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8월5일 발제 +3
유택
/ 201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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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 푸코 [1975.2.26강의] 발제
지난 시간 : 어떻게 욕망과 쾌락의 몸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번 시간 : 중세의 고행적 수행과 신학에 의해 그저 단순히 죄악의 근원으로 여겨졌던 몸, 그 육체적 물질성에서부터 권력행사의 영역이며, 동시에 객관화의 영역인 살이라는 복합적이고도 유동적인 영역이 분리되었다. 육체를 살로 정의하기, 육체를 살로 폄하하기, 살에 의해 육체를 죄악시하기. 이것은 동시에 육체 분석의 조사와 담론의 가능성이다.
고백(입 열고)-침묵(입 닫고)의 장치?
고백-양심지도 테크닉-신비주의의 형태 ---> ‘신들리기’
마술, 마녀
근본적으로 사법 당국, 또는 지역 유지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고발당하는 여자. 마을의 끄트머리, 또는 숲의 경계선에서 사는 여자, 나쁜 그리스도교인, 시골지역/주변적 현상, 그리스도교의 외부적 경계선에서 나타남. 악마와의 계약/교환, 결국 법률적 주체/사법적 형태의 의지. 출몰과 사라짐이 자유자재. 위엄.
신들리기, 신들린 여자
젼혀 외부의 누구에 의해 고발되는 사람이 아니다. 자백하는 여자. 스스로 고백. 도시지역, 보통 여자가 아니라 수녀 그것도 원장 수녀 혹은 상급 수녀.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권력과 통제의 메커니즘을 뿌리 박으려 하는 곳, 개인들의 몸 안에 담론적 의무를 뿌리 박으려 하는 바로 그 내부의 요람 안에서 모습을 드러냄. 계약은 없고 몸 속으로 은근하고 완강하게 스며 들어오는 악마의 침투. 애매모호한 욕망, 복합적. 연극의 장소로서의 몸.
경련
경련은 신들린 여자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가시적이고 조형적인 형태. 경련을 일으키는 살은 16세기의 새로운 그리스도교 중흥 운동 물결이 구성한 육체적 포위 메커니즘의 최종적인 결과이며, 동시에 방향 전환의 지점이기도 하다. 경련의 살은 이 그리스도교 중흥 운동에 대한 개인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저항인 셈이다. 마술이 그리스도교 팽창의 물결, 그리고 종교 재판이라는 도구에 대한 저항의 중심이고 방향 전환의 지점이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들리기는 참회실/양심지도 등의 또다른 그리스도교 중흥 운동 기술의 결과이며 전환 지점이었다고 말이다. 마술과 종교 재판이 연결되듯이 신들리기와 참회실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관리 기술
17세기부터 부상한 트리엔트 공의회에 의해 작동되기 시작한 육체와 영혼의 관리 기술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신들린 자들의 경련이 그것의 가장 가시적이고 연극적인 형태인 반격과 저항 효과를 피해 가면서, 어떻게 이 거대한 육체의 시험과 담론적 통제를 지속시킬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17세기 이래 몸과 살, 또는 성에 대한 교회의 대논쟁과 문제 제기의 요체였다고 생각한다.
반경련적 메커니즘의 세가지 측면 (교회가 작동시킨)
1. 내적 조절기 : 양심 지도와 고백의 양식상의 변조 / 담론의 규칙에서 조심스러운 담론 양식으로의 이행
양심 지도에서 모든 것을 말해야 하고 고백 성사에서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하지만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말할 수는 없다. 철저한 고백의 일반 규칙내에서 조차 양식상에서의 규칙, 또는 수사학적인 요청이 부과되었다.
ex 1) 제수이트 교단에서 발전된 수사학으로, 넌지시 에둘러 말하는 방식
2) 고백의 물질적인 연출과 관련 있는 완화 장치들 : 침침하게/쇠창살/눈 안쳐다보기 등등
사물을 명명하지 않은채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련의 양식과 수사의 도입. 성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코드가 고백의 수행속에 도입된 것은 그렇게 해서였다.
2. 외부로의 이동 : 경련 그 자체를 의학 권력으로 옮겨 놓는 것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을 아예 추방하는 것. 경련 다시 말해서 신들림의 절정을 더 이상 고백이나 양심 지도가 아닌 전혀 새로운 담론 속에 그리고 동시에 전혀 다른 통제 메커니즘 속에 기입해 넣어야만 했다. 의학으로의 대대적인 권력 이양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교회가 몸을 통제하는 수단인 살은, 지금 다른 분석 양식과 몸의 관리를 통해 전혀 다른 권력에 몰수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학이라는 세속 권력이다. 18세기부터 경련은 의학 고유의 대상이 되었다. 경련은 자연스럽게 정신병의 신경학 모델이 된다. 이 경련 선상에서부터 교회에 의해 제안된 살을 합병시킴으로써 의학은 사상 처음으로 성의 차원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의학이 성에 대한, 성을 근원으로 하고, 성을 토대로 하는 질병의 영역을 발견한 것은 자궁이나 체액에 대한 그리스 혹은 중세의 전통의학을 확대하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 권력에 의해 조직되고 분리된 이 살의 영역을 계승하면서였다.
3. 대항-경련 기제 : 성적 권력이 규율적 교육 체계에 도움을 청한 사실
성적 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함정에 빠뜨리는 이 모든 신들림의 현상들을 통제하고 저지하며 결정적으로 지워 버리기 위해 그들은 양심 지도나 고백 같은 이 모든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체험을 그 당시 병영이나 학교 또는 병원 등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규율 메커니즘의 내부에서 작동시키려 했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신들림'이라는 단어가, '경련'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느껴져요.
새 몸으로요. 새 몸이 하는 처음의 말처럼요.
스스로 고백하는 여자라, 연극의 장소로서의 몸이라...
그 고백이 터져나오기까지, 몸이 하나의 장소가 되기까지
여자는 제 몸에 행해지는 얼마나 많은 권력들을 견뎌야 했을까요.
그런데도 그런 몸에게 내려지는 것이 내적 통제나 추방 같은 것이었다니요.
그 여자는 그들이 보기에, 너무도 초라하고도 고요했기에 외려 그 무엇보다 위협적이었던 것일까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유택님 발제보다 흩어진 문장들을 연결하고 행간의 의미들을 읽어내는 희음님의 통찰이 더 매력있게 다가옵니다.
가톨릭 내에서 권위주의와 개혁의 의지가 맞부딪히는 지점에서 저항은 왜 하필 신부가 아닌 수녀의 몸에서 나타났을까요?
성의 문제에서 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대상이었을 뿐인데도 문제의 근원은 여성에게 있는 것처럼 지탄 받았을까요?
푸코의 논의 맥락과는 조금 비껴갔지만, 세미나 시간에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더 고민해보게 됩니다.
유택님의 댓글
유택ㅎㅎㅎ 그러게요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자신만만 했는데, 정작 발제문 읽으면서 이해 안된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 ㅋㅋㅋ 이 <비정상인들>에서 나오는 마구마구 흩어져 있는 무수한 이 푸코의 <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리해서 주워담을런지... 어쨌든 세미나 하면서 세미나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진정. 그래서 같이 공부해야 한다는걸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랍니다. ㅎㅎㅎ 특히 세미나할때 아라차님이 팍팍 큰뼈대를 세우며 정리할때 무척 도움이 되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