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사상사론>2주차 묵가의 철학 등후기 +1
금강석
/ 2016-07-29
/ 조회 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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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 세미나 시작 초반에 밖에서 가스(?)가 터졌는지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중단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리쩌허우가 <묵가의 철학>을 ‘소생산 노동자’의 사상적 전형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서부터 선뜻 납득되지 않은 개념을 마주하였다. ‘소생산 노동자’란 ? 당시 대량생산방식이 없었을 것이고 씨족사회에서의 귀족, 지주 그리고 상인들과 대비되는 것으로 ‘사농공상’에서 ‘사’와 ‘상’을 제외한 ‘농’과 ‘공’ 정도로 이해하면 그나마 어설프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묵자의 묵이 줄장인 승묵을 사용하는 목수를 뜻하는데, 묵가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는 실용적, 공리적인 결사단체, 길드, 하층민의 생활공동체라고 이해하는 견해, 풍우란과 같이 군사집단이나 용병집단으로 이해하는 견해 등등이 있다고 하며 묵가의 사상은 이미 단절되었고 오늘의 기준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묵가의 겸애는 공리적 차원에서 균등성을 말하는 것이고 “상동(尙同)”은 위와 같아야 한다는 견해인데, 이때의 “상”은 화이부동(和而不同)서의 ‘화’와 대비되는 관점이며, 풍우란은 이 ‘상동’으로 인해 묵가그룹이 실패하였다고 한다. 묵가는 사회가 발전하고 생산이 확대되고, 잉여가치가 증가하고, 재정이 계속적으로 증대되고 집중되면서 사회적 소비와 수요(특히, 상부계층의 씨족귀족의 경우)가 신속하게 확대되었으며 이는 막을 수 없는 하나의 역사적 조류에 반하였고, 이런 사회발전의 객관적 규율을 위반하여 균등한 소비와 하향평준화의 문제점, 자력, 강력, 겸애, 비명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의미의 개인주의나 개인과 개인간의 평등한 계약론의 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사라졌으나 묵가적 사상들중 어떤 부분은 농민봉기나 농민전쟁 - 진승, 태평천국운동 등에서 찾아 볼수 있고, 유가나 병가 등에 흡수, 동화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리쩌허우가 전혀 다른 사상일 것 같은 노자를 병가로 보이는 손자와 한비자를 한 장으로 모아서 이야기하여 놀람이 있었는데(사마천의 사기에서도 노자 앞뒤로 병가가 기술되어 있다고 하였다.), 곳곳에서 일월, 낮과 밤, 남녀, 적과 나, 강과 약, 생과 사. 허와 실 등등 대립항의 모순 형식을 이용하여 사물을 특징을 파악하려는 개괄적인 이분법적 사유방식을 갖고 있고, 군사변증법, 정치변증법, 생활변증법으로 이들 사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전쟁이 일상화되어 있고 여기에서 ‘군자의 복수는 10년 뒤라도 늦지 않는다.’라는 중국적 지혜가 나왔다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정치가가 아닌 병법, 전쟁에 관련된 인물과 사상이 많은데, 전쟁마저 예술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또 한편으로 단순한 처세술이 아닌 인간학일 수도 있다./ 리쩌허우가 마치 내재적 발전론에 의한 서술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를테면 태평천국운동을 실패라고 단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가 우리 역사에 대하여 갖는 태도에 비해 중국인이 갖고 있는 자기 역사에 대한 하나의 자부심으로도 느껴졌다.
이런 말들 곧,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강해야 하고, 없애버리려고 한다면 반드시 세워주어야 한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주어야한다. 군대를 잘 이끄는 자는 무력을 쓰지 않는다. 작전을 잘 짜는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적과 싸우지 않는다.” 등등이 <노자>에 기록되어 있다. 마오쩌둥이 <노자>를 병서로 이야기하였다는 말이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노자>에서의 “도”는 불가확정성이고 이는 구체적 운용에서 나타나는 다양성과 신축성으로 이해된다. 이런 변역성, 융통성, 불가확정성은 병가에서 기원하는 ‘궤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유한한 언어와 견문, 경험 등을 통하여 ‘도’를 제한, 규정하고 규격화할 수 없다는 것이지, ‘도’가 초감각적이거나 초인식적 실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노자>의 ‘도’는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과 종합이라고 할 수 없고 자연사를 빌려서 인간사를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그리스 철학들이 대부분 자연에 대한 탐구에 주의를 기울인 것과 차이가 있으며 중국 철학의 변증법이나 우주론은 모두 인간의 활동을 벗어나서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서양 철학의 “애지(愛智)”와 중국 철학의 “문도(聞道)”의 특색을 볼 수 있다. ‘문도’는 소유라고 느껴지는 ‘득도(得道)’라는 개념과는 깊은 차이가 느껴지며 불경에서 <여시아문>이고 <장자>의 첫머리가 ‘문’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전국시대에 한비자는 자신의 친구인 이사의 꾐에 빠져 결국 투옥되고 죽게 되었다고 한다. 이익을 따지는 그런 전국시대에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 것, 무정한 이기주의가 오히려 냉정하고 지혜로운 것 아닌가? 약탈하고 빼앗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순수하게 산다는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탐욕스러운가. 한비자가 말하는 ‘사리를 아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아는 것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순수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때 말하는 어려움은 어떻게 지식을 처리하고 운용하는가에 있고, 그것이 실제효과가 어떠할 것인가를 계산하는데 있다.’ ‘무릇 유세가 어렵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로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 나의 유세로 설득하려는 군주의 마음을 알아내서 나의 설득이 합당하게 하는 데 있다.’ 한비의 솔직함이고 냉정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학의 승리라고 하는데, 과연 유학이라고 하는 것, 유가라고 하는 것이 맞나. 관료, 사인, 문사 등 계급이 우선하지 않을까.
....
차라리 ‘문인’ - 글을 읽고 쓰는 식자층 정도가 부담 없다. 다음 시간에 <순자. 역전, 중용의 철학> 부분입니다. 순자의 첫 편 ‘권학문’에 지렁이와 게를 빗대어 학문을 권하고 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수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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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세미나를 다시 복기하는 후기 감사합니다.
참고로 '문도'에서 聞에 관한 이야기는 <장자: 제물론> 앞부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순자는 제가 참 좋아하는 책인데.. 곁에 없어서 인터넷에서 원문을 긁어다 일부를 옮겨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길..
君子曰 學不可以已
군자가 말한다. 배움을 그쳐서는 안 된다.
青取之於藍 而青於藍 冰水為之 而寒於水
푸른 빛은 쪽풀에서 얻지만 쪽풀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로 만들지만 물보다 차다.
… 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 則智明而行無過矣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자신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앎이 밝아지며 행동에 잘못이 없다.
故不登高山 不知天之高也 不臨深谿 不知地之厚也 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也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줄 모르며, 깊은 계곡에 가보지 않으면 땅의 넓이를 알지 못하고, 옛 성인이 남긴 말을 배우지 않으면 학문의 크기를 알지 못한다.
… 積土成山 風雨興焉 積水成淵 蛟龍生焉 積善成德 而神明自得 聖心備焉
흙을 쌓아 산을 만들면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 물을 모아 연못을 만들면 교룡이 산다. 선한 행동을 반복하여 덕을 이루면 신묘한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성인의 마음을 갖출 수 있다.
故不積蹞步 無以致千里 不積小流 無以成江海
그러므로 한걸음씩 끊임없이 걷지 않으면 천리에 이르지 못하며, 작은 물줄기를 모으지 않으면 강과 바다를 이룰 수 없다.
騏驥一躍 不能十步 駑馬十駕 則亦及之 功在不舍 鍥而舍之 朽木不折 鍥而不舍 金石可鏤
아무리 빼어난 말이라도 한번 뛰어 열 걸음에 미칠 수 없고, 아무리 둔한 말이라도 10일을 가면 따라잡을 수 있다. 멈추지 않아야 일을 이룰 수 있다. 자르다 그치면 썩은 나무도 베지 못하며, 새기는 일을 그치지 않으면 쇠붙이와 돌에도 새길 수 있다.
螾無爪牙之利 筋骨之強 上食埃土 下飲黃泉 用心一也
지렁이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없고, 강한 근육과 뼈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러나 위로는 흙을 먹고 아래로는 샘물을 마시니 마음을 하나로 쓰기 때문이다.
蟹六跪而二螯 非蛇蟺之穴 無可寄託者 用心躁也
게는 여섯개의 다리와 두개의 집개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뱀이나 장어의 굴이 아니면 의지하여 살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마음을 쓰는 것이 산만하기 때문이다.
是故無冥冥之志者 無昭昭之明 無惛惛之事者 無赫赫之功
그러므로 남지 알지 못하는 아득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밝게 드러나는 지혜가 없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우직하게 하는 일이 없으면 세상에 떨칠 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