를 말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빈가방을 든 우리는 끊임없는 빈화물차의 오독에 나의 이단(이해)를 생산합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명치 않은채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독( 잘못된 해석= 오해) 라 하면서
시를 끝맺습니다 .
희음님께서 오독을 하는 순간 정독을 배태하고 있다.는 철학적 말씀이 가슴에 남습니다
오라클님께서 반복 되어지는 시구절과 니체식 해석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소소님께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묘사 두드러짐에 대해 말씀하셨고
희음님께서 시에서 서술어의 시제의 조그마한 변화가 커다란 의미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찬영님께서 시에서 그림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 화물차의 그림자가 아니라 화물차안에 사람이 없음의 표현
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침입자
한 남자를 화자의 다른 자아라는 오라클님의 해석과, 케테르님께서 시안에 페미니즘적 시각이 존재함을
자기 안의 남성성이 여성성의 영토에서 조우하는 모습과 함께 경계 허물기다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소소님께서 옆집남자 아니냐는 현실적인 이해를 보여주셨습니다 . 오라클 님께서는 배타적 인 사적소유에 대한 개념과 공동소유 그리고 선물에 대한 비유를 통해 감동을 주셨습니다. 등가성 교환의 한계를 넘어 공동체 생산의 시너지의 결과물이 선물로 다가올 수있다라는 말씀은 감동적 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또 희롱님께서 침입자은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는 생각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셨습니다. 희롱님 말씀에 이어 오라클님께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타자는 침입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의 연산
비의 형식은 정말 너무 많은 분들의 좋은 해석에 귀기울이다 정신을 잃어서 하나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시간을 가진 뒤에 올리겠습니다 .
르네 마가리트의 겨울비가 딱 비의 형식과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의 무한한 복제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시를 , 부족한 제가 맡게 되어서 힘이 들었지만, 의미있는 시간이 되어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무긍님, 좋은 후기 감사드려요 ~~~ 발제문에 이수명의 시론 인터뷰를 잘 실어주셔서 그의 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
무긍님의 댓글
무긍감사합니다 . 선생님 덕분에 늘 많이 배웁니다 . 이 번에도 좋은 관점 감사드립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무엇보다 무긍님과 찬영이 시세미나에서 활발히 참여하셔서 좋습니다.
특히 지난 세미나에서는 시도 함께 읽을 때 더 깊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지요.
현대시와 철학의 아름다운 만남이 이루어졌던 시간이구도 했구요. ^_^
무긍님의 댓글
무긍
제자를 데리고 참여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재수생을 데리고 참여하는 것에 많은 걱정을 했는데, 성적에도 도움이 된 듯 하여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시 세미나 시간에 선생님의 철학적 안내가 많은 도움이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무긍 님도 찬영 님도 날이 갈수록 더 반짝여요.
지난 시간, 주름은 주름이라고 명명 되는 순간, 그 말의 몸 안에 이미 펴질 것을 예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무긍 님의 말씀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니까요.ㅎㅎ
오라클 님 말씀처럼 함께 읽는 것의 깊이,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로서의 세미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늦지 않게 후기 올려 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무긍님의 댓글
무긍
희음님 덕분이 이렇게 향기로운 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 정말 감사드립니다.
틈을 말씀하시고 그안에서의 자기복제 아닌 새로운 탄생을 틈 으로 표현하시는 것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언제나 열정적이면서 균형잡힌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소소님의 댓글
소소
같이 읽는 재미가 점점 더해지는 세미나입니다! 후기 잘 읽었어요.
참고로 이수명 시 '침입자'에서 옆집 남자 발언은 농이었습니다. ㅎㅎ
무긍님의 댓글
무긍
소소님이 말씀하시는 중에 인간 의 본질 , 아니 모든 사물의 본질이 확장한다 라는 생각에 동감을 표합니다
그리고 , 나머지 과정을 확장의 표현되는 과정이라고 느꼈습니다. 힘있는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늘 , 회원님들 과는 조금은 다른 지점에서의 신선한 시각에 감사드립니다.
반디님의 댓글
반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시인이었습니다. 링크로 댓글을 대신합니다.
화물차 http://blog.naver.com/fireflybugs/220807540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