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세미나자료
  • 세미나자료
  • 세미나발제문, 세미나후기를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세미나자료

[니체전집읽기] 반시대적 고찰 II :: 7-8장 발제문 +2
백조 / 2016-08-31 / 조회 1,618 

본문

반시대적 고찰 II​ :: ​7장


*어느 시대가 역사를 포식할 때 위험해지고 삶에 적대적이 되는 다섯 가지 측면 중 세 번째,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민족의 본능은 상실되었고, 개인도 전체 못지않게 성숙을 방해받는다.

1. 역사적 감각이 억제되지 않은 채 지배하면서 모든 책임을 진다면, 그것은 미래의 뿌리를 제거할 것이다. 그것은 환상을 파괴하고 기존의 사물들이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분위기를 그것들에게서 빼앗기 때문이다.
역사적 정의가 정말 순수하게 심정적으로만 행해진다 해도, 그것은 항상 살아있는 것을 파괴하고 몰락시키기 때문에, 무서운 미덕이다.
역사적 정의의 심판은 항상 파괴다. 역사적 충동 뒤에 건설의 충동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희망 속에 살아 숨쉬는 미래가 해방된 토대 위에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없도록 파괴하고 청산된다면, 정의가 혼자서 지배한다면, 창조하는 본능은 무력해지고 용기를 잃을 것이다.
--> 예를 들어, 순수한 정의의 지배 하에서 역사적 지식으로 변해야만 하는 종교, 철저히 학문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종교는 그 길의 끝에 가서는 파괴될 것이다.
최근의 신학은 너무나 순진해서 역사와 관계를 맺었던 것 같은데,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다루어진 영향으로 둔감하고 부자연스럽게 되었으며, 그래서 결국 완벽하게 역사적인, 즉 공정한 취급은 그것을 기독교에 관한 순수한 지식으로 해체하며 그로써 그것을 파괴하였다.
(독일음악의 경우도 이런 방식으로 파괴되었다.)
 
2. 인간은 사랑 속에서만, 사랑의 환상에 둘러싸여서 창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완벽하고 정당한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속에서만 창조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사랑하지는 말라고 강요당한 사람은 자기 힘의 뿌리를 잘린 것이다. 그는 말라버릴 것이다. 즉 그는 부정직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역사에 예술이 대립한다. 역사가 예술 작품으로의 변형을, 즉 순수한 예술적 형상이 되는 것을 견딘다면, 그것은 아마 본능을 유지하거나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역사서술은 우리 시대의 분석적이고 비예술적인 특성과 모순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 시대는 그것을 날조된 허위하고 느낄 것이다. 내면적인 건설 충동의 인도를 받지 않고 파괴하기만 하는 역사는 장기적으로 자신의 도구들을 둔감하게 만들고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3.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기 주변에 어떤 분위기, 비밀스러운 안개 층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 베일을 걷어버리면, 또 우리가 어떤 종교나 예술, 천재가 분위가 없는 천체로서 공전하라는 판결을 내리면, 그것이 급작스럽게 말라버리고 딱딱해지고 불모가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숙해지고자 하는 모든 민족, 모든 인간은 그렇게 에워싸는 망상, 보호하고 감추는 구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성숙해지기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삶보다 역사를 더 존경하니까.
학문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대의 인간의 삶은 지식이 아니라 본능과 강력한 망상이 지배했던 과거의 삶보다 훨씬 적은 삶이고, 미래에도 훨씬 적은 삶을 보증한다. 그것은 완성되고 성숙해지고 조화를 이룬 인격의 시대가 아니라 가능한 한 유용한 공동 노동의 시대가 될 것이다.
 
4. 수세기 동안 젊은 사람은 채찍질을 당해왔다. 밀려들어오는 양이 너무나 엄청나고, 낯선 것, 야만적인 것, 폭력적인 것이 “무서운 덩어리로 뭉쳐서” 너무나 강력하게 젊은 영혼을 습격하여, 그는 의도적으로 둔감해야만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흘러넘치고 마비시키는 폭력적인 역사화는 옛사람들이 보여주듯이 젊은이에게 불필요하며, 근대인들이 보여주듯이 지극히 위험하다.
이제 우리는 심지어 역사적인 학생들을 본다. 그들은 너무 일찍, 소년 시절 이미 눈에 드러난 둔감증의 상속자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숙하기 전에 학문 공장에서 일하면서 유용한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면, 학문은 너무 일찍 이 공장에서 이용되었던 노예들처럼 파멸할 것이다.
 
5. 학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학문을 너무나 빨리 촉진시킨 결과 학자들은 너무 일찍 알을 낳으라고 강요당한 암탉들처럼 지쳐버렸고 최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랑받는 학문의 “대중화”다.
괴테는 여기서 학문의 오용을 보았고 그래서 오로지 고양된 실천을 통해 외부세계에 작용해야 할 것을 학문에 요구했다. 그러나 젊은 학자들은 그런 오용을 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가, 물론 아주 작은 지식의 구석을 제외하면, 아주 혼합적인 독자로서 이들의 욕구를 스스로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천적인 염세주의자로 행동한다. 다시 말해 몰락의 예감에 인도되고 그로 인해 남이나 자신의 행복에 무관심하고 경솔해지는 사람으로 행동한다. 땅덩이가 우리를 지탱해주기만 한다면! 우리를 더 이상 받쳐주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다 – 그들은 그렇게 느끼고 아이러니한 실존을 살아간다.
 
반시대적 고찰 II​ :: 8장

 * 네 번째,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유해한 믿음, 즉 늦둥이이며 아류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1. 한 민족의 교육이 현재 이루어지는 것처럼 주로 역사적 교육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불합리한 미신이라는 의식을 높은 수준으로 발달한 역사적 인물에게서는 발견할 수 있지만, 나중에 태어난 자들인 우리에게, 강하고 쾌활한 종족의 창백한 마지막 후예인 우리에게는 저 불합리성, 저 미신이 어울린다.
인간은 백발로 태어날 것이고 제우스는 이 종족을 몰살할 거라는 헤시오도스의 예언은 우리를 가리킨다. 역사적 교양은 정말 일종의 선천적 백발이며, 어릴 적부터 이 표식을 몸에 달고 있는 자는 아마 인류의 노년에 대한 본능적 믿음에 도달할 것이다.
이미 시들어가는 인류에 대한 이런 마비시키는 믿음 속에는 오히려 중세로부터 상속받은 기독교 신학적인 관념, 임박한 세계 종말,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심판에 대한 사상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런 관념이 고양된 역사적인 심판자-욕구로 옷을 바꿔 입은 것은 아닌가?
인류와 개인을 향해 외친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는 과거에는 항상 고통스러운 가시였고 중세적 지식과 양심의 정점이었다. 인류는 아직 확고하게 메멘토 모리 위에 앉아 있고 이 사실을 그들의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욕구를 통해 내비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식목, 대담한 시도, 자유로운 욕망에 적대적이며, 미지의 세계로의 비상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이 종교는 그곳에서는 사랑할 수도 소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마지못해 생성하는 것이 솟아 나오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그것을 적당한 때에 존재를 유혹하는 자, 존재의 가치를 속이는 자로 옆으로 밀치거나 희생시킨다.
이렇게 기독교는 역사적 교양과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맹을 맺고, 역사적 교양이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생성하는 모든 것을 어깨를 움츠리며 거부하고, 생성하는 것은 너무 늦게 온 아류, 즉 태생이 백발이라는 감정을 확산시키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역사적 감각은 자신의 시종을 수동적이고 회고적으로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중세에 살고 있으며, 역사는 여전히 가면을 쓴 신학이다. 마찬가지로 학문을 하지 않는 일반인이 학문적 계급에게 보내는 외경은 성직자 계급에서 유래된 외경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교회에 바쳤던 것을 이제, 조금 양은 줄었지만, 학문에 바친다.
 
2. 이런 언급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세의 메멘토 모리에서 또 지상의 존재가 맞이할 모든 미래의 시대들에 대해 기독교가 가슴에 품었던 절망에서 역사의 과잉을 추론해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의심스러워하면서 제시한 이 설명을 더 나은 설명으로 대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교양은 스스로 다시 역사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역사는 역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지식은 자신의 가시를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이 세 가지 해야 함은 “새 시대”의 정신 속에 진정으로 새로운 것, 강력한 것, 삶을 약속하는 것과 근원적인 것이 들어 있는 경우, 이 정신의 명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독일인이 문화적으로 고차원적인 사안에서 단지 후예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후예”여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어야 하는가.
과거 빌헬름 바케나겔이 우리 독일인이 고대의 후예라 한바 있지만, 우리는 침몰하는 고대의 제자가 되는 것이 영원히 우리의 사명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목표를 서서히 더 높고 더 멀리 잡는 일이 허락되어 알렉산드리아적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이 세계를 넘어가서 대담한 시선의 전형을 위대한 것, 자연스러운 것과 인간적인 것의 원시 세계인 고대 그리스에서 찾겠다는 과제를 우리 자신에게 부과할 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비역사적인 교양의 현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풍요롭고 생동감 넘치는 교양의 현실이다.
이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아류에 불과하다는 종종 고통스러운 생각조차도 크게 보면 커다란 영향과 미래에 대한 희망찬 갈망을 개인과 민족에게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고대의 놀라운 세력들의 상속인이자 후예임을 깨닫고 거기서 우리의 명예, 우리의 자극을 발견한다면 말이다.
  
3. 금세기에 있었던 독일 교양의 모든 위험한 전환이나 동요는 이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미치고 있는 헤겔 철학의 엄청난 영향으로 인해 더 위험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대의 후예가 된다는 믿음은 정말이지 사람을 위축시키고 기분 상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당돌하게 돌변한 이 후예를 모든 과거사의 진정한 의미요 목적이라고 우상화한다면, 본인도 아는 자신의 비참함이 세계사의 완성과 동격이 된다면, 그것은 파괴적이고 무시무시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 고찰 방식으로 인해 독일인들은 “세계 과정”에 관해 말하고 자신의 시대를 이 세계 과정의 필연적 결과로 정당화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 고찰 방식으로 인해 역사는 예술과 종교와 같은 다른 정신적 힘들을 대신하여 유일하게 자주적인 것으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이 경우 역사는 “스스로 실현하는 개념”이며, 또 “민족 정신의 변증법”이자 “최후의 심판”이다.
헤겔은 자신에 의해 산성화된 세대 속에 “역사의 권력”에 대한 경탄을 심어주었다. 이 경탄은 실제로 모든 순간들을 성공의 적나라한 경탄으로 변화시키고 사실적인 것의 우상숭배로 인도한다. 모든 성공이 그 자체 안에 합리적인 필연성을 내포하며, 모든 사건이 논리적인 것 또는 “이념”의 승리라는 것이다.
 
4. 역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과거에는 어떠했다”라고 주입한다. 도덕은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또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한다”라고 각인시킨다. 이렇게 역사는 사실적인 부도덕의 편람이 된다. 동시에 역사를 사실적인 부도덕의 심판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인가!
36세 요절한 라파엘로와 82세에 죽은 괴테의 죽음에 대해 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는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얼마나 적은가! 다수가 살고 저 소수가 더 이상 살지 않는다는 사실은 잔인한 진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개선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며,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에 대해 서투른 “사실이 그렇다”이다.
우리가 어떤 미덕에 관해서 말을 하든, 정의든, 관대함이든, 용기든, 인간의 지혜와 동정이든 – 그는 저 사실의 맹목적인 힘, 현실적인 것의 독재에 대항해서 분기하며 저 역사적 변동의 법칙이 아닌 법칙에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미덕을 소유하게 된다.
역사가 “정열과 오류의 세계 시스템”에 불과한 것이라면, 역사가 “남자가 되어라, 나를 추종하지 말아라!”라고 외친다는 것을 인간은 역사 안에서 읽어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역사는 역사에 대항해서, 다시 말해 현실적인 것의 맹목적인 힘에 대항해서 싸웠던 위대한 전사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고, 역사는 이들을 “사실이 그렇다”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밝은 자부심을 가지고 “그래야만 한다”를 따르는 진정한 역사적 인물로 강조함으로써 스스로 조소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종족을 무덤에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족을 세우는 것 – 이것이 이 투사들을 부단히 전진시킨다. 투사들이 설령 후예로 태어난다 해도 – 이 사실을 잊게 만들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 있다 – 앞으로 올 종족들은 그들을 장자로서만 알 것이다.

댓글목록

백조님의 댓글

백조

오라클님, 발제문 올렸는데 또 나뉘었어요. 메모장 이용 방법을 몰라 이번에도 SOS청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우리세미나가 탄탄해지는 것에는, 이와 같은 좋은 발제가 있어서 그렇지요^_^
다음 시간에 발제문이 잘리지 않는 방법을 알려드릴께요. ^^*

세미나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