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그로테스크와 현실이 만날 때 (후기라기엔 좀 뭣한 시 추천) +3
삼월
/ 2016-07-16
/ 조회 2,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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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푸코가 권력의 그로테스크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형도의 시를 떠올렸다.
평론가들은 기형도의 시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그로테스크가 그 위력을 가장 잘 발휘할 때는, 그것이 단순히 장식이 아니라
현실 안에 슬며시 들어와 확고하게 제 자리를 확보할 때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우연이나 자동이 아니라, 아주 '능동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권력은 이제 인간을 정화하는 것을 넘어 '생산'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안개 / 기형도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댓글목록
유택님의 댓글
유택
자신이 게이 혹은 동성애 열망이 있어서(추정) 자주 갔다고 알려진
지금은 사라진 종로3가 파고다 극장(유명한 게이 크루징 극장)에서
시인 기형도의 죽음... 난 시보다 한 인간 기형도의 삶이 궁금합니다. ^^
선우님의 댓글
선우
삼월님이 해 준 계란말이 먹고 셈나 힘내서 했잖아요^^
만날 듯 만날 듯 했는데, 이렇게 푸코에서 만났군요.
우리, 잘해보아요^^
소리님의 댓글
소리
왜 이 시를 떠올렸는지 알 것 같아요.
현실의 많은 일들과 겹치면서 먹먹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