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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민중의 세계사> 8/17 세미나 발제문 (러시아혁명)
삼월 / 2016-08-16 / 조회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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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희망과 공포의 시대

 

2. 세계 대전과 세계 혁명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1914년 8월 4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들은 전쟁이 길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유럽의 대중들은 대체로 전쟁을 지지했고, 애국적 열정을 발휘했다. 주로 중상층 계급들이 열렬하게 전쟁을 지지했고, 공장노동자들은 아직 과도한 민족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트로츠키는 전쟁 지지가 민족주의보다는 변화에 대한 기대감, 즉 대중의 단조로운 삶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설명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조합 투사 집단들도 점차 전쟁 지지로 돌아섰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수십 년 동안 순응해온 데 따른 악영향이고, 개량주의의 결과였다. 결국 전쟁기간은 4년을 넘겼고,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혈 낭자한 전쟁이었다.

전쟁이 사회 전체에 몰고 온 혼란도 엄청났다. 1915 ~ 1916년 무렵에는 이 전쟁이 총력전이라는 사실을 모든 열강이 깨달았고, 민중의 삶은 전쟁으로 피폐해졌다. 공장이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되자 생필품과 식량이 부족해졌다. 징집당하지 않으면 전선에 나간 노동력까지 다른 노동자들이 대체해야 했고, 물가도 폭등했다. 정치인과 장군들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국가가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독점화된 산업과 국가의 통합 추세가 눈에 띠게 강화되었다. 한편으로 장군과 자본가들은 영토 획득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늘어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국민국가를 통해 하나로 결속된 자본가 집단들은 전쟁을 통해 자본을 확대하려 했다. 제국주의는 이제 식민지를 넘어서는 현상이 되고 있었고,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를 희생시키면서 확장해가는 체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혼란은 특히 노동계급, 전통적 쁘띠부르주아지, 농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질임금은 하락했고, 영국의 파업지도자들은 국토방위법에 따라 투옥되었으며, 독일의 선동혐의자들은 징집되었다. 전쟁에 징집된 남성노동자들의 빈자리를 여성들이 채웠고,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해왔던 가족의 정형은 해체되고 있었다. 성평등 의식이 더 확산되기는 했으나, 노동계급 여성의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궁핍과 혼란, 이전의 생활방식을 지켜낼 수 없다는 절망감은 노동계급에게 전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전선으로 간 남성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군대 내의 계급 문제를 느끼며, 공허해졌다. 1917년 4월 서부전선에서는 프랑스군이 최초의 거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병사들의 반란은 유럽 전역의 혼란과 불만을 반영한 것이었고, 노동계급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전쟁에 대한 환멸은 사람들을 혁명적 좌파, 혹은 우익 민족주의로 기울어지게 할 수 있었다. 또 각국의 병사들 사이에서 자신의 언어가 지역 방언임을 알게 된 농민 병사들은 모종의 민족 정체성을 부여받기도 했다.

 

 

1917년 2월


1917년 2월 23일 국제여성노동자의 날 기념행사에서 촉발된 투쟁은 여성과 노동자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동원된 군대도 함께 무장하고 거리를 행진하며, 경찰들과 정부 관리들을 체포했다. 기차로 파견된 연대도 혁명군에 합류했고, 철도노동자들은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가려는 짜르를 저지했다.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의 상황도 비슷해지자 장군들이 짜르에게 물어날 것을 권유했다. 짜르를 대신해 정부의 기능을 맡은 조직은 둘이었다. 하나는 제정 내부의 공식적 반대파, 계급별 선거제도로 선출된 옛 국가 두마(러시아의 과거 의회)의 부르주아 정치인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1905년의 소비에트를 본따 만든 노동자평의회, 즉 소비에트로 결집한 노동자 대표들이었다.

2월에는 소비에트의 묵인 아래 두마 의원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했고, 10월에는 소비에트 다수파가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다른 나라의 혁명과 달리 러시아 부르주아지들이 일찍 권력을 빼앗긴 이유는 체제가 전복된 후가 아니라 체제가 전복되기 전에 이미 인민을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러시아의 한 역사가는 설명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혁명정부였고, 소비에트의 노동자 대표들은 불법 사회주의 정당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가올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일 거라 믿으며, 두마의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인정했다. 전쟁도 이제 ‘혁명 방어’전쟁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임시정부의 실패


임시정부는 8개월 동안 존속하다가 두 번째 혁명으로 타도되었다. 러시아 자본가들은 짜르의 정책들을 계속 추진하려 했다. 러시아 자본가들에게는 제국의 확대가 곧 시장의 확대였고, 민중들이 봉기하게 만든 원인이었던 전쟁은 혁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제국의 비러시아계 민족들에 대한 탄압도 계속되었고, 대토지도 분할되지 않았다. 5백 년간 지속된 군주정이 봉기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본 민중들은 더 이상 참고 있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슐레지엔 침공으로 인한 경제 혼란도 이유가 되었다.

 

 

정당들과 혁명


10월 혁명은 특정방식으로 대응하는 인민대중-노동자·농민·병사-에 의존했고, 여기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러시아 혁명이 다른 혁명과 달랐던 점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혁명 이전 15년 동안 러시아 노동자의 비중 있는 소수에게서 지지받은 점이었다. 러시아는 대체로 후진적이었지만, 대규모 공장들이 서구 사회보다 많았다. 레닌은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달리 선동의 목적이 좌파지식인이나 노동조합 같은 조직들의 수동적 지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내부에서 제정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려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다가올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일 것이라는 데서 의견이 일치한 듯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정당들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볼셰비키는 전쟁에 단호하게 반대했고, 소수의 국제주의파를 제외한 멘셰비키들은 전쟁을 지지했다. 1917년 초에는 이 두 정당보다 많은 지지를 얻은 제3의 정당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아니었지만, ‘인민주의’ 전통 출신의 사회혁명당이었다. 사회혁명당의 득표율이 50퍼센트에 달하는 상황에서 레닌은 소비에트가 국가권력을 잡고, 군대와 경찰을 노동자민병대로 바꾸고, 은행을 국유화하고, 토지를 분배하자고 주장했다. 인민대중이 분노하는 피해자에서 역사의 능동적 주체로 서야한다는 레닌의 신념은 즉각 볼셰비키 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흐른 후 레닌의 신념은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얻고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임시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줄어든 이후에도 볼셰비키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볼셰비키를 탄압하며 반혁명의 위험성을 스스로 드러냈을 때,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해 소비에트 체제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임시정부에 대한 대중의 마지막 한 조각의 기대조차 무너뜨리는 방식의 혁명적 방어였다. 그렇게 10월 25일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빠르고 대담한 판단 때문에 가능했다.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의 10월 혁명은 2월 혁명보다 평화로웠다. 쿠데타가 아니었기에 교전이나 혼란도 적었고, 질서정연했다. 레닌은 혁명 직후 전쟁을 끝내려면 자본주의 자체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월 혁명은 노동계급이 인구 1억6천만에 이르는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세계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듯했다.

 

 

포위당한 혁명

 

혁명의 지도자들은 혁명이 옛 러시아 제국 영토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굶주림과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면 산업이 발전한 국가들의 혁명이 러시아 혁명을 지원해주어야만 했다. 레닌은 전쟁이 그런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판단했다. 유럽의 전쟁은 다른 지역에서도 러시아에서와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전쟁 반대를 요구하는 노동자 파업들이 유럽 각지에서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후진적 경제와 낡은 국가구조와 달리 유럽의 국가들은 의회주의적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관료가 기존 사회구조에 편입되어 광범한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독일민족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들 나라에서 러시아와 같은 국가체제 전복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적었다.

1918 년 1월 독일 최고사령부가 혁명 정부에 최후통첩을 했을 때 레닌은 혁명전쟁을 수행할 힘이 없다면서 최후통첩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이에 항의하며 혁명 정부를 떠났고, 볼셰비키만이 통치하게 되었다. 독일이 내건 강화조건으로 인해 러시아의 석탄 공급지이자 식량공급지였던 우크라이나 지역을 잃어버린 러시아는 경제문제가 더욱 심해졌다. 산업 파괴로 볼셰비키 지지 세력인 노동자계급은 그 수가 격감했고, 작업장과 소비에트의 유기적 관계는 사라졌다.

혁명의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기에 볼셰비키의 노동계급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영웅적 행동을 불러일으켰고, 트로츠키는 1917년 노동자민병대를 통해 형성된 수백만 명의 강력한 붉은 군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볼셰비키, 붉은 군대는 더 이상 노동계급의 일부가 아닌 자코뱅주의와 비슷했다. 이상 실현을 위한 투쟁은 1918 년을 지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독일의 우크라이나 점령을 핑계로 영국과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러시아를 반쪽으로 갈라놓았다.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고, 테러와 반혁명의 기운이 거세졌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정권의 성격도 변했다.

혁명정부는 처음으로 공포정치를 체계적으로 사용했고, 혁명가들도 잔인한 반혁명 테러에 대해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려했다. 이 공포정치는 1929년부터 스탈린이 사용한 공포정치와 달랐으며, 상상 속의 반혁명 행위가 아닌 현실의 반혁명 행위에 대한 대응이었다. 1921년 내전이 끝난 후 공포정치도 사라졌다. 이 혁명정부만이 러시아에서 노동자에게 희망을 주었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고, 반유대주의 세력에게 저항했고, 비러시아계 민족의 자결권을 탄압하지 않았다. 또 혁명정부를 이끌었던 이들은 유럽 공업국들에서 혁명이 일어나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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