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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백석 시 후기 :: 0715(금) +7
희음 / 2016-07-18 / 조회 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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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修羅) - [[사슴]] 수록 시

 

1. 세 거미가 순차적으로 등장하고 그것을 쓸어서 내다버리는 화자의 행위 또한 세 번 반복된다. 그 행위가 거듭됨에 따라 화자의 목소리 역시 점층적으로 고조된다. 서러움과 슬픔의 깊이가 심화되는 것이다. 

2. ‘쓸어버린다, 짜릿한다, 서러워한다, 메이는 듯하다, 서럽게 한다, 슬퍼한다’ 등의 서술어를 볼 때, 시 안에서 화자의 감정이 과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칫 시적 긴장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백석의 시에서는 이런 감정적 시어가 산문 투의 서술방식과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준다. 

3. 이 시의 주제가 미물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라는 학계의 해석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 우리는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 시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의,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게 하여,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것들을 향해 시선을 던지게 한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4. 가족공동체 붕괴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라는 기존 해석에 대해서도 갸웃했다. 마지막 행에 기대어, 시를 너무 한정적인 의미에 가둬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비단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아닌 어긋남들은 도처에 있다. 세계 안의 어긋남, 세계라는 어긋남. 백석은 바로 그것을 제목 ‘수라’로 집약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국수 - 만주시편

1. 눈이 내리는 풍경과 희고 긴 국수의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눈 쌓인 마을 풍경이 국수 가락 자체보다는 국수가 가마솥에 던져져 흰 김이 흰 빛으로 더 짙게 피어오르는 풍경과 더 유사해 보였다. 

2. 이 시에는 시각(희스무레하고)과 미각(슴슴한, 쩡하니 닉은, 얼얼한, 싱싱한)과 후각(내음새), 촉각(더북한, 쩔쩔 끓는) 등의 감각이 총동원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레 시 안에서 어우러져 시의 맛을 살린다. 뿐만 아니라 그 감각들은 다음 연에서 이어지는 마을의 조용한 풍경의 전방위적 정서와도 맥이 닿아, 시를 풍성하게 만든다. 

3. 국수는 잔치 음식이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을 때 부담 없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즉 국수는 사람을 모여들게 하는 신비로운 매개였던 것이다. 그곳에는 음식이 넘치고 이야기와 웃음이 넘쳤을 것이다. 백석은 그 풍경을 살려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수를 빌어, 계절의 흐름, ‘대대로 나서 죽고 죽으며 나며 하는’ 우리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국수를 삶고 국수를 나눠 먹는 풍경으로, 우리 삶의 종과 횡을 아우르고 있는 것. ‘이것은 무엇인가’에서 ‘이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국수로 인해 불려 나오는, 국수 주위로 모여드는 종횡의 인간사(史 혹은 事), 또는 그것의 환기, 그리고 그것의 환기로 인해 휩싸이게 되는 정서 말이다.   


 

바다 - 통영시편

 

1. 이 시가 누구(란이냐, 자야냐)를 염두에 두고 쓰였냐 하는 것을 두고 항간에선 말이 분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르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시로 읽었다.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빛만 쇠리쇠리하야’는 특히 닿을 수 없음에 대한 불가능성과 비애의 이미지가 잘 드러나 있다. 비늘에 햇빛이 비치고, 그것을 내가 바라볼 때, 그것은 너무도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그 빛은 연약한 듯 강렬하여 나의 눈을 찌를 듯했던, 그리하여 살짝 눈가가 젖었던 경험, 누구나 있지 않은지. 

2. ‘당신’이라는 환영을 파도 혹은 모래에 빗대고, ‘당신’의 걸음걸이를 파도 소리에 빗대었다. 

3. ‘지중지중’, ‘쇠리쇠리하야’라는 의태어는 정확한 사전적 뜻을 모르는 채로도, 화자의 정서와 공감할 수 있게끔 하는 감각적인 어휘다. 이런 말들을 세심하게 골라 쓰는 능력, 혹은 노력 또한 백석을 빛나게 하는 요소라 본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통영시편

 

1. [바다]에 이어 이 시 역시 이루거나 이르지 못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큰 맥이 흘러간다. 그 시적 대상이 ‘당신’이 아닌 ‘나타샤’로 치환되어 있을 뿐. 

2.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1연의 비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이 시를 더 슬프고 아름답게 한다. ‘푹푹’과 ‘나린다’의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응관계도 시의 슬픔과 공허의 정서를 가중시키는 듯하다. 

3. 시의 시각적 심상이 도드라지는 시다. 한 밤의 이야기라는 흑 위에, 나(白晳)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눈이라는 백이 얹힌다. 흑의 현실 위에 백의 초현실이 얹히는 이야기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화자는 한 밤, 방 안에 홀로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을 뿐인데(흑, 현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흰 것들이 모든 것을 덮는 눈처럼 그의 세계로 와 스미기(백, 초현실)를 바라는 이야기. 여기서 초현실이라는 건 무언지, 아래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보겠다.  

4.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라는 나타샤의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의 자기 위로가 아닐까. 이미 해당 연의 첫 행에서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는 이중부정을 통한 강한 긍정으로 그가 사랑에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고 그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니. 나타샤는 ‘내 속에’ 있고 내 속에서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라는 목소리는 나타샤가 아닌 나의 것이라고 읽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렇다면 흰 당나귀는 무엇인가.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본다면 당나귀는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작고 초라한 존재들과 나란히 쓰였다. 또한 그것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백석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흰 당나귀 역시 백석 자신이 아닐까. 아무것도 할 것 없이 그저 오늘밤이 좋아서 어디선가 울고 있는 백석 자신 말이다. 그간 이 시가 사랑과 그리움의 이야기로 평가되었다면 수정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자기연민과 자기위로의 시로 말이다. 따라서 그의 초현실이란 자기연민과 위로의 수단으로 쓰인 것.
    

 

흰 바람벽이 있어 - 만주시편

 

1. ‘바람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잠깐 있었다. 방안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와 만들어진 상상적 산물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좁다란 방’에 든 화자의 처지를 볼 때, 외풍조차 단단히 막아주지 못하는, 방의 네 벽 중 가장 얇은 벽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았다. 

2. 바로 앞 시에서도 나왔지만 이 시에서도 시의 주된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고 있다. 물론 그것은 화자가 그려내고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화자 내부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끼워 넣기 방식은, 다른 목소리까지 불러내야만 하는 화자의 심적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했다. 어떻게든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서의 삶, 그 삶의 고독과 곤혹을 지탱해 내려는 화자의 숭고한 의지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3.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다’라고 나열하여 말한다면, 나열한 것 사이에 어떤 부딪힘도 없이 자연스럽다. 그 사이에 ‘높고’라는 형용사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백석은 그것을 넣었다. 그리하여 백석만의 시구가 완성된 것이다. 나열된 말들 자체가 시인이라는, 혹은 예술가라는 보잘 것 없지만 고고한 존재를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것을 과감히, 그리고 기꺼이 끼워 넣는 행위의 주체가 그들이기도 할 것이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 만주시편

 

1. 제목은 ‘남신의주의 유동이라는 동네의 박시봉 네(쪽, 방향)’이라는 뜻으로, 편지의 수신인 주소라 보면 된다. 시의 내용을 통해 박시봉은 시의 화자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제목은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화자에게 부치는 편지의 주소가 된다. 그렇다면 누가 편지를 부치는가.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가난하고 외로운 화자에게 누가 편지를 부치겠는가. 그에게 편지 부칠 이는 그 자신 밖에 없지 않을까. 

2. 이 시에도 역시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 [흰 바람벽이 있어]처럼 이 시도 만주에서 쓰인 시여서인지 시의 정서도, 시의 형식도 비슷한 구석이 많다. 홀로 든 춥고도 작디작은 방에서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거나 쓸쓸히 소일하다가, 다른 글자들과 다른 목소리를 불러내고, 현실의 누추한 삶과 대비되는 자기 존재의 고귀함을 상기하고 되새기는 것.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한’ 자의 노래와 ‘드물’고 ‘굳고 정한’ 자의 노래.  

   

여우난골족(族) - [[사슴]] 수록 시

 

* 보조자료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한 차례 낭송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 이 시에서 내용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본다. 다만 우리가 살펴본 백석 시편들과 이 시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백석 시의 문체, 즉 시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백석 시를 들어, 흔히들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고유 언어를 살려낸 점에서 최고의 백미를 보여주는 시라고도 하고, 정서적으로는 중용의 미덕을 갖춘 유례없는 시라고도 한다. 물론 중요한 평가들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리고 시 공백 세미나를 준비하고 또 함께 낭송하고 이야기하면서 느낀 백석 시의 독보적인 성취는 그 문체에 있다고 보게 되었다. 반복과 점층과 나열의 시어들, 그리고 만연체의 문장을 통해 백석은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을까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아니 그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즉 백석 시의 형식이 내용이 되고, 겉과 안이 뒤바뀌고 겉과 안이 서로를 받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속속들이 열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생활 시어의 나열, 끊일 듯 끊일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문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마침표. 그것이 바로 백석이 말하고자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하고 기어이 살아내야만 하는 한 개인의 삶이자, 시인의 삶이자, 우리 민족의 삶이자, 인류의 삶에 대한 형식적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각각의 시 안에서 살려내는 이야기와, 시인이 품은 연민과 고독과 사랑의 정서와 자기성찰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시의 형식은 형식대로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적어도 그의 한 독자인 내게는 그의 화법이 그의 세계로 읽혀, 아프고 또 고요하게 기뻤다.         ​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깔끔하고 투명한 분위기의 후기 감사드려요 ~~~ ^^ 잘 잀었슴니다.
남 잘 요약을, 그리고 포인트를 꼭꼭
역쉬 우리 반장님이셤요^^
그런데 ~~ 지난 후기와 이번 후기가 죄다 오록 공부분위기로 가득하네요 ㅋ
후기가 복습이 되는 우리의 운명 ^^
열공합시당 ~~
그리고 잘 놉시다 ~~

희음님의 댓글

희음 댓글의 댓글

급하게 써 올리느라 좀 거칠어요. 짬 내서 다듬어야죠.^^
아직은 긴장 중이라 마음껏 즐기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 경우는.
흥을 불러와야지. 아니 곧 저절로 그리될 거라 믿어요.
좋은 분들이 아주 많이 오셨으니까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시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기존의 감각이 아닌 낯선 감각으로 시를 읽어볼 참입니다.
이런 작업에 [시의 공백]과 그리고 희음은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시 읽기가 더해질 수록 생각합니다. ^_^

희음님의 댓글

희음 댓글의 댓글

저도요, 그 새롭게 읽고 새롭게 다가가는, 새 몸의 읽기가 저도 참 안 되고 있어요.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하고, 어떤게든 내 쪽으로만 오게 하고 말예요. 내가 시 쪽으로 가야 하는 건데.
시를 읽어내는 힘이 좋은 오라클 님. 그뿐 만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당신이 있어 무척이나 든든합니다. 따따시하고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오오오 ~~ 오라클 낯선 감각으로 시을 읽어본다는 것이 참 좋은 시선이고 멋져요 ~~
언제 오라클님이 시집을 내시려나 ~~
해피 데이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케테르가 이러는 걸 보면, 언젠가 다시 시를 쓰기는 하려나 봐요. 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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