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강독] 제물론 #4
기픈옹달
/ 201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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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시작에도 말씀드렸듯 오늘 읽은 부분이, 물론 앞으로 약 한 달간 읽을 부분이;;; 해석이 분분한 부분입니다. 집에 와서 전통문화 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 역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래에 번역을 그대로 옮깁니다. (타이핑 하느라 좀 힘들었;;;; 0.0;;;)
人生이란 참으로 이처럼 어두운 것인가. 아니면 나만 홀로 어둡고 남들은 어둡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인가.
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으면 누군들 유독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生成變化의 理法(代)을 알아서 마음에 스스로 깨닫는 자라야만 이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함께 이것[成心]을 가지고 있다. 만약 마음에 아직 成心이 생기지 않았는데 是非를 따진다면 이는 '오늘 越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탁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면, 비록 神妙한 지혜를 발휘했던 禹임금이라도 알 수 없을 것이니, 난들 유독 이를 어찌할 것인가.
사람의 말은 바람 소리가 아니다. 말에는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유독 확정할 수 없다면 과연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일찍이 말이 있지 않은 것인가. <사람의 말은> 막 태어난 새끼 병아리의 <무의미한> 울음소리와 다르다고 하지만 그 또한 구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구별이 없는 것인가. 참된 道는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眞과 僞가 있게 되었으며 참된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是와 非로 갈리게 되었는가. 참된 道는 어디에 간들 있지 않을 것이며, 참된 말은 어디에 있은들 옳지 않겠는가. 道는 작은 성취 때문에 숨어버렸고, 참된 말은 화려한 꾸밈 때문에 숨어버렸다. 그 때문에 儒와 墨의 是非가 생겨나게 되어 相對學派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상대학파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 하고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明晳한 認識(明)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모든 존재[物]는 저것[彼]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이것[是] 아닌 것이 없다. 彼의 입장에서는 <彼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그것(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彼는 是에서 나오고 是는 또한 彼에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彼와 是가 상호 간에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비록 그렇지만 나란히 生하고 나란히 死하고 나란히 死하고 나란히 生하고, 나란히 可하고 나란히 不可하며 나란히 不可하고 나란히 可하여 是에 말미암고 非에 말미암으며 非에 말미암고 是에 말미암는다는 주장(彼是의 상대성에 대한 지적)으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聖人은 <惠施의 彼是方生의 說을> 따르지 않고 <시비에 대한 판단을> 자연[天]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 또한 <상대적인 是가 아닌 절대적인> 是에 말미암는 것이다. <이처럼 是와 非의 區分이 無化된 상태에서는> 是또한 彼가 될 수 있으며 彼또한 是가 될 수 있으므로 彼또한 是非가 하나로 <無化>된 것이며 此도 또한 是非가 하나로 <無化>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彼와 是의 구분이 있는 것인가. 과연 彼와 是의 구분별이 없는 것인가.
彼와 是가 상대를 얻지 못하는 것을 '道의 지도리[道樞]'라고 한다. 지도리가 비로소 고리 가운데의 효용을 얻게 되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是도 또한 하나의 無窮이고 非도 또한 하나의 무궁이다. 그래서 明晳한 認識(明)으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고, 말[馬]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天地도 한 개의 손가락이고, 萬物도 한 마리의 말이다. <그런데 세속의 사람들은> 나에게 可한 것을 可하다고 하고, 나에게 不可한 것을 不可라 고집한다.
길은 사람이 걸어다녀서 만들어지고 物은 사람들이 불러서 그렇게 이름 붙여지게 된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다고 하는가. <습관과 편견이> 그렇다고 하는 데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며, 무엇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습관과 편견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데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萬物齊同의 커다란 肯定의 세계에서는> 모든 物은 진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모든 物은 可한 바가 있으니 어떤 物이든 그렇지 않은 바가 없으며 어떤 物이든 可하지 않은 바가 없다.
그 때문에 이를 위해서 풀줄기[弱]와 큰기둥[强], 문둥이[醜]와 西施[美]를 들어서 세상의 온갖 이상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道는 通해서 하나가 되게 한다. 하나인 道가 分裂하면 상대세계의 事物이 成立되고, 상대세계의 사물이 成立되면 그것은 또 파괴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성립과 파괴를 막론하고 <道에 위해> 다시 통해서 하나가 된다. 오직 통달한 사람이라야만 通해서 하나가 됨을 안다. 이 때문에 <인간 세계의 습관이나 偏見을> 쓰지 않고, 庸(常任不變의 自然)에 맡긴다. 庸이란 作用이고, 작용이란 通함이고 통함은 自得함이니 자득의 경지에 나아가게 되면 道에 가깝다. 絶對의 是에 말미암을 따름이니 그렇게 할 뿐이고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을 道라고 한다.
神明을 괴롭혀서 억지로 一이 되려고만 하고 그것이 본래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朝三이라 한다. 무엇을 朝三이라 하는가. 狙公이 도토리를 원숭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래서 다시.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다. 하루에 일곱 개라는 名과 實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이 작용하였으니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또한 절대의 是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聖人은 是非를 조화해서 天鈞에 편안히 쉰다. 이것을 일컬어 兩行이라 한다.
-<역주 장자>, 안병주 전호근 역. 전통문화 연구회
이번주에 읽은 부분을 옮깁니다.
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
可乎可,不可乎不可。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惡乎然?然於然。惡乎不然?不然於不然。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無物不然,無物不可。故為是舉莛與楹,厲與西施,恢恑憰怪,道通為一。
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凡物無成與毀,復通為一。唯達者知通為一,為是不用而寓諸庸。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適得而幾矣。因是已。已而不知其然,謂之道。勞神明為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曰狙公賦芧,曰:「朝三而莫四。」眾狙皆怒。曰:「然則朝四而莫三。」眾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為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다음 주에 읽을 부분입니다.
古之人,其知有所至矣。惡乎至?有以為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其次以為有物矣,而未始有封也。其次以為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果且有成與虧乎哉?果且無成與虧乎哉?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無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昭文之鼓琴也,師曠之枝策也,惠子之據梧也,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故載之末年。唯其好之也,以異於彼,其好之也,欲以明之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而其子又以文之綸終,終身無成。若是而可謂成乎,雖我亦成也。若是而不可謂成乎,物與我無成也。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圖也。為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以明。
그리고 강독시간에 좀 헤맸던 부분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조삼모사에 대한 곽상의 주석은 이렇습니다.
夫達者之於一豈勞神哉若勞神而於為一不足賴也與彼不一者無以異矣亦同衆狙之惑因所好而自是也
이를 이렇게 풀이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깨우친 자(達者)가 하나로 하는데 어찌 神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만약 神을 수고롭게한다면 하나로 하는데있어 쓰기에 부족할 것이다. 저것(彼)과 하나가 되게 하지 않음은 [차이를 그대로 인정함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또한 원숭이 무리의 미혹됨과 함께하여 그들이 좋아한 것을 따라 스스로 옳다고 여긴 것이다.
;;; 뭔가 길을 찾았는가 했는데 미로에 들어온 기분입니다. 참고하시고...
다음 시간에 저도 생각을 정리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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