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주의 선언> 1장 코뮨주의와 대중 :: 발제 +1
윤도현
/ 2016-09-01
/ 조회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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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죽어있는 대중
- 추수주의와 계몽주의 : 코뮨주의자들의 대중(mass)에 대한 전통적 논쟁은 추수주의와 계몽주의로 나눌 수 있다. 추수주의자들은 대중에 적응하기 위해 혁명을 포기한 사람들로, 대중의 드러난 의식적 이해를 강조하며 대중에게 다가갔다.
-> 추수주의(追隨主義) : 아무런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주관없이) 남의 뒤만 따르는 태도나 경향.
계몽주의자들은 교육의 명목으로 대중을 지배한 사람들로, 감추어진 무의식적 이해를 강조하며 대중을 끌고 갔다. 그러나 추수주의와 계몽주의는 격한 논쟁에도 물구하고 대중을 대상화된 실체로 보는 공통적 견해가 있었다.
- 끊임없이 움직이고 흐르는 대중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실체가 아닌 접속하고, 합류하며, 변형되고, 생성하는 흐름으로 파악했다. 대중파업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현상들의 바다”에 비유했고 혁명을 대중적 흐름의 급작스런 합류로 파악했다.
대중 추수주의자들은 대중을 현재에 묶어두고 전위당 노선은 대중을 미래에 묶어두며 모두 대중의 능력과 잠재성을 부인했다. 즉 대중은 능력과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폴란드 여성혁명가
- 죽어있는 대중 : 대중은 결정을 불가능케 하는 자발성과 능동성, 자기극복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대중을 파악 가능한 대상으로 볼 때 대중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죽어있는 대중”이 된다. 즉, 대중이 그 결정 불가능한 성격을 상실했을 때 대중은 잠재성을 잃게 된다. 대중을 흐름보다는 실체로 파악하려는 인민, 군중, 계급과 같은 개념들은 사실은 대중의 죽음을 의미한다.
-> 인민(the people) : 일반의지를 지닌 하나의 실체
-> 군중(the crowd) : 각 개인이 실체로 서로 무관심한 집합
-> 계급(class) : 하나로도 뭉치지 않고 서로 무관심하지도 않은 대립하는 두 개의 실체
2. 개체 이전의 대중
- 대중에 대한 익숙한 통념들과 결별 : 대중은 개체가 먼저 있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개체로부터 대중이 생겨났다. 개체란 ‘수천 수만’의 대중으로 무수한 대중이 만들어낸 특정한 조합으로 대중의 흐름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응고된 것 혹은 지층화 된 것에 불과하다. 흐름은 흐름 자체의 요소를 갖는 것이지 흐름이 형성되지 이전이나 이후에 식별할 수 있는 입자들을 단위로 갖는 게 아니다. 흐름을 구성하는 입자들에 대해 누군가 굳이 묻는다면 보이는 것이 아닌 어떤 무한소를 떠올리자.
- 대중≠인간들의 집합 : 대중이 인간적 현상인 게 아니라, 인간이 대중적 현상이며, 인간들이 집단을 이루었을 때 대중이 된다고 하지만 개개 인간이 이미 그 자체로 대중적이다. 대중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을 이해하는 것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대중을 이해해야 한다.-> 피에르 마슈레 : 개인도 “수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이다.“
- 대중의 본질 : 대중은 하나의 개체를 만들 수 있음과 동시에 다른 개체를 만들 수 있다. 항상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대중의 본질이다. 대중은 나를 언제든 다른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 수천 수만의 나 아닌 나를 잠재적으로 담고 있다. -> 50p 부시먼족 변신 이야기 참고
나는 나를 언제든 다른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 수천 수만의 ‘나 아닌 나’를 잠재적으로 담고 있는 대중이다. 모든 개체들, 모든 실존들은, 그것이 대중 현상인 한, 이미 그리고 항상 ‘하나 이상(plus qu’un)이다. 대중의 흐름이 특정한 방식으로 응고되었을 때, 남성, 민족, 계급 등의 몰적 지층화가 나타난다. |
3. 대중의 유체 역학
- 분자적 역학과 몰적 역학 : 흐름으로서 대중을 보기 위해서는 분자적, 유체 역학이 필요하다. 몰적 역학을 따를 때 대중들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서 고유한 작동과 기능을 할당 받으며, 제 아무리 요소의 수가 많다 하더라도 각각의 요소들은 공명하며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대중이기를 멈춘 대중) 분자적 역할을 따를 때 대중들은 마주침과 접속을 통해 독특한 변이를 경험하며 순간순간 통제할 수 없는 양자적 도약을 감행한다.
- 유체역학과 고체역학 : 에피쿠로스 개념의 클리나멘은 직선 운동에서 비껴나가는 원자들의 이탈적 운동으로 이 운동의 시간과 장소를 확정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불합리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사건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클리나멘의 불합리함과 익숙함은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원자 대중들은 고체 덩어리가 아니라 흐름 즉, 액체가 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흐름을 다루는 유체역학이 정통 과학사에서 배제되어 왔다. 유체역학은 클리나멘과 같은 일탈에 주목하지만 고체역학은 일탈이 항상 불합리하고 기괴한 것으로 나타난다.
- 국가 그리고 대중 : 이는 국가가 분자적 대중을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다.(고체역학의 방식) 국가는 대중을 어떤 식으로 포획하기 위해 선분화하여 계산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자 했다. 선분이 따라 잡을 수 없는 대중의 유연성과 불확정적 도약이 미리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을 포획하는데 전능한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완전히 붙잡는 것은 불가능 하다. 대중에게는 ‘결정 불가는 지대가 있다’
4. 대중의 반동
- 대중의 결정 불가능성 : 대중의 ‘결정 불가능성’은 통치자들이 대중에게 느끼는 공포의 주요 원천이었다. 대중을 떠난 정치는 불가능 하며, 대중은 불안정하고 변덕스럽지만 국가의 신체이며 하부구조이기 때문에 대중의 ‘결정 불가능성’ 위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대중은 선한 본성도 악한 본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선한 만큼 악하며, 악한 만큼 선하다. 본성이 없다는 것이 대중의 본성이며 언제든 반동적으로 전화할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 대중의 죽음 : 두 가지 반대양상으로 나타나며, 하나는 대중이 그 자체로 시체처럼 되는 것이다.(타살적, 전체주의) 다른 하나는 대중이 과도하게 활성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죽음이다.(자살적, 파시즘)
5. 대중과 혁명
- 혁명은 대중 속에 있다. : 대중은 혁명적이다. “대중이 혁명을 욕망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욕망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대중 바깥에서 혁명을 기획하고 계산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혁명은 계산 너머에 존재한다. 혁명은 대중들의 것이자 대중적인 것이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지난 시간에는 도현샘의 훌륭한 발제 덕분에, 대중에 대한 감동적인 맥락을 공부했습니다.
대중과 코뮨주의자의 관계에서, 부적합한 방식으로 추수주의와 계몽주의를 살펴봤지요.
추수주의는 대중의 뒤에 있었고, 계몽주의는 대중의 위에 있었지요.
이들이 모두 대중과 분리된 자리에 있었다면, 코뮨주의자의 자리는 바로 대중과 함께지요.
이것이 '대중으로서 코뮨주의자'의 개념입니다.
또한 대중에 대한 인간학적 관념도 극복되어야 할 것이었지요. (대중=/=인간의 집합)
대중은 비인간의 층위에서도 존재할 수 있고(화폐대중),
또한 인간 이하의 수준에서도 존재할 수 있었지요(신체대중).
한편 대중-흐름이 가로막혔을 때, 대중은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지요.
대중이 시체처럼 되는 것, 이것은 권력의 전체주의적 지배하에서 타살된 대중입니다. (ex.군사정권 하의 대중)
대중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는 것, 이것은 대중의 파시즘적 몰락으로 자살적 대중입니다. (ex. 나치즘, KKK단의 대중)
대중의 욕망을 이해하고 대중의 흐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 코뮨주의자의 일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