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모비 딕> 8/24 세미나 후기 (제106 ~ 126장) +2
삼월
/ 2016-08-28
/ 조회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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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와 대장장이
인간의 이마에는 지울 수 없는 슬픈 반점이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이를 새긴 신들의 슬픔을 나타내는 흔적일 뿐이다.
선장 에이해브는 ‘새뮤얼 엔더비’호에서 뛰어내릴 때 금이 가기 시작한 고래뼈 다리를 새로 만들기로 합니다. 흰고래에게 한 쪽 다리를 잃고, 고래뼈로 대신한 다리 때문에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던 에이해브는 모든 사고를 흰고래의 탓으로 돌립니다. 모든 기쁜 일도 마찬가지이지만, 불행한 사건도 자손을 낳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헤이해브는 깨닫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의 행복과 불행 사이에는 깊은 불평등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따져 올라가면 나의 슬픔이나 불행도 나의 근원을 찾아, 결국에는 신들의 계보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슬픔과 불행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숭고한 이들입니다.
토성의 위성들 사이에 술탄처럼 앉아서 인간을 고도로 추상화된 개념으로만 바라보라. 그러면 인간은 참으로 경이롭고 위대하며 비애 자체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지점에서 인류를 집단으로 바라보라. 그들은 대부분 쓸모없는 복제품으로 보인다.
에이해브의 다리를 수리하는 목수와 대장장이 역시 다른 선원들처럼 범상치 않은 이들입니다. 목수는 훌륭한 기술과 함께 선의의 둔감함을 가진, 냉혹하면서도 재치 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비타협적 자세는 일종의 무지함을 내포하고 있는데, 셰필드나이프의 연장을 골라서 뽑듯 그 유용한 재능들을 필요한 순간에 펼쳐 보입니다. 대장장이는 고된 노동과 가혹한 생활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노인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가족을 떠나보낸 대장장이의 운명은 흥미로운 공포와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 찬 모험의 바다로 그를 떠밀었습니다.
스타벅과 스터브
“선장님은 저를 모욕한 게 아니라 화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저를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장님은 웃을지 모르지만,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를 경계해야 합니다. 영감님,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흰고래의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에이해브는 광폭해지고,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스타벅은 자신과 선원들의 생명 앞에서 선상반란까지 떠올립니다. 차분하고도 신중한 화술로 선장을 설득하는 에이해브의 고뇌는 점점 깊어집니다. 그러나 스타벅은 황금빛 바다 속을 내려다보는 낭만 역시 잊지 않는 인물입니다. 우리의 유능한 이등항해사 스터브에 대해 말하자면, 스터브는 유쾌합니다.
“나는 스터브다. 스터브에게는 스터브의 역사가 있다. 하지만 스터브는 여기서 맹세하노니, 그는 언제나 유쾌했다.”
관과 구명부표
퀴퀘그는 그 몸 자체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고, 한 권으로 된 놀라운 책이기도 했다. 그의 심장은 그 밑에서 활기차게 고동치고 있기는 했지만, 가슴에 새겨진 신비는 그 자신도 해독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 신비는 결국 그것이 새겨진 살아 있는 양피지와 함께 썩어서 사라질 운명이었고,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을 터였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던 식인종 퀴퀘그도 가끔은 병이 납니다. 열병으로 앓아누워 바짝 말라가던 퀴퀘그가 목수에게 관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완성된 관 속에 누워 잠시 잠들었다 일어난 퀴퀘그는 어쩐 일인지 원기를 회복합니다.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핍은 옆에서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를 말들을 중얼거립니다. 나중에 배의 구명부표가 망가졌을 때 퀴퀘그는 자신의 관을 대신 사용하라고 권유합니다. 죽은 이에게 필요한 물건이 사람을 살리는 물건으로 변모하는 순간입니다.
고난과 독재자
흰고래가 있는 바다로 가기 위해 배는 역풍을 견디며 나아갑니다. 폭풍우가 배의 돛을 찢고, 매달린 보트에 구멍을 뚫고, 배의 나침반을 모조리 망가뜨렸습니다. 독재자 에이해브는 그 위기 속의 공포를 이용하여 선원들이 자신의 뜻에 굴목하게 만듭니다.
“자, 다들 보아라.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에이해브가 어떻게 수평 자석을 조종했는지를! 태양은 동쪽에 있고, 저 나침반은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경멸감과 승리감으로 불타는 에이해브의 두 눈에는 그의 파멸적인 오만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배는 파멸을 향해 나아갑니다. 선원들은 아직도 선장 에이해브의 말을 따릅니다. 수많은 불길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에이해브의 말은 위기의 순간에 더 효과를 발휘합니다. 에이해브가 흰고래의 자취를 따라가듯 어쩌면 선원들도 인어(혹은 세이렌)들의 노래에 홀려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다는 선원들에게 죽음만을 향해가는 공간은 아닙니다. 육지의 삶을 잊어버리는 동시에 새로이 삶을 그리워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에이해브의 주머니 속 유리병에 남몰래 담겨있는 낸터컷의 모래가 말해주는 것처럼. 그리고 선원들은 믿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나무상자가 관인지, 구명부표인지는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이 되어보아야 알 수 있지 않은가.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우리는 모두 우리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슬픔과 불행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숭고한 이들입니다."
"죽은 이에게 필요한 물건이 사람을 살리는 물건으로 변모하는 순간입니다."
"그 나무상자가 관인지, 구명부표인지는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이 되어보아야 알 수 있지 않은가."
삼월 님이 책에 밑줄을 긋고 그것을 이곳에 옮겨 왔듯, 저는 삼월 님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것을 저의 작은 댓글 창에 옮깁니다.
마지막 인용문에서는 저희가 세미나 시간에 생각지 못했던, 들뢰즈의 '접속'에 관한 개념까지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죽은 사람을 담기 위한 관인지, 산 사람을 이어서 살도록 돕는 부표인지는 그것이 사용되는 순간이 되어보아야 안다는 말!
우리 안에는 n개의 성이 있고 우리가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여성도 남성도 양성도 무성도, 혹은 그 밖의 무엇도 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그 말.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아직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런 삶에 대한 말이 조금씩 제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걸 느낍니다.
바람직한 수혈의 순간들이라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혈관을 열어두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좋은 후기 고맙습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텍스트의 즐거움을 기꺼이 누리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이는 텍스트를 읽는 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희음 님이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모비 딕>을 읽을 때도, 제 후기를 읽을 때도 그 즐거움과 유용함을 만끽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럽고, 감사합니다.
읽는 즐거움에서 다시 쓰는 즐거움으로, 그렇게 즐거움의 순환을 만들어주셔서 더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